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4화 (24/281)

◈24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18)

잠깐이었지만, 소설의 내용이 뒤틀려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보니, 나중에 올 행복을 위해 그전까지의 삶을 희생하고 불행에서 허우적거려야 하는 게 과연 더 나은 인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보고 계셨어요?”

“쩡원.”

“정원 좋아하세요?”

“…쪼아했었찌.”

과거형이었다. 가슴에서 희미한 슬픔이 느껴졌다. 엠버넷 씨의 슬픔이다. 지금 언급된 것이 과거의 이야기란 소리였다.

“황녀님, 저 이제 황녀님 놀이 친구잖아요.”

“구래.”

“놀라지 않으시네요?”

“허락이 무사히 떨어졌우니 이곳에 이께찌.”

“음, 너무 똑똑하신데. 저 좀 철딱서니 없는 소리 해도 돼요?”

“무순 얘긴데?”

아기 황녀님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고개를 한참 내리자 눈높이가 맞았다.

“제가 저택에 있을 때 여러 소문이 돌았는데, 그중에는…… 아기 황녀님이 발견될 즈음에 아주 나쁜 유모가 옆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론 쏘문도 돌았나?”

모르지 않는 눈치, 하지만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겠지. 내가 지어낸 얘기였으니까.

하녀들과 시종들이 아기 황녀님을 무시하고, 괴롭히는 건 비슷하다.

하지만 원작과 다른 것 중 하나. 초반부에서 아기 황녀님을 가장 많이 학대한 주범인, 먼 친척이라는 유모가 없다.

“그론 싸람이 있기눈 했찌. 눈을 뜨자마자 못 볼 꼴울 보았우니까.”

“…….”

“그 사람운…….”

아기 황녀님이 슬쩍 웃으며 딸랑이를 흔들어 보였다. 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아기 황녀님은 나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너눈 내 이룸을 알고 있나?”

“네.”

“말해 바.”

“유엘 래빗 비센요.”

래빗, 책 속에서는 토끼 같은 여주였다. 어째서인지 지금 내 앞엔 만렙 토끼가 앉아 계시지만.

나는 손을 뻗어 토끼 발처럼 보드랍고 조그만 손을 살포시 잡았다.

“유엘 래빗 비센 님. 저는 황녀님이 황녀님의 삶을 사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님, 아빠가 왜 마음에 안 들어요?’ 하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건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그게 ‘엠버넷’으로서 바라는 소원이에요. 어려우시다면 제가 도와드리고 싶구요.”

래빗은 의아할 정도로 아기다운 모습이 없었고 의식적으로 흉내조차 내려 하지 않는다. 아니, 더 나아가 ‘래빗’으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요정의 창은, 아기 황녀님이 전생을 기억하는 것에 대해 평범한 환생이 아니니 유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던 걸까?

“네가 왜?”

“이질적인 기억을 가진 사람은 그래요, 이방인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아기 황녀님의 손이 움찔했다.

“이제는 황녀님께서 지금 나이에 맞게 살아 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어요. 제 도움, 받아 주시면 안 될까요?”

“처움 만났울 때도 그론 얘기를 했찌.”

“네.”

“넌 왜인지 간절해 보인다.”

이번엔 내가 움찔할 차례였다.

“마나룰 다루면 따람의 진실과 거찟이 드료다보일 때가 있다. 너눈 진심이야.”

“음…… 맞아요.”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내 이룸울 다시 말해 바라.”

“유엘 래빗 비센 님.”

이렇게 말하고 나는 슬쩍 눈치를 봤다.

……‘이름’ 하니까 찔리는 게 있어서 말이지.

“으음……, 어. 진명을 불러 드릴까요?”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 봐도 진명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지, 나 모르는데.

“난 진묭 안 쪼아한다.”

“네?”

“비쎈 황족의 진묭에는 신비한 힘이 있찌.”

“아, 알아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신이 내린 ‘성스러운 힘’을 쓸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리제와 대화하면서 이 성스러운 힘이 진명과도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힘 때무네 내 나라가 패배했우니까.”

나는 입을 벌렸다. 아기 황녀님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봄꽃 같은 분홍빛을 품은 눈동자. 그 눈이 방싯 사랑스럽게 휘어졌다.

그러나 깊고도 투명한 눈빛 속에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슬픔이 비쳤다.

그게 더 슬퍼서 내 마음도 아팠다.

“엠버넷. 아니, 롤린. 너눈 나와 다루게 기억이 오략가략하눈 곤가?”

“아…….”

“아니면 몸이 약해소 기억됴 잃옷나?”

한편으로는 아연함을 느꼈다.

이 사람은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줄곧 이렇게 살아온 걸까?

당신은 누구에게도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모두와 단절되기 위해 애써온 건가요?

그건, 얼핏 완전해 보이지만 결국 더 외로워지는 길이 아닌가요?

