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1화 (11/281)

◈11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5)

“무도회가 정확히 언제 열리지?”

“그야 황녀님 탄신일이지?”

역시나 내가 생각한 그 행사가 맞았다.

“나랑 같이 가자, 달린! 조금 촉박하긴 하지만 내가 준비해 둔 걸로 충분할 거야.”

“정말? 언제인데?”

손뼉을 친 리제가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사흘 뒤!”

응? 그렇게 빨리? 내가 빨리 가겠다고는 했지만 예상보다 너무 빠른데. 내가 머뭇거리며 망설일 때였다.

“오랜만에 열리는 큰 무도회라 공작님부터 마탑주님까지 정말 여러 분이 오실 거야.”

리제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황녀님도 오시겠네?”

“응? 응, 물론이지. 주인공이신걸.”

준비 시간이 빠듯한 것만 빼면 나쁘지 않은 일인듯했다.

‘괜찮지 않을까? 아니, 아주 괜찮아.’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니 말이지.

이때 “달린.” 하고 부르는 리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고서 멈칫했다.

“네가 좋아하는 2황자님도 오실 거야!”

언제부터 2황자가 내가 좋아하는 황자님이 된 거지? 아니, 그보다 걔랑은…… 웬만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다시 보면 황족 모독죄…… 징역…….’

뒤끝이 끝내줄 것 같은 그 황자와 다시 마주치는 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안 갈 수도 없잖아.’

안전하게 집에만 머무르고픈 마음이 슬쩍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집에 머물러봐야 건강 수치만 떨어지지. 거기다 열흘만 더 지나면 퀘스트 실패로 사망할 운명이었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아직 나머지 소설이 뭔지도 모르니 빨리빨리 해결하자고.

만약 두 번째, 세 번째 소설이 피폐물이라면 미리 알지 못할 때 큰일이니 말이다.

보물과 지뢰가 한곳에 있다면 보물을 찾으러 가는 게 맞다.

‘지뢰는 피하면 되니까.’

그래, 어서 해결하고 안심해야지. 육아물 주인공아 기다려라.

* * *

사흘은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떻게 보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다.

결전의 날 저녁 노을이 드리운 무렵. 나는 드넓은 홀에 있었다.

‘하, 사흘 동안 진짜 정신없었다…….’

드레스 고르는 게 중노동인 줄 처음 알았다. 이게 다 그지 깽깽이 같은 건강 수치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며칠을 되짚어 보다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문이 열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벌어진 문 사이 화려한 샹들리에가 반짝였다.

“이야, 살다 보니 병아리 에스코트할 일도 다 있고.”

“앞을 봐, 앞을.”

“오냐.”

싱글거리며 웃어 보인 파올로가 나를 문안으로 에스코트했다.

보통 약혼자가 없는 영애가 무도회에 가는 길에는 집안의 남성이나 친분 있는 가문의 남성이 에스코트를 맡는단다.

나는 잠깐 사흘 전을 떠올렸다.

“아이고 안 됩니다! 아가씨께서 무도회라니요!”

무도회에 나간다고 하자마자 베키를 필두로 펄쩍펄쩍 뛰는 하녀들과 조심스럽게 휴식을 권유하는 집사, 소심하게 말려 보는 아버지까지, 집안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제가 옆에서 살뜰히 돌볼게요. 걱정하시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백작님.”

이를 해결해 준 건 리제였다. 그녀가 말하자마자 그때까지 소리높여 반대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조용해진 광경은 신기하기까지 했지.

평소 리제의 방문을 아주 좋아하던 아버지는 그녀의 가문인 트리샤 후작가까지 언급되자, 결국 참석을 허락했다. 리제가 얼마나 또박또박 상냥하게 말하던지 하마터면 반할 뻔했다.

“달린, 드레스 밟지 마라?”

“너나 망토 밟지 마라, 한량 기사야.”

파올로와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복도 끝 커다란 문 앞이었다.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만들어진 문 너머로 안쪽 연회장이 살짝 보였다. 우리를 발견한 시중이 문을 열었다.

나는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무도회의 현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중앙에서 우아하게 춤을 추는 남녀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벽 쪽에서는 막 웃음을 터트린 귀부인들이 부채를 살랑거리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게 리얼 로판…….’

로판의 꽃은 무도회라더니.

엄청난 규모에 압도될 것 같았다. 말도 못하고 눈을 깜빡이는데, 툭툭 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장난기 어린 얼굴의 파올로였다.

“뭘 처음 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나? 못난 얼굴에 눈만 커져서는.”

“본인 얼굴에 침 뱉으면 어떤 기분이야?”

“누구 말이죠? 나? 누가 봐도 완벽한 얼굴인데.”

벌써 몇 번째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댁 얼굴과 내 얼굴은 판에 찍힌 듯이 똑같거든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허심탄회하게 툭 내뱉었다.

“그냥 신기해. 못 올 곳이라 생각했거든.”

온갖 사건과 치정이 일어나는 로판의 꽃 무도회에 참여하다니, 대박 사건입니다. 고인물 독자의 피가 끓고 있어요!

