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11)
잘도 숨어 있었네. 난 거기 있는 줄도 몰랐는데.
새까만 제복을 걸친 모습이 어째 강도 같기도 했지만, 아마 방금 언급되었던 2황자의 그림자를 맡은 인물일 터였다.
지금 막 어렴풋이 기억난 건데, 이 제국의 황실에는 각 황족을 호위하는 그림자 기사단이 따로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이런 잡설정 같은 거 드문드문 기억나서 뭐하냐고. 중요한 내용이나 떠오를 것이지.
아기 황녀님이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웃어 보였다.
“황녀님, 걱정하지 마세요. 황실에 정식으로 요청을 올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날 찾아올 곤가?”
“물론이죠.”
죽기 싫어서라도 꼭 와야 한답니다.
이런 생각과 동시에, 어쩐지 저 크고 귀여운 눈이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영애와 이야기한 뒤에 부황께도 아뢰겠다.”
2황자까지 이렇게 이야기하고서야 아기 황녀님이 기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아기 황녀님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윽,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푹 쓰러지는 순간 억세고 단단한 것이 내 허리를 붙들었다. 2황자가 잡아 준 것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앞을 보지 않고 걷는 건가?”
“보긴 했는데, 다리에 쥐가 나서 말이죠. 하하하…….”
“하하?”
“쥐가 나는 바람에 감히 은덕을 입었습니다, 지엄하신 전하.”
나는 알아서 기기로 했다.
“말투는 또 왜, 아니. 됐다. 제대로 일어나도록.”
“네!”
바로 섰더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마치 갓 태어난 새끼 기린 같은 꼴이었다.
“……영애는 혹시 걷는 법을 잊어버린 건가?”
“아니요, 그건 아닌데…….”
“영애는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젠장, 억울하다. 아까 아기 황녀님께 쫄아서 무릎을 꿇은 뒤로 내내 일어나질 못한 탓인데.
그러고 보니 이 남매에게 쌍으로 겁을 집어먹었었구나. 내 상태창 특성에 ‘겁쟁이(특수)’ 이런 것도 적혀야 하는 거 아닐까.
한쪽은 얼굴부터 살벌하게 생겼지, 다른 한쪽은 생김새는 귀엽지만 언제든 내 머리통을 향해 날릴 수 있는 딸랑이를 지니고 있었다.
예전에 같이 로판을 파던 친구가, 왜 하필 성질 더러워 보이는 캐릭터가 취향이냐고 물었지.
그냥 좋은 걸 어떡해. 이런 애들이 항상 내 마음의 원 픽인걸.
그래서 이 남자가 아무리 살벌한 얼굴로 쳐다보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두려움은 생기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아까처럼 요상한 번개 같은 게 코앞에서 튀어도 말이다.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네? 아뇨, 아뇨. 그런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시선이 불순했다.”
용광로세요, 불순물 걸러내시게? 나는 속으로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하하하, 웃었다.
나를 빤히 보던 2황자님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는 듯하더니 이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애는 참 가지가지 하는군.”
그와 동시에 내 몸이 둥실 떠올랐다.
어라, 어라라?
[등장인물 ‘2황자(둘째 오빠)’가 빙의자 님께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고 있어요. o(iДi)o]
[등장인물 ‘2황자(둘째 오빠)’의 빙의자 님을 향한 호감도가 소폭 올랐어요!]
“조금 전엔 섣불리 그대를 오해했었지. 이건 그 값이라 생각하겠다.”
“엄마야!”
2황자가 걸음을 옮기자, 신기하게도 내 몸이 허공에 뜬 채 따라 움직였다.
흡사, 2황자가 손에 쥔 헬륨 풍선이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정말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데 그래.
“연회장 입구까지만 데려다주지.”
톡 쏘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뚜벅뚜벅. 아무도 없는 복도에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하기야 내가 아기 황녀님과 처음 만난 곳도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긴 했다.
황자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까 전 여동생을 걱정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묘하게 냉랭한 얼굴이었다.
‘호감도도 그렇고, 2황자와 황녀님 사이가 보통의 가족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후.’
아까 아기 황녀님은 ‘황제’와 마주하는 걸 소스라칠 정도로 꺼렸지. 이것도 지금 이 원작의 클리셰가 어그러진 것과 관련 있는 건가?
결국 나는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황자 전하. 혹시 뭐 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입을 한시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군.”
오, 쓸데없는 말은 무시하겠다는 건가요. 하지만 나는 까칠한 반응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 혹시, 저는 지금 어떤 원리로 둥실둥실 떠 있는 건가요?”
