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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4화 (14/281)

◈14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8)

“그, 잘못 들으신 게 아닐까요?”

“요?”

“아닐까! 아닐까?!”

살다 살다 이제 세 살밖에 되는 아기한테서 위압감도 느껴 보는군요.

아 좋아라, 이 멋진 4D 로판 체험. 젠장!

“어느 가뮨에서 온 쟈냐.”

아기 황녀님이 엉덩이 근처에 달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쓱 꺼냈다. 나는 그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딸랑이?

딸랑딸랑.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무척 경쾌한 소리가 났다.

“나룰 보구, 그니까 어룬이 아기한테 존댓말울 쑤는 건 두 가지 중 하냐.”

어째서일까, 발음이 픽픽 새는 이 귀엽고 아기자기한 목소리가 소름 돋게 느껴졌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엄마야, 왜 바람 한 점 안 부는데 옷이 흔들리지?

착각이 아니었다.

아기 황녀님이 들고 있던 딸랑이가 저 혼자서 파르르 흔들린 것이다.

뭐야, 엄마, 저거. 무서워. 왜 혼자 흔들리는 건데.

“눈치가 아쥬 빠루거나. 아직 연회에셔 공표도 아난 내 정채를 알고나.”

“하하하하하.”

황녀님께서 압박 주시는 건 오라버니랑 아주 똑같으시네요. 이렇게 귀여우신데. 하하하하.

“정채를 알고 나를 주기러 온 암살자고나?”

“예에에?”

내가 놀란 건 아기 황녀님의 말 때문만이 아니었다.

딸랑이에서 슈컹! 하고 날카로운 빛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저거,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판타지에 나오는 검기 같은데? 여기 육아물 아니었어?

[정답입니다! 검기예요!]

무슨 애기가 검기를 쓰는데!

[전생에서 가졌던 능력이에요! 비틀린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답니다 ( ˃̣̣̥᷄⌓˂̣̣̥᷅ )]

그렇게 퉁치지 마! 이거 완전 밸런스 파괴잖아. 소설도 이따위로 쓰면 욕먹는다고!

하지만 욕해 봐야 무슨 소용일까.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급했다.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에 손이 덜덜 떨렸다.

세상에나, 나 지금 세 살짜리 아기님한테 떨고 있니? 딸랑이에 겁먹었다고?

“죄송합니다!”

연약한 백작 영애에게 법은 멀고 주먹, 아니, 검기 어린 딸랑이는 아주 가깝다. 난 오늘부터 제일 무서운 게 딸랑이가 될 것 같아요!

난 넙죽 엎드렸다.

“그, 일단은 모른 척하려 해서 죄송해요!”

나는 얼른 이실직고했다.

“사, 사실 처음부터 황녀님이신 거 알고 있었어요.”

조금이지만 아기 황녀님의 기운이 가라앉았다.

“내, 얼귤은 어떻게 안 고지?”

“솔직히, 이렇게 예쁜 아기가 황녀님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싶었어요!”

“…….”

큰일 났다. 이 아기 황녀님께 칭찬은 씨알도 안 먹히는 것 같아!

[저런, 요정은 그렇게 해서는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충고해요! (╯•﹏•╰)]

알고 있어.

“할 말운 그거쁀인가?”

“……죄송한데, 그 딸랑이 너무 위협적이거든요? 조금만 뒤로 물러 주시면 안 될까요?”

“그게 먀지막 말인가.”

으아아아, 그럴 리가요!

머리, 머리를 굴리자. 어떡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지?

[꺄르륵, 요정이 즐겁게 지켜보고 있어요. (。Ő▽Ő。)ノ゙]

넌 좀 다물고 있어 봐!

‘그래, ‘그거’면 될까?’

나는 간신히 떠올렸다. 이 어처구니없는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말이다.

“황녀님께서 저를 너무 경계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사실…… 황녀님의 오라버니신 2황자님께 황녀님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미세하지만 아기 황녀님이 움찔했다.

“2황자님이신…… 황자님께서는 아주 즐겁게 황녀님 이야기를 하셨어요.”

생각해 보니 아직 그분의 ‘진명’을 모른단 것이 떠올라 슬쩍 이름 언급을 생략했다.

“그러다가 저도 황녀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접하게 돼서 바로 알아본 거예요.”

“……이야기룰 드로따?”

“네!”

“이상하네.”

딸랑. 아기 황녀님이 딸랑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내 오라버니들은 나 시로할 건데?”

아기답지 않은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그 뒤로 망설임 섞인 의문이 희미하게 서려 있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게 끝이 아니에요, 황녀님.”

힘내라, 달린. 위기가 곧 기회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뜬금없이 들릴 수 있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제게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어요.”

“특별한 능력?”

“네! 저는 과거를 볼 수 있어요.”

나는 앞으로 이 아기 황녀님의 호감을 잔뜩 얻어야 한다. 거기다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도 이 아기 황녀님을 좋아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아기 황녀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기 위한 방법으로 ‘이것’만큼 좋은 게 없다.

“그냥 과거가 아니에요. 저는 ‘전생’을 볼 수 있어요.”

바로, ‘비밀’ 말이다.

움찔. 아기 황녀님이 멈칫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무순 헛소리를 하는 고지? 쓸데없는 소리로 나를 홀란스롭게 할 고라면.”

