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15)
[히든 퀘스트가 도착했어요!]
[퀘스트(히든) - ‘폭군과 대화, 그런데 생과 사를 곁들인’
당신은 폭군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습니다. 폭군과의 대화를 통해 ‘주인공’과 관계에 대한 단서를 찾아봅시다.
성공 시: ‘황제’가 ‘주인공’에게 가진 호감도 +50
실패 시: 사망
기한: 30분]
[본 퀘스트는 거절이 가능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히든 퀘스트라고?
아니, 그리고 퀘스트가 왜 매번 이렇게 극단적이야? 실패하면 맨날 사망할 거라고 협박하네. 이러면 어떻게 오케이를 누르라고, 이 미친놈들아!
[요정의 꿀팁!]
[히든 퀘스트는 아주 특별한 상황에만 발생해요! (`・ω・´)”]
그때 나를 회유하기라도 하듯 추가 메시지가 떴다.
특별한 상황에서 발생하니까, 더 좋은 보상을 준다는 말이었다.
하기야 호감도 50이라니, 마이너스를 반이나 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잠시 고민했지만, 마음은 한쪽으로 굳혀졌다.
이 퀘스트를 못 깨나 메인 퀘스트를 못 깨나 결과가 똑같이 사망이라면, 일단 한번 도전해 보련다! 에라이!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퀘스트 효과로, 지금부터 3분 동안 ‘황제’는 빙의자 님의 질문에 진실만을 대답합니다!]
뭐?
“폐하.”
생각할 새도 없이 나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나를 비껴갔던 시선이 돌아오자 긴장감이 나를 짓눌렀다. 침착하자, 침착해 달린아.
외치자, 목숨은 하나뿐! 침착하고 신중하게, 그럼 길이 보일 거라 믿자!
“외람되지만, 감히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잠깐의 침묵 끝에 답이 돌아왔다.
“허한다. 무엇이지?”
평온한 답변이 오히려 내 심장을 더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그럼 저는 오늘부로 황녀님의 놀이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그래, 그렇다만. 그걸 묻고 싶었나?”
“아, 아닙니다. 그럼 매일 같이 황녀님의 거처를 방문해도 될까 하여…….”
“놀이 친구라면 응당 그래야지.”
좋아, 여기까지는 준비운동이었다.
[퀘스트 효과, ※남은 시간 2:30]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폐하께서는 저처럼 다 큰 성인이 황녀 전하의 귀중한 놀이 친구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시지는 않는지요?”
으으, 제발 내 결정을 후회만 안 하게 해 주세요.
“만약 소문이 퍼진다면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지도 몰라…… 걱정됩니다.”
“허?”
짧은 대답과 함께 침묵이 흘렀다.
“지금 영애의 질문은, 영애의 수준이 내 딸과 비슷해서 짐이 그대를 붙이는 것을 허락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내 딸이 놀이 친구 하나 없어, 그대를 곁에 붙이는 것이라 말하고 싶은 건가?”
“……예?”
“그것도 아니라면 내 딸이 놀이 친구조차 제대로 없을 만큼 덜떨어진 자식이라 이르고 싶은 건가?”
“어느 쪽도 아닙니다. 다만 아직 어리신 황녀 전하를 위하여 감히 저같이 이미 성인이 된 자보다 더 좋은 놀이 친구가 있을 거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고 싶습니다…….”
“내 딸이 처음, 자신의 의사로 선택한 자가 영애다. 답변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순간 작게 숨을 내쉬는 누군가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황제 옆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황제와 비슷한 머리색으로 미루어 누군지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이를 봐서는 황태자겠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아니었다.
“그럼 혹시 제가 놀이 친구가 되었는데, 정녕 누군가 나쁜 마음을 품고 감히 흉이라도 본다면 어찌할까요?”
“그자의 목을 베면 되겠지. 그게 설령 황녀의 놀이 친구라 하더라도.”
히이익. 내 어깨가 움찔 떨렸다.
“쓸모없는 혀를 거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고.”
“…….”
“더 질문 있나, 영애? 짐은 지금 이 질문이 흥미로운데.”
……더 질문하면 네 혀도 못쓰게 해 주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하지만 아직 퀘스트 효과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뗐다.
“……처음에 제게 황녀님의 의사를 확인하신 것은 어떤 연유이신지, 감히 여쭤볼 수 있을까요?”
“내 딸의 의사 말고 중요한 것이 뭐가 있다는 거지?”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쫙 돋았다.
비단 폭군의 눈이 날카로워져서는 아니었다. 황제의 손에서 푸르른 빛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니, 여기 황실은 일단 검기부터 뿜고 보는 게 집안 내력인가? 황제 주변으로 작게 피어오른 빛을 보며 난 침을 꿀꺽 삼켰다.
[퀘스트 효과, ※남은 시간 0:30]
“다른 이야기지만 황녀 전하께서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 보이셨고, 말씀도 너무나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퀘스트 효과, ※남은 시간 0:20]
“황녀님께서는 제가 본 그 어떤 아이보다도 아주 사랑스러우셨습니다.”
