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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6화 (6/281)

◈6화. 0. 빙의했는데 무슨 소설인지 모름 (6)

나는 어느새 멈춰 선 황자와 아버지를 번갈아 봤다.

아버지, 저 사람이 눈빛으로 살인광선을 쏘는데요.

“음…… 아버지, 저는…….”

“하하, 좋다고 할 줄 알았다. 어서 가자꾸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백작은 아픈 딸 생각만 해도 눈시울을 붉히는 다정한 아빠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눈치가 살짝 없고 사람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단점을 가진 것 같다.

반쯤 억지로 끌려가게 되긴 했지만 황자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으니 나쁘지만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이후 어떻게든 접촉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황자는 이쪽을 못마땅하게 노려봤지만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졸지에 셋이 걷게 됐지만 말하는 것은 아버지뿐이었다.

“온실에 라디큘러스 꽃이 한창입니다.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아주 희귀한 꽃이지요.”

굳게 다물린 옆모습은 조각처럼 잘생겼다.

나는 흰 눈에 하늘색 물감을 똑똑 떨어트린 것처럼 예쁜 은하늘색 머리칼이 한들한들 흔들거리는 것을 보다가 얼른 눈을 피했다.

훔쳐보는 걸 들킨 것 같다.

‘눈치가 더럽게 빠르시군. 역시 남주의 덕목은 빠른 눈치지!’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를 것도 같은데.

들키지 않고 미남을 훔쳐보는 방법은 없을까?

다행히 황자가 불만을 터트리기 전에 온실에 도착했다.

따뜻한 공기가 피부 위를 훅 스쳤다.

조금 전까지 안절부절못하던 기분을 싹 잊을 만큼 아름다운 온실이었다. 크리스탈처럼 반짝이는 유리 아래 활짝 핀 꽃이 손님을 조용히 반기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냈다.

‘세상에, 우리 집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형형색색 피어난 꽃뿐 아니라 모양도 줄기도 제각각인 나무들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모습이 장관이었다.

볕이 내리쬐는 온실이었지만 불투명 유리라 그런지 곳곳에 은은한 빛을 뿜는 등을 설치해 둔 것이 보였다. 하녀에게 듣기로는 이곳의 등은 전부 마법등이라고 했다.

“여전한 곳이군.”

“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황자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조금 전보다 확연히 부드러워진 얼굴이었다.

‘젠장, 이런 까다로운 녀석이 남주라니. 게다가 소설이 총 네 편이니, 얘처럼 까다로운 남자를 셋이나 더 만나봐야 된다는 거지?’

[힘내세요, 빙의자 님!]

넌 좀 조용히 해. 더 막막해지니까.

이윽고 길이 살짝 좁아지며 자연히 황자와 아버지가 앞섰다.

그렇게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가며 황자님의 뒤태를 흐뭇하게 감상할 때였다.

아버지 옆 커다란 나무를 비추던 등이 깜빡거리더니 그대로 꺼졌다.

“아니, 이게 왜…….”

아버지가 당황하는 것도 잠시, 뒤이어 천장의 전등이 차례대로 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환한 대낮인 터라 깜깜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불투명 유리를 뚫고 들어오는 빛은 턱없이 부족해 사방이 어두워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소, 송구합니다, 전하. 마법등의 연료가 다 된 듯하옵니다. 제가 얼른 담당 마법사에게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은 에스테의 혈족과 황실이 허락한 손님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 시종도 출입하지 못한다고 했다.

정원사조차도 아버지나 이 집의 장남인 오빠와 함께 들어와야 할 정도인지라 평소 같으면 시종을 시킬 일도 아버지가 직접 나서야 했다.

“……다녀오도록.”

황자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비운 뒤, 졸지에 이곳엔 나와 황자 둘만 남았다. 나는 눈만 이쪽저쪽으로 굴렸다.

음…… 무슨 말이든 걸긴 해야겠지? 그래야 하는데…….

“…….”

말 걸면 죽이겠다는 얼굴을 한 사람에게는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예쁘고 잘생겼는데 너무 사나워 보인다. 분명 내 취향이 까칠한 미남이긴 한데 저건 그냥 화가 잔뜩 난 고양이 같다. 건드리면 할퀼 것 같아.

“음, 전하?”

“…….”

“전하? 전하.”

난 고개를 갸웃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도록.”

용건만 간단히라니. 내가 뭘 했다고. 하지만 그는 갑이고 나는 을이었으므로 얼른 미소를 한껏 담았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제가 마저 안내해 드릴까요?”

그가 눈썹을 휘었다.

“해 드릴까요?”

“…….”

“……그, 해 드려도 괜찮겠사옵니까?”

……이게 정답이니? 눈을 깜빡이며 그의 눈치를 보는데 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예법을 배우긴 했나?”

“배우는 중입니다.”