“나눈 펠프스 제국의 황제여따, 엠버넷.”

내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애써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해도 그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저는 모르는데요…….

“비센과눈 적꾹이지.”

핑글핑글 흔들리던 눈동자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래소 나눈 적국에 태오나 적꾹 사람두룰 태연히 반길 수 업따. 가족으로는 더더욱.”

* * *

무슨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아가씨, 잘 돌아오셨어요?”

“응.”

“어어, 아가씨? 어디 가세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빠르게 발을 놀렸다.

“도서관!”

저택 내, 장서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곳. 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여기서 온갖 지식을 배웠다.

다만, 그때는 그리 열심히 배우지 않았다. 특히나 제국의 역사 같은 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황제 로아타의 이름을 기억한 건 우선 그 책 표지가 예뻤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 책을 펼치자마자 보이는 삽화가 아주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이었지.”

나는 빠르게 책을 읽어 내렸다. 외출용 망토도 벗지 않은 상태였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리고 필요한 부분을 다 읽었을 때는 시계의 시침이 한 칸 옮겨간 뒤였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담요며, 모락모락 김이 오른 찻잔이 놓여 있었다. 누가 놓고 간 줄도 몰랐네.

“끄응…….”

나는 책을 덮고 그대로 책 표지에 머리를 묻었다.

“아아악! 돌아 버리겠네!”

혹시 하녀가 문 앞에 서 있을까 봐 작게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황당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냐!

펠프스 제국.

한때 동쪽 대륙의 반을 차지해 왕국에서 제국으로서 이름을 바꾸고, 장장 40여년의 통치를 이어간 나라.

이 제국을 이끈 이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자 황제로 일컬어지는 ‘로아타’였다.

그러나 펠프스의 국운은 딱 거기까지였다. 황제 로아타는 말년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냈다. 의문의 불치병을 얻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로아타가 병석에 누운 뒤로 나라는 빠르게 망조의 길을 걸었다.

다음 대의 황제 탓은 아니었다. 그저 아주 강대한 나라가 새롭게 일어났을 뿐.

그게 바로 ‘비센 제국’이었다.

비센 제국은 신이 내려 준 신성한 힘을 통해 펠프스 제국의 영토를 먹어치웠다.

끝내 펠프스 제국은 제국이란 이름을 내려놓고 왕국으로 전락했다. 마지막 황제였던 이는 부단히 노력했지만 끝내 최후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현재는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져 이름만이 겨우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국의 최초이자 마지막 부흥기를 이끈 정복 황제 로아타.

한국으로 치면 거의 이순신 장군님만큼의 뛰어난 장군이자, 세종대왕님만큼 능력 있는 황제라 다른 나라의 교과서에도 등장할 정도였다.

불치병으로 병석에 누운 채 국운이 다해 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눈을 떴더니 자기 나라를 몰락시킨 적국에, 그것도 황녀로 환생했다?

이건 무슨…….

“소설 아니야?”

[요정이 여기는 소설이라고 알립니다! (ノ・∀・)ノ]

“시끄러워. 누가 그게 진짜 궁금하대?”

내 머릿속에는 아기 황녀님의 마지막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래소 나눈 적국에 태오나 적꾹 사람두룰 태연히 반길 수 업따. 가족으로는 더더욱.”

그래, 이런 거면 아기 황녀님의 엄청나게 낮은 호감도도 이해되었다. 얼굴조차 보기 싫어하는 이유까지 말이다.

사실 황녀님의 전생이 그냥 펠프스의 평민 1이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무려 황제였잖아. 거기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이순신 장군님만큼 대단한 사람이었고.

“으으음…….”

근데 가만 보니 이것들 최종 목표가 설마 나 죽이는 거 아냐? 누가 순순히 죽을 줄 알고! 우리 엄마 말씀 중에 사람 그냥 죽으라는 법 없다고 했거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제 적을 알았으니, 해결책만 찾으면 된다. 아니겠어?”

나는 턱을 짚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하녀들이 놓고 간 쿠키를 열심히 우물거리면서. 역시 달다구리한 게 들어가니 머리가 좀 더 잘 돌아가는 느낌이군.

음, 그래. ……이런 방식은 어떨까?

* * *

“창공의 날개에 안식의 숨결을. 위대한 날개는 패배하지 않을 터이니.”

다음날 정오, 나는 저택에서가 아닌 황성에서 점심을 맞이했다.

나를 가만히 보던 인물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알았냐고?

미묘한 압박이 느껴졌으니까.

“……날개에 앉은 영광이 그대를 가호하길 바라지.”

그 뒤로 이어진 차갑고 냉정한 명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어제보다 더 광기 어린 시선을 띤 황제가 앉아 있었다.

그랬다. 여긴 어제와 똑같은 알현실이었다. 이렇게 쉽게 만나 줄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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