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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2화 (22/281)

◈22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16)

이렇게 보니 서로 상당히 다르게 생긴 부자지간이었다.

황제는 정말 잘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완벽하고 정석적으로 잘생겼으나 어딘가 광기 어린 느낌이라면, 2황자 쪽은 사납고 까칠해 보이지만 섬세함과 청명함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제가 장담하건대, 그렇게 위협하시면 그녀는 죽어버릴 겁니다.”

“뭐?”

“세 걸음도 못 가 피를 토할 정도로 약한 영애여서요.”

2황자의 눈이 아주 잠시지만 내게 닿았다. 금방 떨어졌지만.

“그리고 그녀는 황녀와 진심으로 소통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중요한 인물입니다.”

……음? 나는 눈을 깜빡였다.

“연회가 있던 날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곧 황제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힉, 작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스테 영애는 들어라.”

“……예.”

“지금 당장 황녀의 거처로 가라.”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나 살벌한 눈빛에 얼른 다시 눈을 깔았다. 와, 2황자가 꼬나보는 정도는 양반이었네.

‘그나저나 2황자, 지금 나를 도와준 거지.’

그러나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살풍경한 곳에서 벗어나라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건강 수치 떨어졌다고 또 바로 기절하지는 않겠지? 아직은 괜찮은 것 같은데.

다리가 다 풀린 채로 후들대며 걸어가는 내 뒷모습을 보고서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이건 환한 미소인 동시에…….

분노와 빡침이 가득한 웃음이었다.

복도로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나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고개를 들다 말고 내 표정을 보고서 흠칫했다.

“……황녀 전하의 거처로 안내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자인지 얼른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나를 아기 황녀님의 거처로 이끌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시종이 갑자기 멈춰 섰다. 기다란 복도 앞이었다.

“이곳으로 쭉 가시면 황녀 전하의 거처입니다.”

“여기서부터 일직선으로 가면 나온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럼 혼자 갈게.”

시종이 당황한 표정을 했지만 내가 몇 번 같은 의견을 피력하자 마지못해 끄덕였다.

어라. 그런데 태도와는 다르게 그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떠올랐다.

나는 시종을 물리고 홀로 복도를 걸어갔다. 어째서인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후우.”

그를 기점으로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나는 목 뒤를 닦아냈다. 머리카락 아래로 식은땀이 흥건했다.

띠리링, 소리가 들렸다.

[퀘스트(히든) - ‘폭군과 담화, 그런데 생과 사를 곁들인’가 완료되었어요!]

[퀘스트 시간 단축 성공!]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٩( ᐛ )و]

[추가 보상 –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13 오릅니다! 현재 건강 수치: 28]

그제야 숨쉬기가 좀 더 편해졌다. 황제의 위협에 건강 수치가 떨어진 뒤로 줄곧 나를 괴롭히던 저린 듯한 아픔도 사라졌다.

[퀘스트(히든) - ‘폭군과 담화, 그런데 생과 사를 곁들인’ 보상이 주어집니다.]

[퀘스트(메인) - ‘아기 황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자!’ 에서 황제의 호감도가 50 오릅니다!]

“야.”

퀘스트에 성공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퀘스트(히든) - ‘폭군과 담화, 그런데 생과 사를 곁들인’ (완료)

당신은 폭군에게서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습니다. 폭군과의 대화를 통해 ‘주인공’과 관계에 대한 단서를 찾아봅시다.

성공 시: ‘황제’가 ‘주인공’에게 가진 호감도 +50

실패 시: 사망

기한: 30분]

폭군과 주인공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폭군에겐 딸을 향한 관심이 충분히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숨겨진 이유가 있다.

“요정. 이 퀘스트, 아니. 황제의 호감도. 말해봐.”

[현재 ‘황제’의 호감도는 –68이에요! p(´∇`)q]

나는 남은 땀을 마저 닦아내며 팔짱을 꼈다.

‘뭔가 이상한데.’

나는 호감도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상한 부분을 콕 짚었다.

“이 호감도,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지. 주인공인 아기 황녀가 가족들에게 느끼는 호감도인 거지?”

잠시 요정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요정은 놀랐어요. 스스로 알아차리시다니 대단하네요!]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황제와 황자들이 아기 황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호감도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역시 이 요정의 창이 필요한 정보를 숨기고 모호하게 표시하면서 사람을 기만했구나.

“앞으론 제대로 표기해.”

[요정이 웃으며 알았다고 끄덕입니다! (¬ε¬ )]

해맑은 이모티콘이 떴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이놈, 보면 볼수록 의심스럽단 말이지.

하지만 이 의심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은 채 우선은 폭군이 했던 말에 주목했다.

“내 딸의 의사 말고 중요한 것이 무에 있다는 거지?”

