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4)
“어라, 리제?”
외출용 모자를 쓴 리제가 활짝 웃었다. 저택에 놀러 왔다던 손님이 리제였구나. 나는 얼른 일어나 리제에게 달려갔다.
“어쩐 일이야?”
“어머, 서운한걸. 무슨 일이 있어야만 널 찾아오겠어?”
“그건 그래! 리제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리제는 오늘도 강아지처럼 귀여운 얼굴로 웃어 주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라. 난 간다.”
“어어.”
난 닫힌 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 도련님은 왜 시종의 일을 대신 하나 모르겠네.”
“파올로 경께서 날 데려다주신 건 음, 아마 널 보려고 그런 거 아닐까?”
리제가 다정하게 웃었다.
“분명 오늘도 네가 괜찮은지 보러 오신 걸 거야.”
리제가 상냥하게 말했다.
달린의 오빠 파올로는 여타 소설 속 오빠들과 다르게 실없는 장난을 좋아하는 현실 오빠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조금 친근하달까.
이때 똑똑 노크 소리가 나고 곧 문이 열렸다.
“아가씨, 다과입니다.”
나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를 사이에 두고 리제에게 신나게 지난 일들을 털어놓았다.
“세상에, 2황자 전하께서 이곳에 오셨단 말이야?”
그렇다니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았던 황자님에 대해 설명하자면 반나절을 투자해도 모자랄 것 같기에 최대한 간략하게 줄이는 데 공을 들여야 했다.
“음, 미남이더라. 초상화보다 더.”
그러다 지나치게 축약됐지만 말이다.
“하기야 그분 미모야 말해 입이 아픈 정도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걸.”
“아, 그래?”
리제가 미모로 유명한 분이 몇 있다며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공작님이랑, 마탑주님이랑, 황태자님이랑…….
똑똑히 기억해 뒀다. 걔들 보게 되면 팔찌부터 들이밀어야지. 다른 소설의 주인공일지도 몰라.
“그나저나 달린, 넌 연회에서 그분을 뵌 적 있을 텐데도 깜짝 놀랐구나?”
“응? 으으응, 그렇지! 그때는 멀리서 보기만 했으니까?”
“아하. 맞아, 쉽게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은 아니지.”
본래라면 엑스트라로 추정되는 나 같은 백작 영애와는 연이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이 다음엔 꼭 인사를 제대로 하라고 했어. 내가 뭔가 실수했나 봐.”
마지막에 경고처럼 덧붙인 그의 말을 떠올린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리제 쪽에 기댔다.
“그분이 까다로운 편이시긴 하지. 진명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 보내 주지 않으실 때도 있으니까.”
“발음?”
“응? 응.”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 맞다. 이 육아물…….’
귀찮은 설정이 있었지.
“그분 앞에서는 항상 조심해야 해. 신의 언어로 된 황족의 이름을 발음하는 건 까다롭지만 대신에 그것만 조심하면 달리 문제 될 건 없으니까 말이야.”
일단 “아 맞아, 그렇지?” 하고 반응해 두었다.
이 소설 《제국의 아들 부잣집 막내딸》의 특이한 설정 하나. 여기 여주와 여주 가족들은 알려진 이름 외에 이름이 하나 더 있다.
황실의 권위를 드높이고자 만들어진 건지, 황족을 대할 때는 반드시 이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올려야 했다.
이 이름은 마법의 힘이 담긴 언어로 이루어져 있어서 오직 당사자에게만 들렸다. 여주는 특히나 성스러운 단어로 된 이름을 가졌다는 설정이다.
그렇다 보니 황족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신어를 익히는 건 필수였다. 왜? 인사를 제대로 안 하면 등신 취급받는 세상이거든. 나처럼.
‘그리고 그런 건 제 기억에 없다는 거죠.’
아니 무슨, 이름 하나 부르는데 언어까지 배워야 해? 이런 건 타고난 재능으로 그냥 하나 주는 게 맞지 않냐, 요정 이 그지깽깽이야! 듣고 있냐고.
다행스럽게도 지금에라도 이 설정을 떠올렸으니 망정이지. 아니, 못 떠올리면 어떡하려고 그랬어?
[요정의 창은 빙의자 님을 위해 최대한의 성의와 친절을 제공하는 착한 요정이에요! ( *︾▽︾)]
거짓말하지 마.
“황족의 이름을 만든 신의 언어가 본디 두 개의 달에서 따온 언어라고 하잖아. ‘창공의 날개에 안식의 숨결을.’ 하고 시작하는 인사말은 어떻고. 초대 황제님이 황후님에게 건넸던 말에서 따온 거라니 정말 낭만적이야.”
나는 얼른 수긍하는 체했다.
“맞아, 맞아. 만나 뵈면 인사말부터 하는 거지……?”
황족을 만나면 창공의 어쩌구를 외우고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거. 지금 막 네게 배웠지.
문득 온실에서 부딪혔을 때 매우 못마땅해하던 2황자님의 얼굴이 스쳤다.
‘그러니까 진명 안 불러 줬다고 으르릉거린 거였구만?’
그 둘째 황자님이 살벌하게 경고까지 해주지 않았던가.
“영애, 다음엔 제대로 된 인사를 해야 할 거다.”
너무나 중요한 규칙이라는데 다른 세계에서 온 입장에선 글쎄올시다.
‘아니지, 이름 덕에 친해질 수도 있는 건데. 노력해야지.’