“그대 나이가?”

나는 당당히 입을 열었다.

“스물입니다.”

“…….”

“배움은 나이와 무관하게 계속되어야 하죠.”

“……그만.”

뭐 이런 게 다 있느냐는 눈이네. 아무래도 첫인상은 글러 먹은 것 같은데. 더욱 차갑고 매서워진 눈을 바라보며 난 난감하게 눈을 깜빡였다.

“안내할 자신이 있는지는 몰라도 병약해 수시로 앓아눕는다는 백작의 딸이 백작보다 나을 것 같지는 않군.”

“그건 그렇습니다. 전 무능합니다.”

“……빠르게 수긍하지 마라. 무능하다면서 은근슬쩍 말 거는 능력은 발군이군.”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가야만 하는 입장이라 저렇게 아마존 희귀동물 보듯이 쳐다보면 곤란한데.

이제 와서 해치지 않아요, 하고 중얼거려 봐야 소용없는 듯하다.

“그럼 대화 상대라도 해 드릴까요?”

“필요 없다.”

먹금 하려는지, 그는 이 얘기 저 얘기 꺼내 보는 내게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결국 나도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어느 순간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인사법조차 배우지 못한 건가?”

너무 작아 들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살짝 그늘이 진 그의 얼굴에 음영이 도드라졌다. 이목구미가 뚜렷하니 그림자도 깊었다. 빛 중의 최고가 낯빛이라더니.

그러고 보니 황자님은 몇 살일까? 리제에게 황자의 나이도 못 들었군.

‘그나저나 아버지가 꽤 늦으시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난 근처 커다란 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눈앞에 보이는 나무는 이파리가 꼭 야자수 같았는데 야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웅장한 자태가 마음에 들었다.

조금 더 자세히 볼까.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콰당. 허리께에 아스라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으, 아파.

눈을 뜨자, 뒤집힌 시야 속에 팔짱을 낀 황자가 보였다.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넘어지는 게 영애의 취미인가?”

“그런 취미가 있을 리가요.”

“대꾸할 시간에 일어나지?”

“끙, 아파. 그러려고요.”

발밑을 슬쩍 바라보자 못 보던 나무줄기가 있었다.

이게 언제 여기 있었지? 분명 조금 전까지는 길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의외로 황자가 답을 알려 주었다.

“코르스텍 나무뿌리는 살아 움직인다. 설마 몰랐나?”

“와, 나무가 살아 움직여요?”

“허, 이 온실의 주인이면서 그런 것도 모른단 말이더냐.”

“온실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인걸요.”

“그놈의 ‘요’, 예법과는 담쌓은 그 말씨는 버릇인가?”

“하하하, 죄송해요. 아니, 죄송하옵니다.”

“…….”

그의 말처럼 검은색이 도는 뿌리가 스르륵 움직였다.

아, 이제 발이 빠지네. 안심하고 황자 쪽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콰당.

눈앞에서 넘어진 남자를 바라보며 입이 절로 벌어졌다.

‘헐.’

시선 끝에 스르륵 움직이는 나무뿌리가 보였다. 허, 뿌리 저놈, 요망한 놈이네.

넘어진 황자님은 말이 없었다.

“……넘어지는 게 취미일 수도 있죠.”

“…….”

“암, 세상에 취미는 많아요.”

“…시끄럽다.”

어쩌다가 오늘 처음 본 황자랑 나란히 엉덩방아를 찧는 호사를 누리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쪽은 이 상황을 매우 불쾌해하는 게 틀림없었다.

살짝 어두웠지만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목 일부가 붉어진 것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음, 그냥 모른 척해야지.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까칠한 눈빛이 꼭 누가 누굴 지적하느냐는 듯했다.

‘지적이 아니라 걱정인데.’

역시 잔뜩 화가 난 고양이가 따로 없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하고 시선을 돌려주었다.

‘그나저나 온실에 이런 것들이 있다니…….’

여전히 아름다운 정원이었지만 조금 전 나무뿌리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나니, 전과는 사뭇 다르게 보였다.

이런 광경도 내가 어느 소설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단서가 될 것도 같은데 말이지.

“설마 코르스텍 나무를 처음 봤나? 보아하니 처음 본 얼굴이군.”

“어떻게 아셨어요?”

황자님이 얼굴을 움찔했다. 얼굴에 쓰여 있기라도 했나, 어떻게 알았지?

“그 멍청한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더 힘들 거다.”

“……멍청하지는 않은데.”

“은근슬쩍 말 놓지 말도록.”

“혼잣말이에요.”

그렇게 한마디도 지지 않아서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시면…… 미안하지만 섹시하시기만 한데요, 선생님, 아니 황자님. 아, 망할 취향 같으니.

깔끔한 걸 좋아할 것 같은 이 황자는 바로 일어나는 대신 주변을 살폈다.