황제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아기 황녀님의 상태만 틀어진 거라면 이야기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어야 할 텐데?’

그래, 황제도 황녀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는 듯한데, 그렇다면 황제 쪽에서 먼저 마음을 표현해올 법도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인가?

분명 폭군에겐 아기 황녀가 목을 그으려 들었던 사건 말고도 숨겨진 부분이 더 있다. 아니면 아기 황녀님에게 무언가 더 이상한 일이 있었거나.

황제, 황태자, 2황자, 3황자. 가족은 넷. 가족 수만큼 복잡한 오해가 있는 걸지도.

……이거, 내가 해결할 순 있는 거야?

* * *

“아우, 콜록.”

머리가 복잡해서 길게 한숨을 쉬던 난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요정의 창을 향한 빡침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던 탓이다. 욕지기가 마구 치솟았다.

사실 나는 현재 이 소설을 반절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 상태로 목숨을 걸고 퀘스트를 수행하는 참인데, 나를 돕겠다고 나타난 이 요정의 창이란 놈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후, 건강 수치가 오락가락하는 것도 사람이 버틸만 한 짓이 아니네.”

다행스럽게도 더는 걷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다.

건강 수치는 50부터가 일반인의 상태라고 했는데, 이 점을 고려하면 고작 1에 불과했던 나의 처음 건강 수치라거나, 10 언저리에서 20 사이를 맴돌았던 이전 상태가 그야말로 최악이었던 거지.

얼마 걷지 않아 곧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어느 곳이 아기 황녀님의 처소인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가장 커다란 문이 활짝 열려 있었으니까.

안쪽을 들여다보니 창문 역시 활짝 열린 채였다. 그 너머로 정원이 바로 보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여기저기 들꽃이 피어 퍽 예뻐 보였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가 정말 아기 황녀님의 방인가?

그도 그럴 게 아기 황녀님의 방은…….

너무 휑했다.

“으음…….”

방을 잘못 찾았나? 나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렇게 방안으로 한걸음 디뎠을 때였다.

“뉴규냐.”

히익! 나는 비명을 토했다. 아니, 가슴 앞에 들이밀어진 무시무시한 검기를 보고서 경악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화, 황녀님!”

“응?”

검기의 주인은 딸랑이를 들고 있는 아기 황녀님이었다.

왜 또 그 딸랑이를 겨누시는 건데요! 우리 평화롭게 잘 해결한 거 아니었나요?

자세히 보니, 아기 황녀님은 눈을 감고 있었다.

“음? 너였꾼. 냘 차자온 건가?”

“네, 네에. 그런데요…….”

“치밉짜인줄 아라따.”

“그, 눈은 왜 감고 계셨어요?”

“수룐이다.”

……세 살짜리 황녀님이 왜 이런 격한 수련을 하시는 거죠? 도대체 어디서부터 짚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아기 황녀님이 지금 황제를 비롯해 오빠들에게도 호감도 바닥을 찍은 상태란 거지?

왜 그런지,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황녀님, 황녀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오, 나도 이따! 일딴은…….”

아기 황녀님이 꼼지락거리며 검기를 수습하고는 딸랑이를 고쳐 쥐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어소 와라.”

내 눈이 커졌다. 와, 뭐야. 진짜 귀엽잖아? 와, 볼을 잡아당길 뻔.

“약속울 지켰꾸나! 나도 다시 보고 싶옸도다.”

“어어, 네? 네.”

아기 황녀님의 조그만 손이 내 손가락을 잡고 흔들었다.

정말이지, 작은 손이었다. 내 새끼손가락을 겨우 감싸는 작은 손에 나는 기분이 생경해졌다.

“배눈 고프지 않누냐?”

“어어…….”

“엠버넷 너눈 눌 간식을 이베 달고 사라찌!”

“그, 어, 배는 딱히…….”

꼬르르륵!

그 말을 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배에서 소리가 울렸다.

아, 그러고 보니 점심 먹은 지 좀 됐었나? 입맛이 없어서 적게 먹긴 했었지. 나는 뺨을 긁적였다.

이상하게 가슴에서 미세한 온기가 느껴졌다. 내 안에서 아기 황녀님의 충신 ‘엠버넷’ 씨가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졌다.

주군이 자신을 기억해 줘서 기쁜 걸까. 흠, 내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으나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온기였다.

“이쪼그로 가쟈! 응접실로 가묜 된다.”

“응접실이 어딘데요?”

“웅? 요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네?

“여기가 응접실이었다고요?”

“그로타만?”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전에 엄청 휑하다고 느꼈던 이 장소가 응접실이라니, 말도 안 돼.

비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벽이었지만 군데군데 금이 간 게 보였다. 커튼도, 바닥에 깔린 카펫도 상당히 오래된 것 같았다.

어째서 전부 이렇게 허름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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