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0화 (20/281)

◈20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14)

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야?

어째 굉장히 결정적인 단서를 들었다는 직감이 왔다.

“그 뭐라더라…… 아, 그 아기들 손에 쥐고 있는 거 있잖아?!”

“딸랑이?”

“그래, 딸랑이.”

파올로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걸로 황제 폐하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셨다나 봐. 아무리 귀여운 딸이지만 그런 행동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을 부모가 어딨겠냐.”

그 순간 황궁에서 보았던, 검기 어린 딸랑이를 든 황녀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그때의 일이 바로 래빗과 가족들의 사이가 멀어지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일리 있어.’

놀란 황가 사람들은 래빗에게 거리를 두게 되고, 래빗은 시간이 갈수록 원한만 더 커졌다거나.

이 사건은 분명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 귀여운 딸랑이에서 푸슉푸슉 검기가 피어오르는 광경을 목격했다면?

누구라도 그건, 대단히 당황할 만하지.

* * *

큰일 났다. 이 이야기는 생각보다 더 엉망진창인 것 같아.

확실히 바뀌어 버린 설정을 생각하면 신선한 소설이 되었다. 문제는 내가 이 신선한 소설을 원래대로 돌려놔야 한다는 거지.

나는 현재 달리는 마차에 몸을 실은 상태였다.

내가 황실의 초대장을 받은 지 하루가 지났다.

“뭐? 이게 무슨 소리인 게냐.”

어제 오후, 모든 소식을 전달받은 아버지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성인인 우리 달린이 황녀 전하의 놀이 친구라니? 이게 다 무슨 소리더냐.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도 그럴 것이 보통 황녀와 황자의 ‘놀이 친구’는 또래 아이가 맡는 것이 보통이었다.

‘놀이 친구’란 말 자체가 이 세계에서 고귀한 피를 이은 아이의 사회성 향상과 정서 발달을 고려해 엄선하여 붙이는 또래 친구를 일컬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미 숙녀라 이를 수 있는 멀쩡한 성인 딸이 갑자기 세 살배기 아기 황녀의 친구로 임명되었단 소릴 들은 것이다.

모든 사정을 아는 나는 그저 속으로 하하하, 웃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황실의 명령은 명령. 나는 황당해하는 아버지와 근심으로 얼굴을 찡그린 어머니를 열심히 달랬다. 내 눈총을 따갑게 받은 파올로도 마지못해 동참했다.

“나 혼자 가도 된다니까.”

나는 앞에 앉은 상대에게 툭 말했다. 자리가 좁은지 잔뜩 몸을 구기고 있던 사람이 미간을 찡그렸다.

“나도 출근하는 길인데?”

“무슨 기사가 오후 1시에 출근해?”

“실력이 좋으면 그래도 돼.”

“흐응, 퍽이나.”

“뭐야?”

파올로가 나를 쳐다봤다가 피식 웃었다. 갸륵하고 가소롭다는 얼굴이었다.

“오빠, 황제 폐하와 황녀 전하 사이에 대해서 알아본다고 했지?”

“어, 왜?”

“아니, 뭔가 알게 되면 나한테도 꼭 알려달라고.”

파올로는 콧잔등을 찡그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그 뒤로 30분을 더 달려 황궁 정문에 들어섰다.

나는 고개를 돌리다 말고 잠깐 시선을 멈췄다. 심드렁하게 창문을 쳐다보고 있는 파올로를 보고서 말이다.

‘흐음, 이쪽도 생김새가 나쁘진 않은데.’

로판 한정 엄격한 외모지상주의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파올로의 외양은 썩 나쁘지 않았다. 거의 190에 육박하는 키와 덩치, 남색 머리카락이나 다정하고 그윽한 눈매도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눈꼬리가 살짝 처져서 내 취향은 아니지만, 어딜 가도 남주, 못해도 서브 남주 자리 정도는 꿰찰 법도 한데.

여기까지 생각했다가 난 어깨를 으쓱 하고 말았다. 파올로가 정말 어느 소설의 남자주인공이었다면 내 팔찌가 진작 반응했겠지.

……음, 팔찌?

무심코 팔찌를 내려다본 나는 순간 눈을 찡그렸다.

뭐였지, 방금? 팔찌가 빛을 보인 것 같았는데.

혹시나 해서 다시 살펴보았지만 그런 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해?”

“아냐, 먼지가 묻은 것 같아서.”

2황자의 경우를 돌이켜 보면 이 팔찌는 주연을 만나자마자 강렬한 빛을 뿜으면서 확실하게 반응했으니까. 역시 내 착각이려니 생각했다.

* * *

미친, 힘들다!

이곳까지 오면서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아니, 설마 이럴 줄은 몰랐다고 해야 할까.

마차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 꽤 멀다는 것을 말이다!

‘내 체력은 대체…….’

사실 내 상태를 잘 아는 파올로가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가 버린 걸 보면 여기까지 걷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란 건데.

이 정도면 내 신체가 지독한 쓰레기라고 봐야 하는 거 아냐?

[정답입니다! ˚✧₊⁎( ˘ω˘ )⁎⁺˳✧༚]

……해맑게 대답하지 말아 줄래? 요정이고 뭐고 너, 내가 언젠가 꼭 죽인다, 진짜.

나는 속으로 끙, 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기껏 열심히 쌓은 건강 수치가 뚝뚝 떨어지게 생겼다.

나는 계속 멈춰 서 있을 거냐는 듯 쳐다보는 시종과 기사의 뒤를 다시 따랐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거대한 문 앞에 도달했다.

[무리한 걸음으로 발목에 충격을 받아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ಡ︷ಡ) 현재 건강 수치: 20]

……20으로 방어했다. 잘했다, 나!

