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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8화 (8/281)

◈8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2)

“그럼,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뭐?”

“이상형이요.”

아직 딱 떠오르는 건 없지만, 만약 이 남자가 정녕 이 세계의 주연 중 하나면 그의 이성 취향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뭐가 됐든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소원이 겨우 이런 건가?”

“넵. 제겐 간절한데요.”

“허……. 무슨 질문이 다 그따위인가?”

“네?”

황자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분홍색 머리카락은 내 이상형이 아니다.”

“오, 그렇군요!”

“녹색 눈동자도 아니다.”

“오오, 그렇군……요?”

잠깐만, 그거 나잖아?

“엥, 그건 저잖아요.”

“제대로 봤군. 그 정도까지 멍청하진 않은 모양이지.”

“예…….”

“눈도 멀쩡한 모양이군. 안 비키나?”

그러고 보니 아직도 한 손은 그에게 붙잡힌 채 그의 배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어어, 잠시만요. 흔들지 마세요!”

지금 우리 자세로 말할 것 같으면 상당히 아슬아슬했다.

그가 움직인 탓에 내 중심이 흐트러지며 그대로 얼굴이 홱 쏠렸다.

“너!”

난 황급히 일어났다.

하필 몸이 흔들리며 내 입술이 그의 뺨에 스쳤다!

“아, 아, 아무것도 못 느꼈습니다, 저는!”

“진실로 그리해야 할 것이다.”

억울하다, 이건 불가항력이었지 내 잘못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얼른 머리를 들었다. 셔츠를 탈탈 터는 황자님이 보였다.

어쩐지 너무 침착한 모습이 신기해 빤히 응시하는데, 문득 그의 새하얀 피부 위, 눈매 쪽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의 발그레해진 살갗이 고스란히 보였다. 어라.

이뿐 아니라 셔츠 사이로 보이는 목부터 귀까지 모두 빨개져 있었는데, 새하얀 피부와 대조를 이루며 붉은 기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머뭇머뭇 입술을 열었다.

“저…… 전하. 혹시 여자 손 처음 잡아 보세요?”

“그럴 리가 있겠나!”

“아, 그럼 여성 밑에 깔리신 것이 처음이신 거죠?”

“표, 표현이 부적절하다!”

“여성인 타인과의 충돌에 의해 바닥에 등을 대고 타인을 받아들여 본 적이 있으신지요?”

“…….”

……아니 뭐 이런 등신이, 하는 시선으로 볼 건 없잖아요, 황자님.

“그럼 입술이 뺨에…….”

“거기까지.”

“넵.”

들어 올린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린 황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지 않아도 차갑던 시선은 조금 전보다 더욱 사나웠다.

흐트러진 차림새와 발긋한 눈은 오히려 묘한 자극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황자님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황자님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릉댔다.

“어디까지나 가벼운 접촉 사고일 뿐이니 섣부른 오해는 금물이다. 알겠나?”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모르나 보다. 하지만 나는 철저한 을이므로 얼른 고개부터 끄덕였다.

“네, 근데 무슨 오해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오해할 것이 있나?

“혹시 입술이 스친 걸 말씀하신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만 알고 있을게요!”

“……모, 못하는 말이 없구나! 아니, 이게 아니라.”

입술도 아니고 겨우 뺨인데, 의외로 숙맥인가? 그의 목이 다시 달아올랐는데, 화가 나서인지 다른 이유인지 모르겠다.

얼굴을 쓸어내린 황자님이 소리쳤다.

“나를 향한 영애의 마음을 접으라는 소리다!”

…예?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황자님을요? 언제부터요? 우리 오늘 처음 보지 않았나요……?

“조금 전부터 그 시선, 행동! 접촉까지! 노골적이지 않은가.”

확실히 쳐다보는 시선에 불순함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짝사랑 판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

“헉, 그것이야말로 오해이십니다…….”

“변명은 필요 없다.”

“변명이 아니라 사실…….”

“사실?”

한마디만 더 해 보라는 아주 살벌한 시선에 나는 깨갱 하고, 입을 닫았다. 빠르게 눈을 도로록 굴리며 태세를 전환했다.

“없던 마음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윗선이 까라면 까야지.

잠시 확고하던 믿음에 금이 갔다. 이 황자 정말 내 취향이라 생각했는데.

분명 까칠하고 냉정한 남자가 취향이지만, 자의식과잉 남주는 내 컬렉션에 둔 적 없다!

황자는 내가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만족하는 것 같았다. 난 눈치를 보며 얼른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만에 하나라도 제가 황자 전하를 애타게 좋아할 일이 없겠지만! 혹시나! 생겨도 꼭꼭 접겠습니다.”

세상에는 찔러도 못 먹는 감이 있다. 만약 그가 이 세계에 주요 인물이라면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안심하지 못할까 단호하게 말했다. 해맑게 웃으면서.

“절대로요.”

그때였다. 이 황자님을 다시 보는 순간 갑자기 기억의 조각이 뇌리를 팟 하고 스쳐 지나갔다.

무려 일러스트 표지의 기억이었다.

아, 그래! 내가 저 잘생긴 얼굴을 어디서 봤는지 알았다.

