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4화 (4/281)

◈4화. 0. 빙의했는데 무슨 소설인지 모름 (4)

“식은땀 좀 봐, 괜찮아?”

긴 갈색 머리를 묶은 리제는 아주 귀여운 아가씨였다. 나랑 동갑으로 몸집도 작고 얼굴도 동글동글했다.

“리제.”

“응, 말해 봐. 무슨 일이야?”

너도 내가 시한부인 걸 알았니? 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물어봐서 뭐하겠나.’

그동안 내가 움직이면 사람들이 울상 짓는 이유를 알게 된 것만으로 족했다.

거기다 나에게 주어진 어마어마한 임무까지 알게 되었고 말이지.

‘내 상태.’

[이름: 달린 에스테

칭호: 만렙 빙의자(lv.1)

특성 등급: 빙의자(레전드리), 인도자(노멀), 백작 영애(노멀)

현재 상태: 시한부

건강 수치: 8/100

건강 상태: 눈곱 만큼 오른 건강! 그러나 무리는 금물! 휴식이 필요합니다.

스킬: 요정의 창(lv.1), 빙의(lv1), 클리셰의 법칙(lv.1)]

퀘스트를 하겠다고 받아들인 이후로 건강 수치가 7씩이나 늘었다. 거기다 몸살이 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달까.

“이젠 괜찮아졌다니 다행이야.”

리제가 푸스스 웃었다. 미인은 아니지만 웃으면 순진해 보이는 인상이 더욱 빛을 발하는 얼굴이었다.

착하기는 또 엄청 착해서, 한 달여간 이 소설 제목을 몰라서 멘붕에 빠진 나를 정성껏 위로해주었던 친구였다.

“흐엉엉엉! 리제, 나 제국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랑 친구 하고 싶어. 으헝헝!”

우리나라에서 제일 예쁜 걔가 주인공일 거라고 생각해서, 리제를 붙잡고선 엉엉 울며 염치없이 눈물을 쏟아 냈는데.

리제는 당황하면서도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었다.

“저런, 걱정하지 마! 내가 당장 누가 제일 아름다운 분인지 알아볼게!”

당시의 난 좀 정신 나간 것처럼 보였을 텐데 말이다.

“네가 좋아하는 초콜릿 퐁듀를 가져왔어. 그리고 향초랑, 아, 쿠키도 구워 왔어! 지난번에 맛있게 먹었잖아.”

“직접 구웠다고? 세상에, 너무 좋아! 이렇게 받아도 되는 거야?”

“난 네가 맛있게 먹어 주는 게 제일 기쁜걸.”

매일매일 간식도 챙겨와 줘, 언니처럼 챙겨줘. 심지어 병간호도 해 줬다. 귀족 영애가 말이다.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달린.”

병석에서 일어났을 때 얼마나 고맙던지.

그러고 나니 괜히 걱정이 되었다. 우리 리제, 착해도 너무 착한데…… 설마 너무 착해서 손해 보는 타입의 ‘주인공’은 아니겠지?

나는 슬쩍 며칠 전 요정이 주었던 팔찌를 내려다보았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네. 그럼 리제는 주인공이나 주연은 아니구나.’

잠깐 고민에 빠진 사이 방 한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던 리제가 작게 감탄을 토해냈다.

“그보다 초상화들을 사 모았다더니 정말이었구나. 이 많은 초상화를 어디에 쓰려고 그런 거야?”

“음, 그냥, 중요한 일이야. 분류하는 데 일주일이나 걸렸다니까. 아주 고생했어, 정말.”

어쨌든 그 덕분에 일주일 전 벽에 잔뜩 기대어 있던 초상화의 수는 5분의 1로 줄었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초상화 쪽에 눈길을 고정한 채 미간을 찌푸렸다.

요정의 창은 내가 첫 번째 이야기의 주연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첫 번째 미션 또한 열릴 거라고 했다.

‘제한시간은 열흘.’

문제는 제한시간 내에 이걸 찾아야 한다는 거다.

‘거기다 누워 지내느라 사흘이 훌쩍 흘렀어.’

이 미친 시스템 같으니. 난이도가 너무 높잖아. 이 정도면 하드 모드 아니냐고.

막 병상에서 일어난 사람한테 발로 뛰라니, 욕이 치밀었지만 난 빠르게 움직였다.

“리제 있지, 편지로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잖아.”

리제의 집안 트리샤 후작가는 우리 집보다 힘이 더 세고 정계 쪽에 인맥이 넓은 가문이었다. 트리샤 후작이 제국의 재무장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배경 덕에 리제는 또래 영애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응, 네 부탁이라면 뭐든 좋아.”

리제의 미소에 나도 절로 웃음이 났다. 어디, 본격적으로 남자주인공을 찾아볼까.

“저 초상화 속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알려 줘.”

리제가 내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분들을 말이니?”

나를 바라보던 리제가 으음, 하고 녹색 눈동자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달린, 음, 저분들이 네 취향인 거지?”

“비슷해.”

“……정말, 취향이, 음, 뚜렷하구나?”

……나도 아니까 그렇게 애써 돌려 말하지 않아도 돼.

“하하하, 그렇지?”

내가 봐도 미남이긴 한데 성질 더러워 보이는 애들밖에 없거든.

오래전부터 내 취향은 아주 ‘까칠한’ 남자주인공이었다.

생긴 것부터 눈꼬리가 삐죽 올라가 ‘가까이 오지 마라, 나 까칠한 놈임’을 외치며, 푸른 눈에, 성격은 북부 대공인 양 차갑고 냉정한 미남들 말이다.