“백작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나? 백작의 딸이면서 온실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인데.”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온실은 처음이니까. 듣기론 원래의 달린도 온실에 가 보지는 못했었다고 한다. 지금보다도 더 병약했던 모양이었다.

“그동안 아파서…… 온실은 처음이에요.”

“백작의 자식 중 하나가 병약하다고는 들었다.”

“네, 그게 제 얘기일 거예요.”

에스테 백작에게는 자식이 두 명 있는데, 오빠 되는 쪽은 아주 건강하다 못해 팔팔한 현역 기사다. 집안에서 병약한 건 오로지 딸인 달린뿐이었다.

‘오빠란 사람, 되게 웃긴 사람이었지.’

나는 슬쩍 웃다 말고 눈을 살짝 찡그렸다. 아, 눈에 먼지 들어갔어. 눈물 나.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는데 오늘 와 보길 잘했네요.”

어서 이 세계의 이것저것 익혀 두는 편이 좋겠다. 뭐가 됐든 활동을 게을리하면 건강 수치가 뚝뚝 떨어질 테니까.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못 올지도 모르니 말이에요.”

그리 말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는데, 황자가 움찔했다. 여전히 냉정한 시선이었지만 조금 전과 다른 느낌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소문? 무슨 소문? 너무 작은 소리라 뒤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의문을 풀어 주는 대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재킷을 벗어 툭툭 털은 그가 옷을 그대로 팔에 걸었다.

“그런데 황자님께서는 무슨 일로 여길 방문하신 거예요?”

지금까지 까칠하게 굴던 걸 봐서는 대답을 들을 확률이 낮을 것 같지만 한 번 던져봤다. 그러나 웬걸, 남자는 나를 한번 보더니.

“꽃을 보러 왔다.”

순순히 대답하는 게 아닌가?

“꽃이요? 혹시 누구에게 드리려고……?”

“그래, 여, 여동생에게 줄 거다. 문제 있나?”

“아뇨, 없습니다.”

여동생한테 꽃을 선물하는 게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면서 말까지 더듬을 일인가.

……뭔가 촉이 왔다. 원작과 관련된 설정이라는 촉이!

그나저나 이 제국에는 황자가 몇 명이나 있는 거지? 여동생 이야기를 한 걸 보면 분명 황녀도 있을 테고. 리제에게 미리 물어볼 걸 그랬어.

황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문득 그의 어깨 위 새하얀 셔츠 옆으로 꿈틀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벌레인가?

‘응? 벌레가 아니고 식물이잖아?’

자세히 보니 넝쿨 줄기였는데, 끝이 지팡이처럼 꼬부랑 휘었고 심지처럼 하얬다.

여긴 식물의 뿌리도 줄기도 움직이는 곳인가 보다. 정말 평범하지 않은 온실인데?

“정말 이상한 온실이에요.”

“천 년 전 대마법사가 걸어둔 마법 때문에 평범하지 않은 것들만 자라는 곳이니 당연하다.”

아, 쟤들은 이곳에서도 평범한 것은 아니구나.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백작은 어째서 여태 오지 않는 거지? 굼뜨군. 등을 교체해야 할 것인데.”

“등이 중요한가요?”

“모르나? 이 온실에 설치되는 마법등은 황실에서 지원한다. 저런 특이한 식물들의 각성을 억누르기 때문이지.”

아하, 그냥 조명이 아니었단 말이야?

어쨌거나 황자님 어깨에서 꿈틀거리는 식물이 계속 신경 쓰이는데, 떼어 주는 게 맞겠지?

“전하, 전하 어깨에도 이상한 식물이 있어요.”

식물을 쥔 채 황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의 눈이 커다래지는 것이 보였다.

“너, 그거!”

“예?”

“쥐어! 꽉 쥐라고! 아니, 익.”

“아니 무슨, 악! 자, 잠시만요!”

몸이 휙 떠오르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뜨니 바로 아래에 새하얀 얼굴이 있었다.

어째서 황자가 내 밑에 있는 거지? 이건 흡사 내가 그를 덮친 것 같은 상황이잖아.

“정신 차려!”

알아차리기도 전에 오른손이 휙 들렸다. 내 손을 붙잡은 황자가 억지로 주먹을 쥐게 하더니 그대로 움켜쥐게 했다.

팍!

손바닥 안에서 무언가 터졌다.

“으윽!”

“힘 빼지 마.”

약한 고통에 신음을 흘리는데, 손목으로 주르륵 무언가 흘렀다. 손에서 짓이겨진 식물의 즙이었다.

“이걸 봤으면 어서 터트리지 않고 뭘 꾸물거려!”

지나치게 빨라진 그의 말에 난 한동안 눈만 깜빡였다.

“이게 뭔데요? 아니 무엇이옵니까?”

“아발리데초. 발화초다!”

