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17)
“요기 안쟈라!”
“저, 황녀님…….”
“아, 기다리고라. 일단 사람부터 부르쟈꾸나!”
아니, 왜 앉는 것도 그리 근엄하게 앉으시는지.
음? 그보다…….
지금 보니까 아기 황녀님 옷도 낡았는데?
아기 황녀님의 분홍색 원피스는 황녀님에게 더없이 잘 어울렸지만, 천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저기 황녀님, 황녀님.”
“왜 부루나?”
“그, 옷이요. 음, 제가 돌려 말하지 않고 그냥 이야기할게요. 직설적인 거 좋아하시죠?”
“그로타만?”
“옷이 조금 오래된 것 같은데, 그, 훈련할 때만 입으시는 옷이에요?”
“아니? 난 맨날 이것만 입눈데?”
“식사하실 때도요?”
“그로치.”
“……잘 때도?”
“그로치?”
나는 경악해서 외쳤다.
“그럼 빨래는 언제 해요!”
“같운 옷이 또 있따!”
젠장, 이건 그녀의 미모에 대한 모욕이다! 이런 사랑스러운 공주님에게 똑같은 옷만 입히다니!
“아니, 그냥 솔직히 이야기할게요. 황녀님이 입으시기엔 천이 너무 오래됐어요. 낡았다구요!”
“오, 그론가!”
“지금에야 알았다는 듯이 말씀하지 마시구요!”
나는 주변을 휙휙 살피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속삭였다.
“전생에 황제 폐하까지 하셨었잖아요! 이건 아니죠.”
“흐움…… 하지만.”
아기 황녀님은 조그만 팔로 팔짱을 끼……려다가 실패했다. 팔이 짧아서였다.
아기 황녀님은 굴하지 않고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이 종도야 짐이 존생에 떤댕터에서 있울 때에 비하묜 천국이 아니겠나!”
아기 황녀님이 허리에 손을 얹고 껄껄껄, 웃었다. 자기 전쟁터에서는 열흘은 무슨, 50일도 넘게 옷을 갈아입지 못한 적도 있다면서.
아기 황녀님이 ‘라떼는~’을 시전하셨습니다.
황녀님 그거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이 총체적 난국을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
‘……아니, 그보다. 대체 왜 아기 황녀님 복지가 이따위인지부터 알아야겠는걸.’
분명 2황자는 아기 황녀님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직접 대면한 황제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그런 것 치고 여기 상태가 영 별로였다. 마치 원작의 초반부 같았다.
비록 다른 부분은 가물가물 하지만 이 소설 《제국의 아들 부잣집 막내딸》초반부만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숨어 살며, 먼 친척이라는 유모와 궁의 시종들에게 구박받는 아기 주인공. 그 상황이 지금과 딱 똑같은데.
“……그냥 제가 새 옷을 가져다드리면 안 되나요?”
“으움?”
아기 황녀님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마지못해 끄덕였다.
오동통한 뺨, 그 위로 분홍빛 눈동자. 시선엔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딸랑딸랑!
이때, 아기 황녀님이 종을 울렸다. 시녀를 부르는 종이었다.
그런데, 웬걸. 3분이 지나도 5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손님인 내가 당황할 만큼.
“크흠, 흠. 저, 황녀님 그 여기 사람 있는 거 맞아요?”
“웅? 웅. 있댜만?”
“그런데 왜 안 와요? 너무 늦지 않아요?”
“으웅? 이게 늦눈 건가?”
“네?”
“웅?”
내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아기 황녀님은 문을 등지고 앉아 있어서 내가 먼저 그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삐딱한 자세와 불만을 감추지 않은 표정이 아무리 봐도 황족을 대하는 시녀의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르셨나요?”
“식샤를 가져오거라. 손님이 왔우니.”
“네? 지금, 식사 시간이 아닌…… 데요?”
“아, 식사는 아직인가? 그롬 간식이라도 가져오고라.”
눈치를 아예 안 보는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뺀질뺀질한 모습을 보니, 전형적으로 누울 자리를 보고 발 뻗는 유형의 인간이다.
지금도 아기 황녀님이 그냥 넘어가는 것 같자, 귀찮다는 기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원작에서처럼 학대까지는 아닌 것 같았지만, 보고 있자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광경이었다.
허어?
하녀가 열린 문으로 나가고 사라지기 무섭게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황녀님!”
“웅? 왜 구론 얼굴이도냐? 메뚜기라도 씹운 얼굴이구나.”
“메뚜기를 왜 씹어요?”
“떼이잉, 나 때는 마리야, 먹울 게 업오소 흉작난 바테 나가소 자바목고 그래따!”
“……지금은 세 살이시잖아요!”
“그곤 그로치만 나 때눈……!”
“아니,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나는 눈을 크게 깜빡이며 숨을 삼켰다.
“지금 그 시녀요, 너무 무례했어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구요!”
“하하하, 괜챤타!”
껄껄껄, 웃는 아기 황녀님을 보면서 순간 아연함을 느꼈다.
이뿐 아니었다. 조금 뒤에 미세하게 띠꺼운 표정을 품은 시녀가 간식을 가져왔다.
하나 집어 입에 넣은 순간 나는 황녀님 앞이라는 것도 잊고 그대로 뱉을 뻔했다.
“읍?!”