‘그 제목이었어!’

[띠로롱!]

커다란 알림음이 들렸다. 요정의 시스템 창이었다.

[축하합니다, 빙의자 님!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퀘스트(서브) - ‘첫 번째 책을 찾아라!’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제국의 아들부잣집 막내딸》.

그 순간 머릿속으로 기억이 밀려들었다. 아주 대략적인 내용이었다.

[세계에 대한 정보가 일부 해금됩니다!]

[첫 번째 소설 《제국의 아들부잣집 막내딸》

#육아물 #내가 바로 막내딸 #아빠 하나 오빠 셋! #폭군아빠 #모두가 날 사랑해 #이런 애정은 그만~!

빙의자 님의 평점: ★★★★☆]

[독자 한줄평: 선발대입니다~ 무난한 육아물입니다. 크게 고구마는 없구요 ㅎㅎ 아기 황녀가 귀엽고 오빠들이 처음엔 짜증 나는데 뒤에선 걔네도 코인으로 키운 내 새끼입니다..]

[독자 한줄평: 여러분 제발ㅠㅠㅠ최신화까지 읽어주세요!! 지금은 짜증 나도 둘째 오빠가 특히 후회댕댕이입니다!]

《제국의 아들부잣집 막내딸》. 고인물 독자라면 누구나 눈치챌 제목이다. 내용은 간단했다.

아들만 셋이던 제국의 황제에게 어느 날 버려진 성 구석에 콕 박혀 있던 딸 하나가 발견된다.

놀랍게도 그 딸은 신이 내려 준 ‘성스러운 힘’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곧바로 이 제국의 보물이 된다.

하지만 황제는 자식에게 무척 무심한 남자였다.

오랫동안 폐허에 숨어 살며, 먼 친척이라는 유모와 성의 시종들에게 구박당한 아기 주인공은 혼자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애를 쓰는데…….

딸은 처음이라 서툴기 짝이 없는 아빠에, 여동생의 존재를 단순히 불쾌하거나 신기하게만 여기다 점차 이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오빠들까지!

딸바보, 동생 바보 오빠들이 모인 힐링 육아물.

‘……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그래, 아주 커다란 문제였다.

세세한 내용까지는 기억이 안 난다는 거!

잠깐만, 이런 건 기억나게 해 줄 수 없어? 기억 보정 같은 거 안 해 주는 거냐고!

[요정은 기억력을 돌려주진 않습니다.]

요정의 창이라도 내가 이미 잊어버린 정보를 되돌려 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망할!

화살은 애꿎은 요정의 창에게 돌아갔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지 말라고, 서러워지니까!’

[앗, 요정의 창은 빙의자 님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기로 했어요! ∑(;°Д°)]

[육아물에 걸맞은 사랑스러운 요정이 될게요! ٩(•̤̀ᵕ•̤́๑)૭✧]

……또라인가?

아니, 지금 이쪽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주요 인물들은 모두 기억났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여동생이 낯설어 처음에는 까칠하게 굴다가, 뒤로 갈수록 잘해 주는 둘째 오빠 포지션. 이름은.

‘라이칸 포르 비센’.

육아물 소재의 경우 사실 남자주인공의 비중보다 아빠와 오빠들의 비중이 더 큰 편인지라 이쪽도 ‘주연’ 중 하나로 쳐주는 모양이었다.

[‘주요 인물’의 인물 열람이 열렸어요, 열람을 원할 시 ‘인물 열람’을 외쳐 주세요! (。´∀`)ノ♡]

‘인물 열람!’

[라이칸 포르 비센

칭호: 이적을 눈치챈 자(lv.3)

역할: 육아물 《제국의 아들부잣집 막내딸》 주인공의 둘째 오빠

호감도: -7

현재 상태: ‘클리셰’에서 벗어난 상태,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여러 가지가 보였지만 개중 눈에 띄는 요소가 보였다.

‘호감도와 상태?’

[‘호감도’는 해당 인물의 빙의자 님을 향한 호감을 나타내요! 해당 인물의 호감도가 높을수록 ‘클리셰’에 협조할 가능성이 커지겠지요?]

[요정이 빙의자 님을 응원합니다! ✧*。٩(ˊᗜˋ*)و✧*。]

허어, 이젠 나한테 시뮬레이션 게임까지 시키네. 이 엿 같은 세상 같으니!

그건 그렇다 치고 상태는 왜 저래?

‘클리셰’에서 벗어났다고?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주인공에게도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인데.’

내가 주인공을 찾아가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서브 퀘스트가 도착했어요! ◝(⁰▿⁰)◜✧]

[퀘스트(서브) - ‘아기 황녀님을 만나러 가자!’

첫 번째 소설의 주인공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까요? 찾아가 봅시다!

정해진 기간 내로 주인공을 만나지 못할 시, 건강 수치 –20

기한: D-15]

……퀘스트 난이도가 뭐 이딴 식이지? 건강 수치 –20이면 난 곧장 죽는 거 아니냐고.

나는 슬쩍 황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이 황실에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조금 전의 모습만 봐서는 누가 봐도 여동생에게 푹 빠진 여동생 바보 그 자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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