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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5화 (25/281)

◈25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19)

오전에 황성에 연통을 넣고 황제를 뵙길 청했으나, 무려 황제다 보니 며칠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답이 오지 않으면 바로 아기 황녀님을 찾아가려 했는데……. 웬걸? 두 시간 만에 답이 왔다. 황제가 나를 만나 주기로 했다는 답신이었다.

“짐을 보겠다고 했다지?”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청이라면 영애의 거취를 다시 생각하게 될 터다.”

“…….”

꼭 한마디 주옥같은 협박을 남기셔야 하나요? 참된 폭군의 자세시네요.

폭군의 옆에는 어쩐 일인지 반갑고도 불편한 얼굴, 2황자가 서 있었다.

옆에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온유한 느낌이 드는 남자는 전에 얼핏 보았던 황태자인 듯했다.

“다름 아니라 서신에서 아뢰었듯이 황녀님의 교육에 관해 이야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폐하.”

“교육?”

“예, 제가 놀이 친구라고는 하나 정말 황녀님의 또래는 아니기에 밤새 황녀님께 약소하나마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밤샘으로 인해 지나친 피로감을 느낍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ಡ︷ಡ) 현재 건강 수치: 26]

지금 내 얼굴은 아주 설득력 있는 상태일 것이었다. 왜냐, 진짜로 밤을 샜거든.

물론 황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 어쩌고 했던 말과는 다르게 ‘로아타’ 황제에 대한 기록을 싹 다 읽어 보느라 잠을 못 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기 황녀님 이야기를 꺼내자, 차갑고 서늘하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풀리는 게 보였다.

“구술해 보도록.”

“예, 황제 폐하. 우선 외람되지만 아이 교육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실까요?”

“뭐?”

“바로 ‘환경’입니다.”

쾅! 황제가 의자 손잡이를 내려쳤다.

떨어지는 손잡이를 보며 나는 우뚝 멈칫했다. 황제가 이를 갈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환경이라는 말을 꺼낸 것은, 황녀를 궁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냐?”

“갑, 갑자기 황녀를 옮긴다뇨?”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진실을 말해야 할 것이야.”

“아니, 아닙니다. 저는 그저 황녀님 주변을 싹 갈아 치워달라는 간청을……!”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밤새 고민한 말을 다 마치지도 못했다.

그랬다. 밤새 고민한 끝에 내가 결정한 건, 클리셰를 조금 색다르게 이용하자! 였다.

아기만 애교 부리라는 법 있냐? 구시대는 가라! 폭군 아빠가 아양을 떠는 시대가 왔나니!

나쁜 하녀들을 치우고 폭군 쪽에서 접근할 수 있게 관계를 개선해보려 한 건데…….

이가 딱딱 떨렸다.

“그 뜻이 아니라면, 환경 문제를 왜 거론한 게냐?”

다행히 황제는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이때를 놓칠세라 얼른 말했다.

“현재 황녀님 거처에 있는 모든 이들이 황녀님께 악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육아물 소설의 도입부란 아기 주인공을 괴롭히는 나쁜 주변 인물! 아빠와 오빠가 얘를 해치우고 시원한 사이다를 먹여준다! 그리고 모두가 날 사랑해 루트로 간다!

“그곳의 시녀가 황녀님을 모욕했습니다.”

제국의 신이시여, 정의로운 일름보가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아기 황녀님이 하지 않으면 내가 한다! 폭군 폐하께 모두 고해바치자!

“황녀님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물론, 황녀님께서 드실 쿠키에 소금을 탔습니다.”

“근거는?”

“제가 직접 먹었습니다!”

나는 황녀의 거처에서 본 것들을 낱낱이 고했다. 사실 소금 쿠키처럼 소박한 수준을 넘어서, 바늘이 꽂힌 옷같이 심각한 괴롭힘도 있었다. 아무리 아기 황녀님이 본인은 괜찮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것들.

나는 잠시 후, 이틀 연속으로 알현실 바닥이 부서지고 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하나는 폭군이요 다른 하나는 오빠들의 작품이었다.