“마나를 다루는 방법 중 하나다.”
마나라면, 그 아기 황녀님이 딸랑이에서 푸슉푸슉, 검기를 솟게 했을 때 나온 그거?
그러고 보니 이 남자에게도 검의 대가라는 설정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마나란 건 대단하네요. 검기도 이걸로 만드는 거죠? 푸슉푸슉!”
“푸슉푸……. 그런 표현은 대체…… 됐다. 혹시 영애도 검에 관심이 있는 건가?”
검 이야기가 나오니 잠시지만 목소리에서 냉기가 수그러든다.
뭔가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연애 시뮬레이션 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눈앞에 이런 선택지가 떠오른 것 같달지.
1. 아니요, 관심 없는데요? (솔직)
2. 아, 사실은 관심이 있었어요. 검을 다루진 못하지만~ (내숭)
나는 고민하다 하나를 골랐다.
“관심이 없진 않습니다. 제 오빠가 기사인걸요.”
“아아, 혹시 파올로 경 말인가. 좋은 검사지.”
아무래도 목소리에 담긴 까칠함은 날 때부터 타고난 건가 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바로 움츠러들었을 위압감이 있었다.
“아, 오빠를 아시는 건가요?”
“……황실 기사단 단원인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나?”
파올로, 너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냐? 나는 난감하게 하하하 웃었다.
“아하하하, 다,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시군요!”
2황자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지만 그에 대해 더 말을 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상한 질문도 하나 해 보고 싶은데요.”
“내가 무시할 거란 건 잘 알고 있겠군.”
“그, 보통은 여성이 쓰러지면 이렇게 띄우는 게 아니라 음, 뭐 안고 간다거나 그러지 않나요? 부축해준다거나…….”
“지금 내가 영애를 직접 안아야 했단 말을 하는 건가?”
“네? 아, 아뇨. 그냥 부축할 수도 있고…… 이런 것도 뭐…….”
“그 정도로 나랑 닿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데.”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니, 어떻게 하면 얘기가 그렇게 된단 말인가?
2황자는 이런 나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런 수작은 곤란하다, 영애.”
[등장인물 ‘2황자(둘째 오빠)’의 호감도가 내려갔어요! (。•́︿•̀。)]
[등장인물 ‘2황자(둘째 오빠)’의 현재 호감도 : -6]
정말 솔직한 황자님이시네.
[등장인물 ‘2황자(둘째 오빠)’의 호감도가 내려갔어요! ( Ĭ ^ Ĭ )]
[등장인물 ‘2황자(둘째 오빠)’의 현재 호감도 : -7]
아니 잠깐만.
[등장인물 ‘2황자(둘째 오빠)’의 호감도가……]
“아니, 잠깐, 잠깐만요!”
나는 둥실둥실 뜬 채로 손을 번쩍 들었다. 2황자님이 흘끗 시선을 주었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궁금하단 것이었지, 그렇게 해 달라고 말씀드리지는 않았…….”
“이미 늦었다, 영애.”
“아니. 정말 그게 아니라, 황자님은 제 취향이 아닌……!”
“뭐?”
……라고 말하기엔 너무 제 취향으로 잘생겼군요. 거짓말은 못 하겠다.
“그만. 그런 관심은 부담스러우니 거기까지 하는 게 좋다고 말해 두지.”
짜증이 살짝 스민 음성에 나는 입술을 꾹 닫았다.
‘저런 인간이 마지막에 가서는 여주 앞에서 엉엉 우는 게 내 취향이었단 말이지.’
내가 이래서 이 황자랑 다시 안 보고 싶었던 건데.
멀지 않은 곳에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2황자가 나를 바닥에 내려 주었고, 잠시 휘청거리긴 했지만 이번엔 제대로 내 발로 섰다.
‘그래도 호감도가 전보다는 올랐으니 다행인가?’
그런 생각에 정신이 팔린 나는 꽤 큰 문제를 깜빡 잊고 있었다.
“내 여동생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지?”
“아 그게요, 음…….”
이건 딱히 숨길 필요도 없는지라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복도로 나갔다가 혼자 밖으로 나서는 어린아이를 봤어요. 아이가 혼자 다니면 위험할 것 같아서 아까 있던 곳까지 쫓아갔는데…….”
“그게 내 여동생이었다?”
“네, 맞습니다!”
“그 김에 내 여동생과 이야기까지 나눴단 건가?”
추궁하는 듯 매서운 눈빛이 날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