“폐하, 달린 에스테 영애가 도착했사옵니다!”

내가 속으로 서러움을 삼키는 사이,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크게 외쳤다. 곧 문 안쪽에서 들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며, 거대한 알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길처럼 쭉 깔려 있었다. 그 끝에는 계단이 있었고 계단 위로 거대한 옥좌가 보였다.

그 앞으로 삐죽 튀어나온 저 발의 주인이 날 찾은 인물일 것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비록 초단기 속성 코스로 예법을 익히긴 했지만 황제의 얼굴을 감히 바로 봐선 안 된다는 것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추가 정보 하나, 황제에게 인사를 올릴 때는 ‘진명’을 부르지 않아도 된다. 황제의 진명은 오직 황후만이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후, 천만다행이었다.

“고개를 들라.”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눈앞 계단 위로 홀로 빛을 받은 듯한 존재가 보였다. 옥좌 옆으로도 사람이 서 있었지만, 모든 시선은 옥좌에 앉은 존재에게로 쏠렸다.

황제, ‘프란츠 콘라트 비센’.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2황자와 같은 시원하고 차가운 은하늘색 머리카락이었다. 신이 빚어 만든 것처럼 잘생긴 남자였다.

겉보기로는 한 30대 중반쯤이나 되었을까?

그러나 언뜻 보기에도 다르게 생긴 눈매나 붉은 눈 때문에 2황자와는 인상이 확연히 달라 보였다. 특히 깊은 붉은색의 눈에서는 어스름한 광기가 느껴졌다.

오싹한 감정을 느끼며 다리에 꾹 힘을 주었다.

위엄과 압력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황제가 아닐까. 장성한 황자를 셋이나 두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미남이었으나 냉랭한 표정이 위압감을 더욱 드높이는듯했다.

한겨울의 혹한이 알현실을 휘감기라도 한 듯 손끝이 떨렸다. 세상 무엇에도 관심 없을 것 같은 중후하고 느른한 표정.

한마디로 평하자면 정말 전형적인 소설 속 폭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대가 달린 에스테 백작 영애인가.”

“예,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게 맞다면 저쪽도 폭군이긴 하지.

‘소문도 좋지 않고.’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어제 잠깐 우려했던 것과 달리 알현실에 사람이 쓰러져있거나 곳곳에 피 웅덩이가 고여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기야, 사실 로판에 나오는 폭군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폭군이라고 할 수가 없다.

대부분이 강강약약 타입인 데다가 제 할 일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기 때문에, 폭군이라고 부르면 좀 미안하다 싶은 존재가 아니냐고.

생각해 보라. 폭군이랍시고 젊은 여자를 괴롭히고 노인을 폭행하는 진짜 악랄한 군주를 그려 놓으면 어느 독자가 보겠어?

그런 놈이 여주 아빠나 남주로 나오면 독자들은 당장 하차할 거다. 나도 마찬가지고. 남는 건 욕이 가득한 불호 댓글뿐이겠지.

그러니 자연히 일은 잘하는데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로판식 워커홀릭 폭군이 탄생한 거 아닐까.

그런고로 내가 얌전히 있기만 한다면 제아무리 폭군이라도 갑자기 날 죽이겠다 날뛰지는 않겠지.

“내 딸이 그대에게 관심을 보였다고 들었다. 놀이 친구로 두고 싶다더군.”

황제가 느릿하게 말했다. 관찰하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흠, 육아물은 보통 ‘서로 소원한 딸과 아빠’로 시작해서, ‘딸바보와 사랑스러운 딸’로 거듭나는 경우가 대다수니까.

저 말투로 미루어 봤을 때, 폭군이 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시기가 아직 오지 않은 건가 싶었다.

그럼 연회를 연 건 의례상 벌인 일이었나?

‘요정의 창, 현재 황제의 호감도 한 번 더 보여 줘.’

[현재 ‘황제’의 호감도는 –118이에요! p(´∇`)q]

처음 들었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그 사건 때문이겠지?’

아기 황녀님이 딸랑이로 냅다 황제의 목을 그었다는 사건 말이지.

……이걸 제대로 되돌릴 순 있는 거냐. 제발 제가 무사히 생존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나는 딸의 터럭 한 올에도 관심 없을 것 같은 냉정한 황제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내 딸이 그대에게도 직접 놀이 친구가 되어 달라고 말했다더군. 정말 그대에게 놀이 친구를 청했나?”

“……네, 그렇습니다. 영광스럽게도 그러한 청을 받았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내 그대를 보고자 함은 이것이 사실인지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음? 이거 뭔가…….

“영애도 알다시피 놀이 친구란 또래 중에서 뽑는 게 보통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음에도 영애는 수락했고.”

“예.”

“그대도 별수 없던 것인가.”

“예?”

“아무것도 아니다.”

무감하게 다물려 있던 황제의 입매가 잠시 달싹였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 참은 것처럼.

검을 만지작거리는 손이 살벌하게 느껴진다. 더욱 어둡게 가라앉은 시선에 칼날이 내 목을 당장이라도 겨누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싹-.

내가 잘못 본 건가. 방금 스치듯 느낀 위화감은 사실이었을까?

나는 진짜 칼날이 목 앞에 오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으로 됐다. 그대는 황녀의 궁으로 가 보도록 하라.”

정말 이 느낌이 진짜라면 말이지. 좀 더 황제와 대화해서 알아내고 싶은데, 해 볼까?

일단 저지르고 보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결국 안 되면 죽는 건데 뭘! 보통 로판에서는 이런 상황에 뭐든 주어지던데. 나한테는 퀘스트 같은 거 안 주냐?

그렇게 결심한 순간이었다.

[……히든 퀘스트를 눈치채시다니! 역시 고인물 독자시군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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