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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5화 (5/281)

◈5화. 0. 빙의했는데 무슨 소설인지 모름 (5)

“아, 으응. 가입할 생각은 없지만 관심이 생겨서.”

“그렇구나. 난 또 네가 결혼 상대를 고르려 모은 건 줄 알았지 뭐야. 사실 네가 이렇게 빨리 혼인을 한다니 조금 서글프기도 했고…….”

“응? 아니야, 아니야.”

물론 하녀들은 그런 오해를 한 것 같지만. 난 얼른 손사래를 쳤다.

“당장은 혼인 생각이 없는걸? 너랑 과자 먹는 시간이 더 좋아.”

그리고 시한부 여자랑 혼인하려는 남자가 있겠나 싶기도 하고 말이지.

‘빨리 건강 수치부터 올려야 해. 똥꼬 빠지게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고.’

내 몸 상태를 떠올리고 고개를 가로젓는데 문득, 눈을 시무룩하게 떨어트린 리제가 보였다.

“저, 달린…….”

“응?”

“내가 자주 놀러 와서 불편하진 않아? 사실 난 너 외엔 친구가 거의 없잖아. 네가 불편할까 봐…….”

“으응? 전혀. 무슨 그런 생각을 해? 자주 놀러와.”

그러자 볼을 살짝 물들인 리제가 방싯 웃으며 나도 좋아, 하고 속삭였다. 와, 귀여워.

설명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된 까닭에 리제는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갔다.

어쨌거나.

“정보를 더 얻은 셈인 거지?”

“네가 고른 초상화에 마탑주님도 있고 대공님도 있어서 조금 놀랐어.”

마법이 있는 세계라는 것과 황족의 이름을 막 부르면 안 되는 규칙이 있는 곳.

‘뭔가 기억이 좀 더 날 듯 말 듯한데.’

이 초상화 속 사람들과 만나보면 뭔가 더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런데 때마침 후보들이…….”

나는 당장 만나야 하는 후보들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자와

마법사와

대공

이었으니까.

…누가 짜 놓았다고 해도 안 믿기겠다. 어쩜 로판 남주 직업 3대장이 여기 다 모여 있네?

“일단, 누구든 직접 만나 봐야겠다.”

사실 셋 다 내 취향으로 잘생긴 데다 저마다 그럴싸한 직업까지 갖추고 있단 말이지.

‘일단 연회에 가야겠네.’

나는 천천히 창문을 응시했다. 오후의 볕이 반짝반짝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끙끙 앓느라 밖으로 전혀 나가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안에만 있어서 그런가. 찌뿌둥하네…….”

산책하는 정도로는 하녀도 무어라 하지 않으니. 문득 조금 걷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 건강 수치도 제법 올랐으니 말이다.

‘내 상태. 건강 수치만.’

[이름: 달린 에스테

현재 상태: 시한부

건강 수치: 12/100

건강 상태: 눈곱만큼 오른 건강! 그러나 무리는 좋지 않습니다. 가벼운 산책은 가능합니다.]

[요정의 추천! 오늘 산책을 한다면 뜻밖의 행운이 있을지도?!]

“뜻밖의 행운은 또 뭐야?”

리제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남주 후보를 추린 탓인지 건강 수치가 한 시간 만에 4나 올랐다.

모처럼 건강 수치도 올라서일까, 요정이 권한대로 산책을 한번 해 볼까 싶었다.

“정원에라도 가 볼까.”

* * *

나는 복도를 사박사박 걸었다.

정원에 발을 딛자 기대했던 것처럼 포근한 볕이 나를 반겼다.

조금 전 혼자 산책하고 싶단 말에 시무룩해하던 베키가 적당한 운동은 좋은 거라며 숄을 건네주었다. 조금 쌀쌀하다 싶은 날씨에 딱 맞았다.

‘앞으로 남주 후보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을 한번 해 봐야 하는데 말이지.’

일단 접근해서 정보를 얻어야겠지.

그런데 대뜸 가서 ‘당신이 내가 읽은 소설 주인공일 수도 있으니, 우리 잠시 친해져 볼래요?’ 할 수는 없으니까 적당한 구실도 만들어야 했다.

전부 범상치 않은 직업들이다 보니 그저 그런 백작가 영애가 평범한 구실로는 만날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뭔가 알아내려면 어떻게든 해봐야지.

‘어차피 주연에게 다가가면 팔찌가 반짝거릴 거라며?’

[빙고! 그렇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쭉 기지개를 켰다.

“저게 베키가 말한 온실인가?”

눈앞에는 거대한 온실이 있었다.

“아가씨, 우리 저택의 온실은요, 제국에서 제일 커서 황실 분들도 놀러 오신대요!”

“그래? 그래 봐야 온실 아니야.”

“아뇨아뇨, 아주 오래전에 마법을 걸어 주신 대마법사님의 마법이 남아 있어서 희귀한 꽃이 핀대요. 게다가 오직 백작님 일가를 포함해 황실의 허락을 받은 이들만 들어갈 수 있어서 함부로 팔지도 못한다고 해요.”

“그래? 그건 아깝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씩 정원에도 나올 걸 그랬다.

‘하긴, 지금까지는 건강 때문에 무리였겠지.’