크흠……. 작가님 설정 참 독창적으로 쓰셨네요.
‘자, 이제 황실로 들어갈 방법을 완성하기만 하면 돼.’
난 리제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전에 하나 물어볼 게 있었다.
“있잖아, 리제. 호옥시 그, 황자님을 만났는데, 창공 어쩌고 하는 인삿말이랑 또, 다른 이름을 붙인 인사도 올리지 않았으면.”
“응.”
“많이 비호감일까?”
“응!”
리제가 해맑게 끄덕였다.
“그분 입장에선 뭐 이런 게 귀족인가 싶지 않을까?”
……아, 방금 3번 갈비뼈, 13번, 11번, 8번 갈비뼈까지 전부 나간 것 같아요.
“많이 이상해?”
“어? 어어…… 상식이니까……,”
“……많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고, 막 ……그래?”
“……어, 달린 설마.”
나는 말을 잇지 못하는 리제의 어깨를 두드렸다. 리제는 좋은 친구다. 그런 친구가 나를 아주 안쓰럽게 쳐다봤다. 너 개망했구나? 하는 얼굴로.
그래, 망했어! 왜 이 저택에 특별한 온실 따위가 있어서! 책에는 나오지도 않는데!
나는 침착하게 리제의 손을 잡았다.
“음, 그럼 말이야. 앞으로 다시 뵈었을 때 제대로 인사하면 안 잡혀가겠지?”
“응, 2황자님은 예의에만 좀 예민하시니까. 말투만 조심한다면야.”
“…….”
“달린?”
“있잖아, 황족 모독죄 이런 걸로 지하 감옥에 갇히기도 하니?”
“으응?”
리제가 눈을 깜빡였다.
“그럴 것까지야……. 그분 앞에선 하나만 조심하면 거기까지 갈 일은 없어.”
“뭔데?”
“여동생, 그러니까 최근 나타나신 황녀님 이야기만 꺼내지 않으면 돼.”
“…….”
“아주 예민하다고 하시더라고.”
스쳐 가는 과거의 기억을 똥차 구 남친 강냉이 털 듯 털어 버리고 싶은데. ……어렵겠지?
“이것만 아니라면 그분은 다른 황자님에 비해선 어렵지…… 달린?”
“리제! 황족 모독죄로 붙잡혀가면 많이 힘들까?”
리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성실하게 답변해 주었다.
“으음, 황실 모독죄 최장기 복역 기간은 17년이긴 한데…….”
“아하!”
……일단 2황자와는 최대한 마주치지 말고 바로 주인공을 만나 보는 쪽으로 가자! 나는 산뜻하게 방향을 정했다.
‘잘생기면 뭐하나, 못 먹는 감! 먹지도 못하는 감!’
가뜩이나 성질 더러워 보이는 외모에, 진짜로 까칠하기 짝이 없던 그 남자는 굳이 다시 보지 말자고.
2황자님과 대화를 다시 나누는 것은 뒤로 미루고 다른 주연들을 차례로 떠올리던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인 아기 황녀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건강 수치 설명할 때 무도회에 대한 설명이 있었잖아!’
이와 동시에 리제가 입을 열었다.
“달린, 너도 초대장 받았지?”
“응?”
리제가 활짝 웃었다.
“곧 있을 황실 무도회 말이야.”
마침 거짓말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말이 흘러나왔다.
“후, 물론 알고 있지.”
“하지만 넌 몸 때문에 참석하기 어렵겠지?”
“아니, 나도 무도회에 가기로 결심했어.”
“헉, 건강은 어떡하고? 백작님께서 분명 반대하실 거야.”
“아냐, 난 멀쩡해. 최근 건강해진 거 봤잖아, 리제.”
클리셰가 보우하사, 요정이 내 건강 지킴이가 되어주실 거다. 안 움직이면 오히려 죽는다고 이 그지 같은 요정이 그랬거든.
[저런, 요정의 창은 빙의자 님의 바르고 고운 말 사용을 권장합니다! (,,Ծ‸Ծ,, )]
시끄러워.
“난 눈 떠 있을 때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고 싶어. 거기에 아버지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아.”
아버지는 심약해서 조르면 뭐든 들어줄 것 같은 이미지였다.
“그랬구나, 달린……. 난 네 편이야.”
눈을 글썽인 리제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동안 많이 갑갑했지? 난 네 속도 모르고…….”
“어? 어어? 으응?”
“뭐든 도울게!”
“응? 아! 고마워!”
눈을 깜빡이다 말고 잽싸게 끄덕였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뜬금없이 감동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와준다니 나야 아주 땡큐였다.
그동안 난 누워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기초지식이나 예법을 익히는 데 집중했다. 처음보다 흡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가정교사의 얼굴에서 짐작해보건대 얼추 귀족 영애 흉내는 낼 수 있을 정도는 된 듯했다.
‘즉, 무도회 참석도 무리가 아니란 말씀.’
무도회에 꼭 나가서 황실에 관한 정보를 모아야겠다!
‘주인공을 볼 수 있으면 더 좋고.’
어렴풋한 기억뿐이지만 내 생각이 맞으면, 이 연회는 폭군 아빠가 신하들 손에 떠밀려 억지로 개최한 주인공 탄신연일 거다.
여기서 무뢰배들이 딸을 괴롭히는 장면을 폭군 아빠가 목격하고, 처음으로 도와주게 되었다고. 엄청 중요한 연회란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