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9화 (9/281)

◈9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3)

* * *

온실에서 나온 나와 황자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헐레벌떡 뛰어오던 아버지와 마주했다.

급히 달려온 기색이 역력했으나 안타깝게도 황자의 분노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아이고, 아버지 미안해요.’

나는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가 황자에게 탈탈 털리는 모습을 모른 척했다.

아버지의 죄명은 관리 소홀. 온실 안의 특수 식물들을 조금만 더 방치했다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졌을 수도 있었을 거라며 아주 영혼까지 탈곡하더라.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처벌받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도 꾸짖음 정도로 끝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버지가 살짝 웃어 주었다. 영혼이 가출한 얼굴이라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아버지가 늦었던 이유는 황실 측 수급이 늦어진 탓에 비축하고 있던 마법등이 떨어진 탓이었단다. 아버지의 잘못이 아닌지라 더 짠했다.

“오늘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자님.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그러지. 이후로는 온실 관리에 만전을 기하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를 흘끔 바라보는 황자의 눈은 삐뚜름하기 그지없었으나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하기야 그렇게 털고도 또 털면 사람이 아니라 먼지떨이지.

홀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황자와 눈이 마주쳤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려고 했으나 어느 틈엔가 성큼 다가온 그가 코앞에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황자의 명에 나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야 했다. 나는 흡, 숨을 참았다.

“얼굴이 빨간데.”

“숨을, 흡, 참아서 그렇습니다!”

“……숨을 왜 참지?”

네 얼굴이 취향이라 내 얼굴이 빨개진 걸 들키면 안 되니까, 라고 할 순 없지. 잽싸게 입을 열었다.

“건강에 좋습니다?”

“……왜 의문문인지 궁금하군.”

“그건!”

“궁금해서 물어본 거 아니다.”

“옛.”

아까에 이어 ‘뭐 이런 등신이 다 있지’라는 눈으로 쳐다보시면 상처받는데 말이다.

그러나 기왕 부정적인 눈길을 받을 거면 못생긴 사람보단 잘생긴 사람에게 받는 쪽이 낫다! 이런 까닭에 그렇게까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왜 내 쪽으로 온 걸까? 그만 돌아가 주지 않고.

황자가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영애, 다음엔 제대로 된 인사를 해야 할 거다.”

인사? 눈을 깜빡이던 나는 그와 부딪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아, 그때 제대로 된 인사를 받지 못해서 뿔이 나신 거구나. 다음엔 공손함을 보일 것을 다짐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심해서 돌아…….”

그러나 황자가 이어진 내 말을 듣지 않고 휙 가 버리는 통에 나는 그의 뒷모습만 응시해야 했다.

과연 저 남자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의 주연이니 곧 다시 보게 되겠지.

* * *

황자님께서 돌아가시고 며칠간 저택은 평화로웠다.

듣자 하니 황족이 찾아오는 일은 아주 드문 이벤트란다. 이를 듣고 타이밍을 잘 맞춘 나를 스스로 칭찬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건강 수치가 무지하게 올랐다는 점.

[이름: 달린 에스테

특성 등급: 빙의자(레전드리), 인도자(노멀), 백작 영애(노멀)

현재 상태: 시한부

건강 수치: 20/100

건강 상태: 비약적으로 오른 건강! 당신은 이제 짧은 시간이지만 무도회에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심은 절대 금물!]

이후로는 소소하게 감기에 걸렸다거나 드러눕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족들이 기뻐한 건 물론이었다. 가장 신난 건 나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아가씨, 약을 드셔야지요. 왜 드시지 않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베키가 약병을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약병을 흘끗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누가 약을 십몇 알씩이나 먹는단 말이니? 겨우 감기 정도인데 무식하게.”

“하지만 의원님이 그렇게 처방한걸요.”

“그러니까 그 처방이 잘못되었다니까?”

애초에 내 병이란 말이지, 그런 약으로 낫지 않는단다. 건강 수치 자체가 개똥망이어서 그런 거거든!

‘올라도 20이야, 올라도!’

거기다 이 수치도 게으름 피우는 그 즉시 내려갈 예정이지.

어떻게 아냐고? 좀 퍼져 봤거든. 바로 숫자가 내려가더라! 이 망할 시스템 같으니.

[요정은 빙의자 님께 부지런하고 성실한 일상을 추천해요. ( •́ ̯•̀ )(·•︠_•︡ )]

시끄러워.

시한부라고 했으니 주변의 이런 태도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인 내가 멀쩡하다고 느끼는데도, 일곱 가지가 넘는 약을 최소 아홉 알씩 먹어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약 먹다 죽겠어.’

나는 약을 빤히 쳐다보다 묘한 감정을 느꼈다. 개중 새빨간 색의 알약이 보여서 꺼림칙했던 것이다.

“먹긴 하겠는데…… 이 빨간 건 빼고 먹으면 안 돼?”