“그게 뭐 어쨌단 거지?”
[퀘스트 효과, ※남은 시간 0:15]
남은 시간을 본 순간 나는 결심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화, 황녀님께서는.”
꿀꺽.
“못생기셨습니다.”
“……뭐?”
콰앙!
[퀘스트 효과, ※남은 시간 0:10]
“영애, 지금 그 뚫린 입으로 무어라 했지?”
분명 바닥 군데군데 철이 섞여 있던 것 같았는데……. 나는 조금 전 바닥에 새로 생긴 커다란 구멍을 보고 아연해졌다. 자업자득이었으나 역시 무서웠다.
[퀘스트 효과, ※남은 시간 0:05]
“화, 황제 폐하께서는 황녀님을 사랑하십니까!”
“나는…….”
폭군이 그리 말한 동시에 얼굴을 찡그렸다.
[퀘스트 효과가 종료되었습니다!]
“지금 영애는 나를 똑닮은 딸을 두고, 남들처럼 추문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황제의 발밑에서 부스러기가 밟혔다. 나는 커다란 구멍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황녀가 내 핏줄이 아니라는 모함을?”
내 처지가 곧 저 가루가 된 바닥처럼 될까 봐, 어깨가 덜덜 떨렸다.
“그 혀가 더는 제 기능을 하지 않길 바란다면, 다시 한번 그 입을 놀려 봐도 좋다, 에스테 영애.”
“어…….”
황제는 어느새 자리에 일어나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폐, 폐하, 제 말씀을…….”
“말하라.”
눈을 뜨면 황제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것도 서슬 퍼런 시선을 내게서 떼지 않은 채.
황제가 뚫어 버린 바닥에서 풀풀 피어오르는 먼지나 커다란 구멍 따위에 위축되지 않으려 나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첫 번째 이야기부터 다시 해 보지.”
“어…….”
안 하면 곧바로 저 바닥 같은 꼴이 될 것 같아 얼른 입을 열었다.
“황녀님은 못생기셨다…….”
“…….”
“라고 황녀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셨어요.”
[저런, 강한 마나의 압박으로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대폭 떨어지고 말았어요. ಡ︷ಡ) 현재 건강 수치: 15]
[건강 수치가 갑작스럽게 대폭 떨어졌습니다! 주의하세요!]
흑흑, 젠장. 내가 어떻게 올린 수치인데!
나는 나를 압박하는 무형의 기 사이에서 가까스로 입을 떼었다. 으윽, 숨쉬기 힘들어.
“어, 어째서인지, 황녀님께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셨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원작에서는 그런 인물이었으니까. 문제는 내가 그 책을 반절도 기억 못 하고 있다는 점이지만, 여주인공이 무척 소심했던 건 기억난다.
“그대도 내 딸과 이야기 나눴다면 알 텐데? 내 딸이 그런 상태는 아니란 것을.”
……예, 자신감이 넘치셨죠. 껄껄껄 웃는 아기 황녀님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잃어버린 자존감을 차차 채워 주는 게 이 아빠와 오빠들의 역할이었건만, 우리 아기님은 자존감을 잃어버리긴커녕, 자신감으로 가득한 황제의 모습 그 자체였지.
“혹시 폐하께서는 그 모습이 약한 마음을 감추기 위한 모습이란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영애가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황제가 들고 있는 검이 미세하지만 움찔했다.
그래, 아기 황녀님의 상태를 봤다면 누구나 의아했을 것이다. 왜 그렇게 특이한 아이가 됐는지 응당 이유를 찾으려 했겠지. 미지의 존재는 거부감과 불편함을 선사하니까. 때로는 두려움까지도.
그런 불편함과 두려움으로 인해 생긴 틈이 있다면 나는 그 틈에 ‘납득 가능한 이유’를 채워 넣어 줄 생각이었다.
“저는 선천적으로 병약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저를 지키기 위해 씩씩한 척,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혹시나 황녀님께서도 그러신 건 아닌지 감히 짐작해 본 것일 뿐 확신이 아닙니다.”
“감히 제국의 황녀에게 영애를 대입해 보았다는 건가?”
“……황녀님과의 짧은 대화 중에 느꼈고, 혹시나 이런 이유에서 황녀님께서 저를 간택하신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 여쭤본 것입니다.”
나는 얼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까는 분명 내 판단이 맞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는데, 지금 상황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 행동이 퀘스트에 대한 완벽한 정답이 아니었거나, 아직 정답에 다다르지 못했나 보다.
바닥으로 떨어졌던 황제의 검이 다시금 내 목을 향하는 걸 보면.
날카로운 검이 목을 찌르려는 순간이었다.
“황제 폐하.”
낯설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이끌린 곳에 2황자가 서 있었다. 그의 뒤로 살짝 열린 문이 보였다.
“황자.”
“그 영애는 그리 대하시면 안 될 겁니다.”
다가온 2황자가 황제와 시선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