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3화 (3/281)

◈3화. 0. 빙의했는데 무슨 소설인지 모름 (3)

[소설 속에서 눈을 뜨셨는데 제목을 모르시겠다고요? 저런 저런,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누구세요?’

[‘요정’입니다. ^^]

뭐지, 이 성의 없는 이모티콘은.

[저희 ‘요정’은 빙의자 님께서 편안한 빙의 라이프를 즐기실 수 있게 도와드립니다!]

이건 또 무슨 신종 사기지?

그러나 다음 순간 저절로 입이 열렸다. 내가 입 밖으로 말을 꺼냈던가?

“……어떻게?”

[좋은 질문입니다! 바로 지금처럼 빙의자 님께서 보고 계신 ‘요정의 창’으로 많은 것을 도와드릴 예정이니까요!]

잠시만. 내가 로맨스 판타지 위주로 읽기는 했지만, 가끔 남성향 판타지, 무협 소설 또한 열심히 읽었다. 그래서 말인데 드는 생각이.

“요정의 창? 시스템 창 아냐?”

[……크흠, 저희 요정의 창은 빙의자 님의 상태와 여러 상황을 알려 드리는 창구로, 오직 빙의자 님 눈에만 보이는…….]

“시스템 창이네.”

[크흠, 요정의 창입니다!]

짝퉁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지만, 창은 몇 번 깜빡이더니 제 할 말을 다시 시작했다.

[흠흠! 이런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요. 빙의자 님은 현재 아주 위험한 처지이니까요!]

“내 처지?”

[그렇습니다. ‘내 상태’라고 외쳐 주세요.]

……상태 창 맞잖아.

“내 상태.”

[이름: 달린 에스테

칭호: 만렙 빙의자(lv.1)

특성 등급: 빙의자(레전드리), 인도자(레어), 백작 영애(-)

현재 상태: 시한부

건강 수치: 1/100

건강 상태: 매우 좋지 않음, 휴식이 필요합니다.

스킬: 요정의 창(lv.1), 빙의(lv1)]

“……1?”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생소한 것이야 둘째 치고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건강 수치가 1이요? 한눈에 봐도 정상은 아닌 수치다.

[모두 보셨습니까?]

[당신은 곧 죽습니다!]

순간 오싹, 등골이 오싹해졌다. 장난스러운 말투에서 어린아이의 것처럼 무구한 악의가 느껴졌다.

[살고 싶으신가요?]

당연하잖아. 문자가 단조로이 나열된 창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침이 꿀꺽 넘어간다.

[빙의자 님이 살고자 하시면 요정의 창은 당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도울 것을 약속드립니다.]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N]

[단, 퀘스트를 확인한 순간 당신은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곧 죽는다며? 찝찝한 표정으로 ‘yes’ 버튼을 꾹 눌렀다.

[퀘스트(메인) - ‘세계를 바로잡아라!’

이 세계는 당신이 읽은 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세계에 큰 문제가 생겼고, 당신만이 이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실패 시: 사망]

“으아, 이게 뭐야!”

누르면 산다며! 살 수 있다며!

[계약을 축하드립니다 ^_^!]

“같잖은 이모티콘 집어치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지만 빙의자 님이 살아남으실 수 있는 방법은 이거밖에 없는걸요? (´;Д;`)]

……하지 말라니까 더 하네, 이놈?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조금 전 내 상태 창에서 보았던 건강 수치 1.

‘요정’ 운운하는 의뭉스러운 창은 둘째 치고 이게 사실이라면 내 상태는 상당히 위험하단 소리다.

[예스, 그렇습니다. 현재 빙의자 님이 빙의한 신체는 딱! 죽음만을 면한 신체! 따라서 각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어쩐지 자주 몸살이 나더니만.

이거 뭐, 움직이지도 못하게 해 뒀어?

“건강해질 방법은 없다는 건가.”

아니다. 조금 전 저 요정이 살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정해진 미션을 수행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건강해질 수도 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빙의자 님은 퀘스트를 통해 자신의 건강 수치를 충분히 올리실 수 있습니다!]

“오, 어떻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미션 내용이 안 적혀 있는데?”

[우선 이 세계에 대해 설명해 드리죠. 이곳은 과연 어떤 책 속의 세계인가! 빙의자 님이 가장 궁금해하실 내용 아니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궁금하지!

[그에 대한 답부터 드리자면, 여긴 어느 책의 세계도 아닙니다.]

“뭐?”

[정확하게는 빙의자 님이 읽은 책들이 뒤섞인 세계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요정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렇다.

내가 읽은 책 중에는 실제 세계를 뚝 떼 와서 만든 이야기가 있었단다.

본래는 세계가 잘 나누어져 있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시간과 공간이 뒤틀려 소설이 섞여 버리면서 클리셰도 뒤틀렸다고.

[빙의자 님이 받으신 메인 퀘스트는 이 세계를 바로잡는 퀘스트입니다.]

