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26화 (126/126)

126.

워낙 경황이 없어서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단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차분한 얼굴만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저분이요?”

“네. 계속 날뛰고 있었나요?”

“그, 아니, 그, 누구신…….”

에밀리아는 정신없이 말을 더듬고 있었다. 그녀에게 말을 붙여 온 사람은 지금 테러범의 앞에 서 있는 남자처럼 어떤 곳에서나 눈에 띌 법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나 단정하고 침착한 인상 탓에 괜히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느낌은 있었다. 에밀리아의 질문을 들은 그는 굳어 있던 입매를 펴고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그리고는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정원이라고 합니다.”

흠잡을 곳 없는 인사였다. 하지만…….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니었는데……’

에밀리아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한 채 눈만 깜빡였다. 인사를 받았으니 마주 인사해 주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자신을 정원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에밀리아의 이름 같은 것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눈치였다. 머리를 굴린 에밀리아는 겨우 그가 원하는 대답을 찾아냈다.

“아뇨, 아뇨! 계속 저렇게 계셨던 게 아니라, 방금 전부터…… 그, 테러범이 나타나서요.”

테러범이라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에밀리아의 얼굴에는 조심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정원은 지금 테러범들과 대치하고 있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침착한 얼굴이었다. 두렵지가 않은 걸까? 대체 이 사람들은 뭘 하는 사람들이지?

에밀리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정원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따라갔다. 그곳에는 아직 정원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듯 테러범들을 상대하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정원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석주 씨.”

그게 저 남자의 이름인 걸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정원의 목소리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남자는 정원의 부름이 들리자마자 곧장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석주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색으로 풀어졌다. 어떤 상황에도 여유가 있을 것 같던, 심지어는 테러범들을 맞닥뜨린 상황에서도 그저 차분하기만 하던 얼굴에 죄 지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정원 씨...... 여긴 어떻게 알고."

석주가 노골적으로 풀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손길 한 번에 날아갔던 테러범들 역시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했다. 반대편 건물에 처박혔던 에스퍼가 이를 갈며 다시 덤벼드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도 놀란 에밀리아는 빨리 피하라는 뜻으로 손짓 발짓을 했지만, 석주의 시선은 그런 에밀리아에게는 닿지도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다시 한 번 덤벼든 에스퍼를 날려 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에 그가 처박힌 곳은 건너편 햄버거 가게가 아니라 아스팔트 바닥이었다. 석주는 자신이 던져 버린 사람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정원을 향해 변명했다.

"일부러 이런 건 아니에요. 사고 칠 생각은 없었어요."

그 말과 함께 석주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제 앞주머니에 넣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에밀리아가 헙 소리와 함께 입을 가렸다. 눈이 가려져 있을 때에도 느꼈지만, 정말이지 길을 가다 말고도 눈이 돌아갈 법한 미남이 아닌가. 만약 이 말을 들은 것이 에밀리아였다면 더 재고 따질 것도 없이 곧장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하는 말을 꺼내고 말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방금 전과 똑같은 톤이었다.

"의도가 중요한 건 아니죠. 지금 사고를 치긴 쳤으니까."

"......."

석주는 찔리는 게 많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쉰 정원이 손가락으로 난장판이 된 거리를 가리켰다.

"일단 수습부터 하는 게 좋겠네요."

"그럼 봐주는 거 맞죠."

냉큼 나온 석주의 답에 정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석주는 씩 웃어 보이더니 더 혼나지 않기 위해서인 듯 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기절한 에스퍼와 그 동료들이 경계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건 말건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엉망이 된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발을 한번 굴렀다.

"와......."

에밀리아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테러범들이 난동을 부려 놓은 탓에 이리저리 보기 싫게 솟아 있던 바닥이 석주의 발짓 한 번에 깔끔하게 정돈되어 가고 있었다. 이게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었던가. 에스퍼를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이 남자와 다른 테러범들의 격이 다르다는 것쯤은 문외한인 에밀리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닥을 깔끔하게 정리한 석주는 여전히 눈치를 살피는 듯한 얼굴로 정원에게 다가왔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는 꼭 애교를 부려 주인의 마음을 풀어 주고 싶어 하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를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바라보던 정원이 어느 순간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에밀리아뿐이 아니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손님들은 어느덧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나타난 테러범만 해도 당황스러운 상황인데, 그 자리에 있던 남자가 손짓 몇 번으로 그 위협적이던 테러범을 모두 치워 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더니 이제는 갑자기 나타난 다른 이에게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굴고 있었다.

"앞 건물에 흔적은 좀 남았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어요."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 상황에 어울리는 대화는 아니라는 것. 그때 주위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주위를 둘러본 정원이 석주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럴 게 아니라 나가서 얘기하죠. 곧 다른 사람들도 오겠어요."

누가 봐도 강력한 에스퍼로 보이는 남자가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정원의 손에 순순히 끌려 가는 모습은 당황스러운 광경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카운터에 멍하니 서 있던 에밀리아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자, 잠시만요!"

그리고는 불과 몇 초도 되지 않는 시간 사이, 조리하고 있던 핫도그를 전용 용기에 담았다. 인생 최고로 빠르게 포장을 마친 그녀가 달려가 석주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주문하신 상품 나왔습니다!"

짧은 순간 석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곧 씩 웃어 보인 그가 '고마워요.' 하는 말을 남긴 뒤, 뒷문을 향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에밀리아는 한동안 그들이 빠져나간 뒷문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카페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을 때, 정원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서."

"......."

"설명해 보시죠?"

팔짱을 낀 채 바라보는 시선에 석주는 자연스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정원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강석주의 문제는 자신이 어떤 각도로 어떤 표정을 지었을 때 가장 정원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사고 치려던 건 아니에요. 의도하고 나온 것도 아니고...... 믿어 주세요."

아마 이 남자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정말로 정원의 앞에 있을 때뿐일 것이다. 마음이 약해지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정원 역시 이미 어이없던 심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엄격한 표정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알겠어요. 다음부터는 나왔을 때 이런 일이 있어도 그냥 모른 척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하는 석주의 말을 끊고, 정원이 손을 뻗었다.

"그게 아니라."

뻗어진 손은 그대로 석주의 이마 위를 짚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석주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정원이 다시 말했다.

"...일어났더니 없던데요."

말을 마친 뒤 시선을 돌린다. 이마를 짚은 자리로부터 가이딩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석주가 곧 이마에 닿은 손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정원의 목소리는 이미 누그러진 채였다. 석주는 품에 안은 정원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며 달래듯 중얼거렸다.

"일어났는데 내가 없어서 쓸쓸했어요?"

정원이 작게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는 해명은 따라오지 않았다. 석주는 더없이 충만한 기분으로 정원을 따라 웃음을 흘렸다. 잠시 말없이 안겨 있던 정원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어 물었다.

“그 봉투는 뭔가요.”

“아.”

그 말에 석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봉투를 건넸다. 알싸한 할라피뇨와 달콤한 딸기의 향이 섞여 오묘하고 맛있는 냄새를 내는 핫도그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할라피뇨 딸기 핫도그요.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봉투를 받아든 정원의 얼굴에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금세 채 가리지 못한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말없이 석주를 바라보다가, 정원은 천천히 다가와 석주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돌아가서 같이 먹어요.”

정원처럼 미소를 머금은 채, 석주의 발이 정원의 뒤를 따라 천천히 옮겨졌다.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난 지 막 두 달이 되던 날의 일이었다.

<리벤지 가이드라인,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