“발화초?”

“자연 상태에서 동물이나 인간의 살갗을 파고든 순간 그대로 발화하지. 타고 남은 재 속에서 씨앗이 자란다. 그러므로 발화하기 전에 재빠르게 터트려야 한다. 이런 기본 상식도 모르나?”

……아니, 무슨 그런 살벌한 풀이 다 있어?

왜 우리 집 온실에서 이런 걸 키우는가 진지하게 고찰하는 동안 황자가 이어서 설명했다.

이 풀을 발견하는 즉시 짓이겨 풀에 달린 작은 열매를 손바닥으로 터트리는 것이 먼저라고.

“이런 위험한 걸 키워도 되는 거예요?”

“그렇기에 안전을 위해서 황가에서 마법등을 대여해 준 거다.”

어째 조명을 가지러 간 뒤로 깜깜무소식인 아버지의 이후 처지가 염려됐다.

아무래도 이쪽은 등이 늦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분노한 것 같은데 말이지.

“대체 당장 오지 않고 무얼 하는 거지?”

난 눈을 껌뻑이며 짓이겨진 풀을 응시했다. 이런 걸 책에서 본 적이 있던가 고민해 봤지만 여전히 아리송하다.

나 정말 새대가리인가. 그보다 진짜 내가 읽은 책이 맞아?

[네, 맞습니다. 전부 빙의자 님이 읽은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난 새대가리였구나.’

그사이 내 손을 놓아 준 황자가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네?”

황자가 머뭇거렸다.

“후, 어쨌거나, 도움을 받았군.”

“감사하긴요, 뭘요.”

그가 설핏 미간을 찌푸리고 이어서 에메랄드빛이 섞인 푸른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그의 눈 밑이 살짝 붉어졌다.

“아직 인사는 하지도 않았다만.”

“입 아프실까 봐 미리 말씀드린 거지요.”

“……백작이 딸자식을 대체 얼마나 자유분방하게 키운 거지?”

그렇게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지는 마시고요. 그래도 기껏 생긴 대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얼른 맞받아쳤다.

“제 아버지는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멋진 아버지이십니다.”

“멋대로 키운다는 거군.”

황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대 같은 영애는 처음 본다.”

그가 상체를 세웠다. 문제는 설명부터 하다 보니 아직 내가 덮친 상태 그대로였단 거다. 바로 앞의 미남에게서 청량한 향기가 났다.

그러나 그는 무감한 표정으로 제 가슴 위에 있던 내 손을 들어 올렸다. 거기다 한쪽 손에 흙이 묻은 걸 봤는지 손수건을 내밀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대가 나를 위험에서 구한 것만은 사실이지. 혹시 내게 청이 있나? 들어주겠다.”

의외인 부분에서 시원시원한 황자님이네.

그러나 사실 난 이 풀에 대해 무지했던지라 황자를 구했다는 자각은 딱히 없어서,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사소한 청 하나만 빌어도 되나요?”

“내 부상 위기가 사소했다는 거냐?”

“삐뚤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전 이 풀이 뭔지도 몰랐던 사람인걸요.”

“……삐뚤. 하, 이 경박한 말투는 정녕 버릇인 건지. 됐고, 원하는 게 뭐지?”

“그럼 괜찮으시다면…… 제 질문에 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인지 뭔지 몰라도 기회를 잡았으니 놓칠 수는 없다.

“네! 혹시 황자님의 주변에 아주아주 예쁜 절세 미녀가 있습니까? 제국 최고의 미녀라거나!”

신난 내 얼굴을 바라보던 황자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겠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게 꼭 필요한 질문이니 할 수 없다.

님 근처에 여주인공이 있나요? 할 수는 없잖아.

그가 험한 말을 간신히 참는 것처럼 무어라 하려다 말고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있긴 있다.”

엥? 있어? 좋아. 일단 황자에게 애인이 있을 수도 있음.

“어떤 사람인가요?”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오, 그리고요?”

“제일 귀, 귀엽다.”

“……오, 그리고요?”

“사, 사랑스럽다!”

나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애인분이 완벽한 이상형이신가 봐요?”

“이상형이라니?”

우린 서로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곧 황자님 쪽이 끙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이상한 오해를 한 거지? 내가 말한 건…… 내, 내 여동생 얘기다.”

“아? 아. 아아.”

여동생 얘기라고? 나는 이해하는 한편 촉이 한 번 더 왔다.

여동생이면 그 뭐냐, 황녀님이겠지?

“여동생……. 그, 황녀님이 그렇게 좋으세요?”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황자님이 차갑게 정색했다.

이야,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여동생 얘기만 하면 말을 더듬고 빨라지는 ‘오빠’, 거기다 성격 더러움. 하지만 내 여동생에겐 따뜻하겠지.

……로판 중에 이런 장르가 있었지.

육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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