커다란 샹들리에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돌렸다. 어쩐 일로 말이 없다 싶더니 파올로의 얼굴이 살짝 굳어 있었다. 왜 이러지?

내가 팔꿈치로 그의 팔을 툭 건드리고서야 파올로는 표정을 풀고 다시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재채기라도 나올 뻔했나.

“잘 들어, 난 일단 기사단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와야 해. 넌 누가 말을 걸면 부채로 입을 가려.”

“이봐요, 오라버니, 그 정도 매너는 알아.”

누군가 말을 걸 때, 부채로 입을 가리는 건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었다. 나는 파올로 팔에 얹었던 손을 떼고, 부채를 흔들어 보였다.

“애도 아니고 걱정은. 곧 리제가 이곳으로 오기로 했어.”

그러자 파올로는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했다. “다행이네. 그럼 못난아, 나중에 보자.” 하고 등을 돌렸다.

‘참 얼굴로 놀려먹는 거 좋아한다니까.’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즐겁게 무도회를 구경했다.

‘여기 어딘가에 남주도 있고, 우리 꼬마 여주님도 있단 소리지?’

빙의물 주인공들은 구경하느라 정신없던데 나는 구경은 뒷전으로 미루고 추리부터 하게 생겼다. 아니, 숨바꼭질이라 해야 할까? 우리 육아물 꼬마 주인공님은 어디 있을까요?

나는 데굴데굴 눈을 굴리다 말고 작게 입을 벌렸다.

……정말, 몇 세대 전 미친 황제님 만세다.

놀랍게도 눈에 보이는 대부분이 예쁘고 아름다운 미녀 미남들이었으니까!

저기는 조신해 보이는 미남, 저기에는 귀여워 보이는 미남, 또 저기에는 차가워 보이는 미남…….

꼬마 여주님 찾기는 잠깐 미루고 천천히 둘러보며 구경이나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침이 흐른 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턱을 닦았다.

‘이렇게 호화로운 세계관이 있었다니!’

이런 훌륭한 소설은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읽혀야 하는데…… 더 흥해야 했어!

“그나저나 리제가 늦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약속했던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평소 시간 약속은 칼같이 지키던 리제가 늦다니.

‘하기야 리제도 사람인데 늦을 수도 있는 거지.’

옳다구나 하고 미남들을 관찰하던 나는 입술을 긁적였다. 와, 저기는 몸 좋은 미남 옆에는 엄청 잘생기고 까칠한 미남…….

까칠한 미남?

눈을 깜빡이던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늘색 머리, 에메랄드빛이 살짝 섞인 푸르른 눈동자, 까칠하기 짝이 없는 얼굴까지.

‘히익.’

홀 한중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2황자님이었다.

‘아니, 왜 더 멀리 계시지 않고 저기 계시는 거야!’

보통 소설에서 중요한 사람은 가장 늦게 오던데, 황자님씩이나 되는 분이 일찍 오신 모양이었다.

옆으로 보이는 비슷한 얼굴이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의 남자는 아무래도 형제인 듯했다.

‘나이대를 봐서는 황태자네.’

거리가 꽤 돼서 눈이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괜히 찔려서 슬슬 물러났다. 그러고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 테이블 사이로 꾸물꾸물 기어가는 조그만 무언갈 본 것 같았다. 하필 내가 리제를 기다린다고 인적이 드문 곳에 서 있어서 더 잘 보였다.

촉이 왔다. 팔찌를 흘끗 내려다보았지만 아직은 반응이 없다.

‘더 가까워져야 알아볼 수 있으니까.’

나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미안 리제, 아직도 오지 않는 리제에게 속으로 사과하면서.

구석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나는 꾸물꾸물 테이블 밑을 기어가는 기척을 쫓아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통과해야 했다.

‘왜 저렇게 불편하게 이동하는 거야?’

근데 심지어 빨랐다!

마침내 마지막 테이블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뒤통수가 요리조리 옆을 살피더니, 곧 어두운 복도 쪽으로 튀어 나가 도도도 사라졌다. 조금 전 파올로에게 듣기론 정원과 이어진 곳이었다.

나는 어린아이가 테이블 아래에서 나와 복도로 나서기 직전 환한 빛에 드러난 머리색을 똑똑히 보았다.

‘하늘색 머리? 빙고!’

천사의 깃털처럼 새하야면서 제일 끝은 연한 하늘빛이었다. 은하늘색 머리는 오직 황실에서만 나온다는 색이다.

나는 조그만 누군가의 자취를 쫓아 발을 재게 놀렸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급했던 걸까.

음식이 놓인 테이블 옆을 막 지나칠 때였다.

[헉, 요정의 창이 경고합니다! 빙의자 님 건강 수치에 주의하세요! ━Σ(゚Д゚|||)━]

‘뭐?’

끼익-.

옷이 걸렸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는 이미 몸이 살짝 기울어졌다.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단단한 것이 허리를 붙들었다.

“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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