“어, 안 돼요! 그건 의원님이 꼭꼭! 드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어요.”

더욱더 꺼림칙한데.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베키를 보다 한숨을 푹 쉬었다.

“미리 확인하는 건데, 이거 전부 감기약 맞지?”

“네!”

“안 먹으면 안 되고.”

결국 시선에 못 이겨 컵을 손에 쥐었다.

“알았어, 먹을게. 먹으면 되잖니.”

이 세계에 약을 달게 만드는 방법은 없는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맛이 아주 시큼했다.

“베키.”

컵을 내려놓기 무섭게 나는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입을 열었다.

“사실 앞으로 약은 정말 안 먹어도 괜찮아.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앞으로도 계속 이 약들을 먹을 걸 생각하니 걱정이 좀 된다. 난 시한부일 뿐이지 아프지도 않고 멀쩡하다고.

‘정신은 말이지.’

사실 하녀들의 대화를 통해 시한부라는 것을 들었지만 통 자각이 없었는데, 당장 아픈 곳이 달리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노력하면 건강 수치를 올릴 수도 있기도 하고.’

“그런데 내 주치의원님은 뭐 하는 분이야?”

“아가씨를 위해서 백작님께서 다른 왕국에서 어렵게 모신 분이세요.”

백작이 바다 건너까지 수소문하며 직접 나섰다고. 그런 이야기까지 들으니 아예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아가씨가 죽, 아니 돌아가시지 않게끔 도와주신 분이세요!”

이상했다. 그런 것 치고는 눈을 떴을 때, 내 건강 수치는 1이었는데?

“아가씨께서 몇 년은 반드시 건강하실 거라고 하셨어요!”

요정은 내가 얼마 안 가서 죽을 거라고도 했다.

‘그런데 살아남을 거라고 장담했다고?’

뭔가 찝찝했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혐의는 없으니.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당장 육아물 주인공님을 찾아가도 모자랄 시간이라고. 걔들의 문제가 뭔지 찾아야 해!

[요정의 창은 빙의자 님의 적극적인 태도에 감동했어요! 훌륭한 빙의자의 자세! \(^∀^)メ(^∀^)ノ]

애써 베키를 달래서 남은 약병과 함께 돌려보낸 뒤 홀로 남은 난 후, 한숨을 뱉었다.

겨우 감기 하나에 온 집안이 들썩들썩하니……. 큰 병이라도 걸리면 아주 그냥 거꾸로 뒤집히겠다.

“끄응, 역시 죽을 만큼 아픈 건진 잘 모르겠단 말이지.”

내가 지나치게 낙천적인 것 같긴 한데, 한 번도 시한부로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 기분을 알 수가 있나. 아, 몰라. 닥치면 그때 생각해 보지 뭐.

그나저나 소설 제목도 알았겠다, 이제 더 구체적인 단서를 찾아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황실에 가 봐야 해.’

그것도 15일 내로 말이지.

하긴 기한이 없더라도 가긴 해야 했다. 주인공들이 대체 어떤 상태길래 클리셰가 엉망이 되었단 건지 확인을 해 봐야 할 거 아냐.

‘근데 그 황성에는 어떻게 들어갈지, 좀 더 궁리해 봐야겠는데.’

퀘스트를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생각했던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생각한 때에 열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데, 달칵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들어온 이는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남자가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파올로?”

“오냐.”

문에 슬쩍 기댄 남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라버니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쓰냐.”

“그래, 오라버니.”

“낯간지럽게 뭔 오라버니야.”

……아니, 어디에 장단을 맞추라고? 나는 남자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이 웃기지도 않는 인간은 달린 에스테의 오빠, 파올로 베닌 에스테였다.

“근데 넌 왜 갈수록 못생겨지냐. 안색 좀 봐. 침대에만 누워 있어서 그래. 얼굴이 퉁퉁 부었잖냐.”

“누군 누워 있고 싶어서 누워 있나. 나도 나가고 싶은걸.”

“연무장 산책도 좀 하고 그래라. 하도 안 걸어서 다리가 아주 똑 부러지겠어.”

“괜히 돌려서 얘기하지 말고, 그냥 본인 보러 오라고 하지?”

파올로가 씨익 유쾌하게 웃었다. 호쾌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바로 온 건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바라보며 난 고개를 저었다. 카펫이 젖어서 하녀들이 울상을 짓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 참, 손님 왔더라, 네 손님.”

“아니, 도련님이 왜 시종의 일을 뺏고 그래?”

파올로는 웃으며 빵, 총을 쏘는 것과 비슷한 동작을 했다.

“네 못생긴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기분은 어때.”

파올로는 몸이 단단하고 체구가 컸지만 얼굴만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나와 판박이였다.

성별만 다를 뿐 똑같이 생긴 얼굴을 보면서 쯧쯧 혀를 차는데, 곰처럼 커다란 오빠 옆으로 조그만 그림자가 쏙 하고 나타났다.

“달린!”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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