[이곳은 빙의자 님이 읽은 책 중 4권의 소설이 뒤섞인 세계.]

[여기, 빙의자 님의 특성에서 ‘인도자’라는 항목이 보이십니까? 바로 이것이 빙의자 님이 진행할 역할!]

[퀘스트(메인) - ‘세계를 바로 잡아라!’

이 세계는 당신이 읽은 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세계에 큰 문제가 생겼고, 당신만이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내용: 뒤틀린 4편의 소설을 원작대로 되돌리기

실패 시, 사망]

그래서 내가 할 일이란, 무려 소설 네 편이 섞인 이 세계에서 내용을 바로잡는 것이란다.

“아니, 잠시만, 잠시만.”

나는 얼른 태클을 걸었다.

“뒤섞였다는 소설이 네 편씩이나 되면 내가 그걸 어떻게 푸는데? 그보다 난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네! 그것이 바로 실마리입니다. 빙의자 님이 주인공을 본 순간 그가 주인공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힌트가 발생합니다!]

[그 힌트를 통해, 이야기를 알고 있던 내용대로만 전개해 주시면 됩니다.]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이 세계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차린 순간 저절로 아시게 될 겁니다.]

자기가 요정이라 주장하는 이 시스템 창은 내가 주인공을 한눈에 알아볼 거라고 확신했다. 그때부터 메인 퀘스트가 시작될 거라나?

지금 내가 읽은 소설도 모두 기억 못 하는 판국에 무슨…….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빙의자 님은 아주 잘 아실 겁니다.]

[확고하시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나는 곧 입을 살짝 벌렸다.

“설마, 내 남주 취향 말이야?”

[그렇습니다! 내용은 세부적인 부분까지 완벽하게 똑같이 전개되지는 않아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세계의 큰 줄기에서만 벗어나지 않으면 되니까요.]

“줄기?”

[‘클리셰’ 말입니다.]

[선물로 스킬 ‘클리셰의 법칙’을 드립니다!]

허어? 내가 황당해하는 사이에 손에서 번쩍, 새하얀 빛이 터졌다.

윽, 눈부셔! 눈을 비비며 힘들게 눈을 다시 뜨자, 내 손목엔 못 보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이게 뭐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팔찌 위로 희멀건 창이 떴다.

[아이템 - 사이렌 오더(유니크)

효과: ‘주연’이 가까이 있을 시 신호를 보냅니다!]

[메인 퀘스트를 시작하는 빙의자 님을 위한 요정의 특별한 선물!]

[이 아이템을 사용하시면 주인공을 찾기 쉬우실 겁니다.]

아하, 그러니까 이게, 주인공 가까이 있으면 빛을 낸다고?

좋긴 좋은데……. 내 몸이 이래서야 써먹을 수도 없는 거 아니야?

‘당장 난 어디 산책도 못 나가는 병약한 몸이라고.’

[아 참,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빙의자 님이 주인공을 찾으려는 시도를 더 많이 할수록, 혹은 ‘클리셰’에 다가갈수록 건강 수치는 오를 예정입니다.]

[단, 이를 포기하거나 게을리할 시엔 수치가 다시 떨어집니다.]

뭐야, 그 눈앞에서 흔들리는 당근 같은 미끼는? 게을러지지 말라고?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 퀘스트만 해결하면 살 수 있다는 거지.’

[서브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퀘스트(서브) - ‘첫 번째 책을 찾아라!’

정해진 기간 내에 첫 번째 소설의 실마리를 찾으세요.

실패 시, 건강 수치 –100

기한: D-10]

건강 수치 마이너스 100? 지금 내 건강 수치가 1인데, 그럼 이거…….

“사망한다는 소리잖아?”

[그렇습니다!]

미친! 해맑게 이야기하지 말아 줄래? 나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일까.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죄로 벌을 받는 중인가? 나는 선량하게 산 것 같은데.

절망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참고로 이 세계에 뒤섞인 소설의 소재는 총 4개, 육아물, ???, ???, ???입니다.]

“물음표는 뭐야?”

[추후 해금됩니다!]

“허어…….”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이거 다 찾으면 나 집에 갈 수 있나?”

[귀향뿐이겠습니까, 소원도 이뤄 드립니다!]

뭐, 그렇다면야.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여타 빙의한 소설 속 인물들처럼 열심히 원작을 좇아야 하는 모양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문제는 그 원작이 네 편이나 된다는 것 같지만 말이다.

* * *

이후 며칠 간 나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지냈다. 요정이 어서 빨리 뭐라도 해야 한다고 경고했음에도 열이 펄펄 끓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벗을 해 주는 베키가 있어 심심하지는 않았다. 책도 못 읽게 해서 좀 답답하긴 했지만.

열이 막 내렸을 즈음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달린, 또 열이 올랐다고 들었어.”

나를 염려스럽게 바라보는 사람은 ‘달린’의 친구 리제 트리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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