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9화 (19/281)

◈19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13)

* * *

“으아!”

눈을 번쩍 뜨자,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내 방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천장이 눈에 익을 정도로 내가 이 빙의 생활에 적응했단 소리기도 하겠다.

끄응차,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평소보다 몸이 훨씬 가벼웠다. 오래도록 푹 잔 덕분인가?

다행스럽게도 아기 황녀님을 다시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예상이 맞으면 지금도 여동생 바보의 전조를 보이는 2황자가 황제 폐하께 내 얘기를 고했을 것이었다.

아니면 혹시 황궁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오진 않으려나.

콰당탕!

“아가씨?”

“응?”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대야를 떨어트린 채 멀거니 서 있는 베키가 보였다.

“히잉, 아가씨이이……!”

“어?”

“뭐야, 아가씨께서 일어나셨어?”

“어디? 어디?”

베키 뿐만이 아니었다. 베키 뒤로 여러 머리가 튀어나오더니 마치 히드라 같은 형상이 되었다. 모두 저택의 하녀들이었다.

하녀들이 우르르 달려와 나를 에워쌌다. 눈물을 머금거나 아예 엉엉 울어 버리는 얼굴들이 반가우면서도 당혹스러웠다.

“어, 어어?”

“흐엉, 한참이나 깨지 않으셔서 너무 놀랐어요!”

“다신 못 뵈는 줄 알고…….”

“얘는! 넌 아가씨께 무슨 그런 불길한 소릴 하니!”

“죄, 죄송해요! 흐어엉!”

아이고, 정신없다.

“아냐, 아냐. 난 괜찮아, 페페. 베키 너도 화내 줘서 고마워.”

베키의 눈이 엄청나게 빨갰다. 단순히 울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라, 내가 일어나지 않는 동안 잠도 못 잔 것 같았다. 괜히 조금 미안해졌다.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야?”

“흡, 꼬박 이틀 동안 깨어나지 못하셨어요.”

이틀이라, 나름 양호한데.

‘내 상태창, 건강 수치만.’

[이름: 달린 에스테

현재 상태: 시한부

건강 수치: 27/100

건강 상태: 눈에 띄게 오른 건강! 최대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애걔, 이게 최대 수치라고? 퀘스트를 두 개나 수행했는데? 메인 퀘스트도 받았는데?

‘야, 요정. 이게 말이 되냐? 건강 수치 더 줘!’

[요정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해요. (。ŏ﹏ŏ)]

‘왜!’

요정의 설명은 이랬다. 건강 수치 25를 넘기면, 수치 1 올리는 데 25 아래에서 5씩 올리는 것과 같은 노력이 든다고.

아니, 무슨 50쯤 찍은 것도 아니고 고작 25에서 이 정도란 말이야?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따졌더니, 이 몸이 그 정도로 심각했다나. 원래 그랬다고 하니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요정의 창을 내가 뜯어고칠 순 없으니 미뤄 두고, 일단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먼저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아기 황녀님의 문제부터.

자, 아기 황녀님은 왜 황제와 마주하기 싫어하는 걸까. 이걸 알아낼 차례였다.

“달린!”

“오, 내 딸아!”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부모님이 다녀갔다.

부친인 에스테 백작은 눈물을 너무 많이 쏟는 바람에 모친에게 부녀가 같이 쓰러질 일 있냐고 혼이 났다고 한다.

부모님이 돌아간 뒤로, 또 다른 가족이 등장했다.

“일어났다며?”

파올로였다. 덩치만 클 뿐 나랑 비슷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살랑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주 푸욱 잤네, 푹 잤어.”

어쩐지 가벼운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응, 그렇지. 꿈도 안 꾸고 잤어. 꿀잠.”

“잘됐네.”

파올로가 성큼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나중에 네 친구인 트리샤 후작 영애에게 고맙다고 전해.”

“리제?”

“그래. 영애가 마법이 걸린 마차를 제공한 덕분에 네가 빠르게 저택에 도착해서 제 시간에 진찰을 받을 수 있었던 거야.”

“아, 그랬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제에겐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여기 이 덩치만 큰 오라버니한테도.

“오빠도 고마워.”

“별말씀을.”

파올로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뺨을 긁적였다. 왜 저러지?

“너 혹시.”

“응?”

“2황자 전하와는 무슨 사이냐?”

“으으응?”

내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거덕거리며 움직이자, 파올로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우리 집안에서 황자비가 나오는 건 아니지?”

“아무 사이도 아니야!”

대체 무슨 오해를. 물론 얼굴은 내 취향이지만, 나는 못 먹는 감 정도는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왜냐고? 일단 첫 번째, 육아물의 오빠에게 있어서는 여동생이 1순위다.

두 번째, 첫 번째가 지켜져야 내 생존 확률이 올라간다.

세 번째, 나는 연애에 관심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시간이 없다. 연애는 개뿔! 생존이 먼저 보장되어야 이 로판 세계를 한번 즐겨 볼 생각도 들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내가 강력하게 부정하자, 그제야 파올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아니라면 됐어.”

“으아앗.”

파올로가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무지막지한 힘에 고개가 푹 내려갔다.

[저런, 목뼈에 충격을 받아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ಡ︷ಡ)

현재 건강 수치: 26]

야, 이씨! 이게 어떻게 올린 건강 수치인데! 나는 파올로를 노려봤다.

“야, 뭘 그렇게 살벌하게 노려봐?”

“죽여 버릴 거야…….”

“어어?”

파올로가 당황하더니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렸다.