“황녀님 뒤로 아주 위대하신 분이 보였어요.”

“…….”

“그리고 황녀님,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전혀 수상하지 않게 보일 거라고 생각하시진 않잖아요.”

대체 어떤 아기가 그런 말투로 껄껄 웃습니까, 예?

[요정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어요!]

조금 전 건강 수치가 급격하게 떨어진 탓인지 피로함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나는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위대한 전쟁 영웅이시자 정복 황제이신 로아타 비센 폐하.”

그 순간 붕,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후드득. 눈앞으로 무언가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내 앞머리였던 파편이었다.

[‘주인공(아기 황녀)’의 빙의자 님을 향한 호감도가 올랐어요! (+10) ◡( ๑❛ᴗ❛ )◡]

“고짓말은 아닌 것 같운데.”

“아, 아, 아닌데요…….”

한껏 위엄 잡던 내 표정이 빠르게 비굴하게 허물어졌다.

엄마야, 무서워. 무슨 딸랑이가 검압을 내뿜죠?!

“정말이에요!”

“……그래소?”

“네?”

“그게 모 어쨌는데?”

아, 뭐야. 이걸 밝히는 걸로는 안 됐던 건가?

전생을 알고 있다고 고백하면 좀 더 호감을 보일 줄 알았는데.

[‘주인공(아기 황녀)’이 빙의자 님의 정체에 의문을 품었어요! ( •︠ˍ•︡ )]

……의문이라니, 이럴 수가.

그렇다면 혹시 ‘이건’ 될까? 그녀를 꼬셔 볼 다른 방법이 또 하나 떠올랐지만, 맞는 길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요정은 경고해요, ‘주인공(아기 황녀)’에게 한번 의심받기 시작하면 호감도가 오르는 속도가 현저하게 내려갑니다! (–30%)]

때마침 요정의 메시지가 나의 등을 떠밀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 지르자!

“황녀님께서 저를 자세히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 모르시겠어요?”

이 세계에서 눈을 뜨자마자, 가족들은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여러 상식을 다시 익힐 수 있도록 선생을 붙여 주었다.

내가 다시 익혀야 했던 것들 중 역사도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 아기 황녀님의 전생, 정복 황제 ‘로아타’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공부했던 것이 모두 기억나진 않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이 사람은 대단한 장군으로서 아주아주 많은 부하들이 있었다고.

“저도 전생을 기억합니다, 폐하.”

“……머?”

“저는 폐하를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닥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당신께서는 아주 위대하신 분이셨고, 저는 당신을 뒤따르던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작고 예쁜 얼굴에 눈이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존경했습니다, 폐하.”

그 순간이었다. 나는 속으로 요정의 창을 향해 소리쳤다.

‘야, 요정의 창 듣고 있냐?’

대답은 없지만 분명히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급하므로 말을 고를 시간은 없었다.

‘너, 이런 고난이도 미션을 내가 그냥 수행하게 하진 않겠지? 뭐든 도움이 되는 걸 가지고 있을 거란 걸 알아.’

왜 내게 이런 창이 떠올랐을까?

짐작할 수 있는 건, 내가 이 퀘스트를 제대로 수행해야 ‘요정’한테도 이득이라는 거다.

내가 실패하면 너희도 곤란하겠지? 그래서 퀘스트 보상이란 걸 주는구나?

내가 해내야만 하도록 당근을 주는 거지.

‘내놔.’

나는 당당히 선언했다.

[퀘스트 - ‘아기 황녀님을 만나러 가자!’의 보상을 받으시겠어요?]

나는 얼른 작게 끄덕였다. 뭔진 몰라도 줘. 이 상황에 도움이 될 거라 확신했다.

[보상을 지급합니다! (╹౪╹*๑)]

파아아앗! 눈앞에서 새하얀 빛이 터졌다. 눈을 찡그린 순간 시야에 희미한 것이 보였다.

[퀘스트 보상으로 스킬 레벨이 올랐어요!]

[빙의자 님의 스킬 - ‘빙의(lv.1)’가 활성화됩니다!]

빛이 더욱 커졌다.

“폐하!”

굳건하게 서 있는 한 기사가 보였다.

여성이고, 덩치가 아주 큰 사람이었다.

어째서인지 피로 잔뜩 물든 얼굴을 기사는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웃었다.

“저는 아무래도 폐하께서 만드실 지평선을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사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에 덩치 큰 여기사는 속없이 웃었다. 주르륵, 기사의 입술로 피가 흘렀다.

“저를 기억해주세요, 폐하.”

“저는 당신의 영원한 기사.”

“엠버넷입니다.”

[펠프스 제국의 충신 ‘엠버넷’의 영혼과 기억을 받았습니다. ᕕ( ᐛ )ᕗ]

[빙의자 님의 소유가 되었어요!]

[빙의자 전용 스킬 - 빙의(lv.1)

등급: 레전드리(SS)

빙의자 만의 고유 기술, 한순간 어떤 영혼이든 빙의시키거나 어떤 몸에든 빙의할 수 있다.

단, 레벨이 낮을수록 불안정하다.]

잠시지만 몸이 무거워진 기분이 들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을 때, 누군가 다급히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기 황녀님이었다.

아기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엠버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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