그냥 차갑기만 한 건 안 된다. 정말 까칠해야 했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타입이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 진짜 내 남자를 고르는 게 아니므로 상관없다.

감히, 내가 널? 하고 지겨우리만치 외치다가 나중에 가서는 여주인공에게 쩔쩔매는 남주라니 너무 좋지 않은가.

물론 다정하고 조신하며 귀여운 남자 캐릭터도 좋아하지만, 그런 친구들은 서브로 있을 때 더 좋더라고.

고로, 내가 고른 초상화들은 전부 그런 쪽이었다.

1차는 외모로 걸렀다는 소리다.

‘2차는 성격 문제라 직접 봐야 한단 말이지.’

꽤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할 듯했다. 비효율적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당장 추려 둔 초상화는 열세 점 정도. 난 팔짱을 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제, 혹시 저 초상화 속 사람들 실제로 본 적 있어? 저 중에서 실물이랑 다르게 생긴 사람이 있을까?”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리제가 초상화 중 몇 개를 짚었다.

“왼쪽에서 두 번째 남작님이랑 오른쪽에서 네 번째 자작님, 그 옆의 영식은 음…… 조금 미화된 것 같아.”

“그래?”

리제의 도움으로 여덟 명 정도가 다시 추려졌다. 우선적으로 만나 볼 사람이 정해진 셈.

직접 부딪치다 보면 뭐든 생각날지도 모른다.

‘문제는 남은 인간들 성격이 하나같이 장난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거겠지만.’

내 업보다, 이건.

과거의 나에게 하필이면 왜 이렇게 사나워 보이는 남자들만 좋아한 거냐고 묻고 싶지만.

아니, 솔직히 누가 빙의하게 될 걸 예상이나 했냐고.

그리고 그런 것까지 고려해 좋아하게 된 거면 이미 취향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 일러스트가 예뻐서 보기 시작한 것도 있단 말이야!

천천히 남은 초상화들을 훑다 말고, 유독 눈에 띄는 두 사람 앞에서 멈춰 섰다. 각기 누가 더 잘생겼는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미남들이었다.

이 중 눈이 더욱 가는 하늘색 머리를 가리키며 리제에게 물었다.

“리제, 이 사람은 누구야?”

“응? 달린, 저분은 2황자님이시잖아.”

황자?

“아 응. 응, 그랬지? 너무 잘생겨서 잠시 말이 헛나왔나 봐.”

“뭐? 너도 참. 하기야 이분은 아주 오래전부터 모두가 천신의 현신이 아니냐고 찬양했을 정도니까.”

그건 그러네.

즐비하게 늘어선 초상화 중에서도 또 다른 하나와 함께 단연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실물을 그린 것이란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바라보게 되었으니까.

‘물론 성깔은 더러워 보인다.’

하늘색 머리카락과 시리도록 푸른 눈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진짜 성질 더럽게 잘생겼어.’

촉이 와, 촉이.

어차피 찾아야 할 건 네 사람이다.

‘어제 요정을 붙잡고 계속 물어봤더랬지.’

혹시나 이 세계의 책이 ‘역하렘’ 즉 메인 남주가 여럿인 소설이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단다.

이 세계의 모든 소설은 남주 하나에 여주 하나.

“응. 맞아, 맞아. 네 말대로 자꾸 눈이 간다. 그나저나 황자 전하의 성함이 뭐였지?”

리제가 멈칫했다. 왜 그러는 거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자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리제가 입을 열었다.

“음…… 달린, 너도 이미 알겠지만…… 황족의 이름은 두 개잖아?”

머뭇머뭇 열린 리제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낯선 이야기였다.

“평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름이라면 모를까, 은밀하게 전해지는 진명(眞名)을 황성 아닌 곳에서 입에 담으면 신의 저주를 받는다는 미신이 있어.”

“어?”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겨우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 왜 저주를 받아?

하지만 퍽 심각한 표정의 리제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원래 황족은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라 하잖아. 얼마 전엔 신의 유지를 이었다는 황녀님도 등장하셨고 말이야. 그 뒤로 진명이 더욱더 고귀하게 여겨지게 되었고.”

리제가 하늘색 머리 미남이 그려진 초상화의 액자 부분을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황자님 성함은 너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 수도의 귀족 가문에서 아이가 성년이 될 때 황실에서 사람이 나와 진명에 관한 교육을 하니까. 이때 생에 딱 한 번 황족들의 진명을 듣잖아.”

“겨우 한 번 듣고 기억한다고……?”

내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리제가 끄덕였다.

“그렇지. 진명에는 성스러운 힘이 있어서 한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아. 다만 발음이 까다로워서 조심해야 할 뿐이지.”

……아니, 잘 모르는데. 그래 봐야 나는 이 세계에서 눈 뜬 지 한 달하고도 보름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눈뜬 시간의 반은 소설을 착각해서 삽질했으며 반은 앓아누웠던 참이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리제가 방싯 웃었다.

“인사할 때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오직 그분께만 들린다고 하잖아. 일종의 마법의 언어 같은 거라니, 참 멋진 것 같아.”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늘어놓던 리제가 다시 화제를 초상화 쪽으로 돌렸다.

“네가 고른 초상화에 마탑주님도 있고 대공님도 있어서 조금 놀랐어.”

“……그래?”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뭐야, 딱 들어도 뭔가 있을 법한 이 직업들은.

“귀족 영애들 중에 제국 미남자들의 초상을 모으는 소소한 취미를 가진 분들이 있다고 하던데, 달린 너도 혹시 그 모임에 가입한 거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이 세계의 덕질 모임인 건가, 트위터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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