“야, 내가 머리 헝클어뜨려서 그래? 너 자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머리를 빗은 것도 아니잖아…….”

“죽여 버릴 거야.”

이 요정의 창 만든 새끼.

제대로 오해한 파올로가 커다란 강아지처럼 끙끙댔다. 하지만 곰처럼 거대한 남자가 아무리 그런들 내 눈에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저택에서 스치듯 보았던 기사가 들어왔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가씨. 도련님.”

기사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서신이었다.

“황실에서 정식 초대장이 왔습니다.”

오. 나는 소리 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황제 쪽에서도 관심을 기울일 거라던 내 예상이 적중한 듯했다.

황제와 아기 황녀님이 현재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는 원작에서처럼 아기 황녀님을 위한 연회를 열었다.

이는 즉, 관심은 있다는 소리였다. 어떤 종류의 관심인지는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만.

“황궁에 들라는 거네.”

서신의 내용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옆에 있는 파올로가 들을 수 있게 소리 내어 읽어 주자, 파올로의 얼굴이 시시각각 굳었다.

“언제까지 들어오라고?”

“내일.”

사실은 나흘 뒤라고 적혀 있었지만 나는 파올로가 보지 못하도록 날짜를 슬쩍 가렸다.

“안 돼.”

“안 되긴 뭘 안 돼. 황실 명령인데.”

“이틀이나 기절해 있다가 막 일어난 환자가 뭘 하겠단 거야. 황실이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곳인 줄 알아?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황제 폐하께 요청 드릴 거야.”

“우리 가문 힘 없잖아?”

“윽.”

내가 알기로 에스테 백작 가문은 세력이 약한 편이었다. 마음이 아프지만, 시한부인 나의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돈을 쓰는 바람에 세력이 줄었다는 것 같았다.

“괜찮아, 내일이면 낫겠지.”

“고집부리지 마.”

“내 고집이 어떤 고집인지도 알겠네. 생각 바꿀 마음 없어.”

“네가 불려 가는 이유가 혹시 2황자 전하와 함께 있던 일과 관계된 일이냐?”

“음…….”

파올로는 아직 내가 왜 2황자랑 나타났는지 모르지.

파올로에게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고민하다 나도 모르게 서신을 움켜잡았는지 내 손에서 서신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음? 소리가 이상해서 살펴보니 얇은 종이 두 장이 겹쳐 있었다.

“서신이 하나 더 있는데?”

“뭐? 무슨 내용인데.”

“음…… 있어 봐.”

새로운 서신에는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를 황녀님의 놀이 친구로 임명한다는데?”

“뭐? 너를 왜?”나는 고민 끝에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날 캄캄한 궁 뒤쪽 정원에서 아기 황녀님을 만나고, 2황자와 연회장으로 돌아가게 된 것까지.

“뭐, 황녀님? 진짜야?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널 부르신 거라고?”

“그런 것 같은데? 물론 내 추측이야.”

“아니, 그래, 그런 거면…… 이해가 가.”

파올로가 얼굴에 손을 얹은 채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입을 달싹이는 모습이 흡사 뭔가 아는 사람의 얼굴인데.

그러고 보니 파올로는 황실 기사단이었지? 혹시 뭔갈 아는 걸까? 그럼 잘됐네.

“황녀 전하께서 2황자 전하께 너와 놀이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신 거야? 확실해?”

“으응, 그런데? 왜 그렇게 심각해?”

“잘 들어, 황제 폐하 앞에서 황녀 전하 이야기를 할 때는 무조건 조심해.”

“으응?”

“알려진 것과 다르게 황제 폐하와 황녀 전하의 사이는 최악이야.”

“……왜?”

파올로가 무언가 대답하려다 말고 다시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는 오히려 내게 물었다.

“너 진짜 계속 고집부릴 거냐?”

“그럴 건데?”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나도 좀 알아봐야겠다.”

“어…… 더 안 말려?”

“말린다고 듣냐? 그럼 뭐, 덜 다치기라도 하게 무슨 수든 짜내서 대비해야지 어떡해.”

쓸데없는 짓 한다고 뜯어말릴 줄 알았는데. 나는 이 집안에서 금지옥엽 귀한 딸이었으니까. 원체 몸이 약한 데다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으니, 더더욱 쥐면 꺼질라 불면 날아갈라 고이 아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툭, 머리로 한 번 더 손이 내려왔다.

이번에는 눈치를 보듯 살살 어루만졌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나랑 똑같이 생긴 얼굴이 보였다.

“여동생을 아끼는 오빠는 황실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지.”

흐음, 꽤 믿음직한 얼굴이네.

물론 그 믿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올로가 엉망이 된 내 머리를 보고 낄낄 웃으면서 와장창 깨졌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물었다.

“그럼 황자 전하들이 여동생을 아낀다는 소문은? 알려진 건 다 거짓말이야?”

“그건 아닐걸. 실제로 굉장히 아끼셔. 귀한 분들의 속내를 어찌 알겠냐마는.”

파올로가 잠시 망설였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 파고들었다.

“그래서 아까 얘기하다 만 건 뭔데. 황녀 전하랑 황제 폐하 사이는 왜 최악인 건데?”

“그건 나도 자세히는 몰라. 하지만 이제부터 알아볼 생각이니까.”

파올로의 커다란 손이 뒷덜미를 긁적였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은데.

그 뒤로도 한참을 더 망설이고서야 파올로가 말해 준 사실이란 이러했다.

“……황녀 전하가 그 장난감 같은 걸로 황제 폐하를 찔렀대.”

뭐? 나는 눈이 찢어져라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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