사실 하녀들이 입 모아 저택의 온실을 칭찬했는데, 주에 한 번씩 열이 끓어오르는 이 몸 때문에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나는 눈앞에 우뚝 선 온실을 바라보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온실로 가는 길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였다.

“윽.”

쿵! 갑작스럽게 나타난 뭔가에 부딪혀 나는 그대로 비틀비틀 밀려났다.

사람인가? 나는 욱신거리는 코를 움켜쥐고 그대로 힘없이 주저앉았다.

“뭐야?”

서늘한 목소리가 귀를 선연하게 울렸다.

부딪쳐놓고 괜찮냐는 말도 없는 인성에 울컥해서 고개를 들었다. 뭐긴 뭐야.

네가 사과를 하셔야 할 타이밍이지!

그러나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떠오른 말을 꺼내는 대신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만약 내 취향을 글로 쓴다면 딱 이 남자를 묘사할 것 같았다.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매에 하늘거리는 연한 은하늘색 머리칼. 냉정하게 좁혀진 미간과 서늘한 푸른 눈동자는 살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남자가 눈을 찌푸렸다.

“세상에? 요즘엔 인사를 이런 식으로 하나?”

그가 성큼 다가오자 훨씬 큰 그림자가 나를 가득 덮었다.

“……예?”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자 심기가 불편한 듯 남자가 내가 물러선 만큼 다시 거리를 좁혔다.

서릿발같이 차가운 눈동자는 자세히 보면 푸른 빛 안에 에메랄드빛까지 살짝 도는 신비한 색이었다.

뒷걸음질 치던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지금 눈앞에서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얼굴은 분명 조금 전 초상화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그것도 1번으로 점찍어 놓은 애잖아?’

잠시 팔찌를 내려다본 나는 깜짝 놀랐다.

반짝반짝! 팔찌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가렸다.

‘얘가 남주라고? 정말?’

아니야, 잠깐. 팔찌는 ‘주연’에게 반응한다고 했잖아.

[그렇습니다!]

주연은 주인공과 같은 뜻이 아니다. ‘주연’엔 주인공뿐 아니라 주요 인물도 속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서브남도 주연일 수 있겠고, 육아물이라면 주인공의 아빠도 주요 인물일 수 있겠다.

[빙고! 요정은 빙의자 님의 통찰력에 감탄합니다.]

일단 속을 가라앉혔다.

“……와, 이건 진짜.”

그래도 미친 얼굴이네.

남자가 멈칫했다.

“진짜?”

“예?”

“뭐라고 했지?”

“……저 입 밖으로 냈어요?”

“그래.”

누가 봐도 내 취향, 하고 써 붙인 남자가 미간을 마구 찌푸렸다.

와, 성질 엄청 더러워 보여!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때였다.

“황자 전하!”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달려오는 중년 남성이 보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아버지잖아?’

부친도 나를 보았는지 커다란 눈을 끔뻑끔뻑 떴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잘생긴 남자를 향했다.

“이미 도착하셨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이곳까지 오시게 해 송구합니다, 전하.”

고개를 숙이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는 한 번 더 확신을 굳혔다. ‘전하’라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공손한 아버지의 태도에 찔렸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에 내가 어마어마한 무례를 저지른 건 아니겠지?

“흐흑, 어찌 이런 불행한 일이! 아가씨,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신다니요!”

이 세계에서 깨어난 지 한 달째, 아직 이곳의 예법을 모두 깨우치지 못했다. 임기응변으로 대꾸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들키고 만 나는 드문드문 기억나지 않는다는 변명을 했다.

철석같이 믿은 이들은 역시 고열 때문이라며 눈물을 흩뿌렸다.

“오, 가엾은 내 딸!”

손수건을 가장 많이 적신 사람이 부친이었다.

이후로도 툭 하면 감기에 픽픽 쓰러지다 보니 진도가 그리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방금 황족 앞에서도 사고를 치고 말았지만.

……아니, 깜짝 놀랄 만큼 잘생긴 걸 어떡해?

확실히 사나운 눈매는 노려보는 것만으로 오금을 저리게 했지만.

‘찡그려도 잘생겼다.’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흡사 네 죄를 알렸다,라고 불호령을 내리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황자의 눈썹이 쓱 치켜 올라갔다.

아버지가 얼른 나섰다.

“아, 이미 인사를 올렸겠지만, 이쪽은 제 여식입니다. 하나뿐인 딸이지요.”

아니, 아버지. 인사, 못 올렸는데요…….

“됐다.”

눈치로 뭔가 이상함을 느낀 아버지가 나를 쳐다봤다.

내가 무어라 하기 전에 황자가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얼마나 긴지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벌어진 거리가 상당했다.

‘너…… 역시 내 취향답게 성격이 좀 많이 파탄 났구나.’

역시 내 취향은 현실에 가져오면 안 될 인성임을 깨달은 나는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얜 주인공에 가까운 것 같다.’

그리고 아직 생각나는 건 없지만…… 실마리에 성큼 다가간 것 같단 말이지.

더 알아가고 싶지만 이놈의 몸이 허락하지 않았다.

일단 누군지 알았으니, 당장은 얌전히 물러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달린, 너도 함께 온실에 가면 어떠하겠느냐.”

“……네?”

아버지가 뜬금없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엉뚱한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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