혹시나 해서 남은 것들을 조금씩 잘라 맛보니 그 중 몇 개가 소태처럼 짰다. 아기 황녀님은 소금이 과했던 모양이라며 껄껄 웃으며 넘어갔다.
무슨 쿠키에 소금을 이렇게 넣는데? 미각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없지!
나는 깨달았다.
여기 있는 몇 안 되는 시녀와 시종들은 아기 황녀의 눈치를 보는 척 은근히 권위를 넘봤다. 심지어 이렇게 교묘하게 괴롭히는 이도 있을 정도로.
그런데 이 아기 황녀님은 이런 것들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이 종도면 적꾼에 비하면 애교 아니겠눈가! 껄껄.”
정작 본인이 이렇게 웃고 넘기는 것이었다. 심지어 괴롭힘이라는 자각도 희미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깨달았다. 아, 이거 이래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던 거구나!
모든 소설에는 기승전결이 있고, 도입부에는 이야기 전반부를 이끄는 갈등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소심한 아기 황녀님이 먼 친척들이나 못된 시종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이 여기 해당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발각되고 나서야 이 소설의 핵심인 폭군과 딸의 서사가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기 황녀님 본인이 첫 챕터에 해당하는 이 괴롭힘을 시련으로 여기지 않는다!
주인공이 첫 관문을 통과하기는커녕 그 근처에도 가지 않고 있으니 스토리가 제대로 진행될 리가.
설마, 그래서 오빠들이나 아빠와의 관계도 데면데면한 거였나?
원작에서와 다르게 아기 황녀님은 도움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위대한 전생을 기억함으로써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되어 버린 존재였다.
‘이거 단순히 아기 황녀님의 성격이 달라진 데서 오는 문제가 아니었잖아?’
그대로 두면 메인 갈등은 시작도 못 해 보게 생겼다.
내 역할은 이 소설을 최대한 원작에 가깝게 짜 맞추는 것. 그런데 이게 어려워진다?
그럼 나는 그대로 죽겠지?
안 돼!
이대로 두면 큰 문제가 될 게 분명했다.
얼마 전 호감도의 진실을 깨달으며, 메인 퀘스트의 맹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퀘스트(메인) - ‘아기 황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자!’
내용: 100일 내로 황가 사람들의 호감도를 90 이상 달성
보상: 건강 수치 +30, 다음 소설 힌트, ???, ???
실패 시: 사망]
주목할 건 ‘황가 사람들의 호감도를 90 이상 달성’하는 것.
황가 사람들 안에는 주인공 아기 황녀님도 포함된다.
고로 황가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가지는 호감도 90. 그리고 주인공 ‘아기 황녀’가 황가 사람들에게 가지는 호감도 90.
‘양쪽 모두’ 올려야 했다.
이미 주인공에게 애정을 가진 가족들에게 아기 황녀님의 호감도를 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주인공 아기 황녀님이 가족들에게 가진 호감도를 90 이상 달성해야 돼.’
다시 말해 이 퀘스트는 처음부터 주인공의 가족들이 아니라, ‘주인공’의 호감도를 겨냥한 임무였다.
이대로 둬선 안 된다.
그 순간이었다.
[요정이 감탄했어요! 역시 로판 고인물답게 통찰력이 대단하시네요! °˖✧◝(⁰▿⁰)◜✧˖°]
[요정은 놀랐습니다! 퀘스트 알람이 필요 없겠어요!]
요정의 창이 떠오른 동시에 나는 내가 방금 전까지 하던 생각이 고스란히 퀘스트 창에 뜬 걸 보았다.
[퀘스트(서브) - ‘아기 황녀님이 왜 이러실까?’
아기 황녀님이 아무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를 알아내고, 가족들을 향한 호감도를 5씩 높여 봅시다.
정해진 기간 내로 주인공이 가진 호감도를 높이지 못할 시, 건강 수치 -8
보상: 건강 수치 10, 스킬 획득
기한: D-10]
허어, 건강 수치 –8이면 그나마 양호하네.
이런 것에 기쁨을 느끼는 내가 싫다……. 그리고 지금이 이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도 아니다.
‘아무도 믿지 못한다, 라.’
이건 내가 이 아기 황녀님에게 느낀 감상과 같았다.
가족들과 사이가 요원하고 피한다는 건 믿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빈정거림과 괴롭힘을 유유히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은 기대가 없기 때문 아냐?
“…….”
나는 침묵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함께 쿠키를 먹고 있던 아기 황녀님은 어느새 창문 쪽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조그만 아이인데.
오동통한 뺨, 둥근 햄을 쏙쏙 붙여 둔 것 같은 팔과 앙증맞은 손. 눈처럼 하야면서도 끝에 하늘빛이 도는 살랑살랑 부드러운 머리카락까지.
이렇게 보면 순진해 보였고 순수해 보였으며 평화로워 보였다. 속 알맹이가 어떤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녀님.”
아기 황녀님은 무엇이 그리 즐거웠던 건지, 창문을 보며 눈을 깜빡이는 동시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꼬리가 귀엽게 올라가 있었다.
처음으로 잠시, 소설의 내용이 뒤틀려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용이 뒤틀리지 않았다면 이 귀엽고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아기 황녀님은 입에 담을 수 없는 학대에 시달리며, 불운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