바닥을 거하게 부숴버린 폭군이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영애, 그대가 한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할 것이다.”

“……거짓은 저, 전혀 없습니다.”

움찔, 나를 향한 분노가 아님에도 등골이 오싹했다.

“하나, 영애에게 이런 감사의 임무까지 주어지진 않았을 터인데 굳이 짐을 찾아와서 고하는 까닭은?”

그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죠.

“황녀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을 테니까요.”

저는 우리 아기 황녀님이 움직이지 않으면 사망할 운명이니, 폭군께서 제발 좀 나서 주십쇼.

기왕이면 아기 황녀님께 애교까지 부려서 호감도도 좀 얻어 주시고요.

“저는 어린 시절 병약했던 탓에 그리 행복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모든 어린아이들이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길 바랍니다.”

나는 잠시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비록 고작 두 번 뵌 것이 다지만…… 황녀님께서는 아주 사랑스러운 분이시라 제가 본 아이 중에 가장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이건 진심이었다. 기왕 뒤틀어진 내용, 초반부의 불행은 피했다 치고, 남은 삶은 행복했으면 좋겠다. 원작처럼.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는 건 스스로에게 가혹한 일이니까.

[요정이 빙의자 님이 물건을 파는 사람이었다면 당장 5개쯤 구매했을 거라며 감탄하고 있어요! ╭( ・ㅂ・)و )))]

닥쳐, 요정 놈아.

[스킬 ‘사기꾼의 혀(lv.1)’를 획득합니다!]

……이놈이 진짜?

[일반 스킬 - 사기꾼의 혀(lv.1)

등급: 노멀(-)

사용자의 긴장을 완화하고, 떨림을 가라앉히며 말솜씨를 평소의 1.5배 향상시켜 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입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설득에 큰 도움이 될지도?]

아이고! 요정님. 제가 말씀드렸습니까? 감사하다고. 감사합니다, 굽신굽신.

후, 말 잘했다, 나. 내가 속으로 흐뭇하게 웃는 순간이었다.

“황녀 거처에 머무르는 시종과 하녀들을 모조리 몰살시켜라!”

내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

“황녀에게 말을 함부로 한 자는 찾아서 혀를 자르고, 소금을 뿌린 자는 손을……”

“잠시만요!”

잠시만요, 잠시만!

“폐하, 제 말씀을 한 번만 들어주세요!”

“뭐지?”

다행스럽게도 황제가 알현실에 있던 기사들에게 명을 완성하기 전에 멈춰 세울 수 있었다.

“가, 감히 청하건대 그 명령을 거둬 주세요, 폐, 폐하!”

“……이유를 말하라.”

천만다행으로 황제는 내 말을 무시하는 대신 잠시나마 들어주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정서에 좋지 않습니다!”

아기 황녀님 정서에 안 좋아. 안 좋다고요! 그리고 폐하와 아기 황녀님 관계에도 좋지 않을 거예요!

그동안 아기 황녀님이 왜 자신 주변의 일들을 그냥 두었을지 고민해 봤다.

“이 종도면 적꾼에 비하면 애교 아니겠눈가! 껄껄.”

그건 자신이 참아 줄 수 있는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폭군 황제가 거처의 하녀들을 몰살시킨다면?

당연히 황제를 향한 호감도가 더 내려가겠지!

그리고 퀘스트에 실패한 난 사망하겠죠!

폭군과 아기 황녀님이 가까워지기 위해선 절대 이런 식의 접근은 안 된다.

원작의 아기 황녀님은 폭군의 이런 행동을 단순히 두려워했다면, 이 세계의 황녀는 아예 그를 극혐하게 되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지도 모르니까!

막는 이유는 원작과 달랐으나, 이를 막아야 하는 게 원작으로 가는 길이었다.

“황녀님의 정서에 좋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지금 내 딸을 괴롭힌 놈들을 그대로 거처에 두란 말인가?”

“히익, 아, 아뇨! 시종을 교체하는 것에는 찬성입니다. 아니라면 어찌 말씀드렸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그 눈빛부터 좀 거둬 주시면 안 될까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예?

“다만 나중에라도 이 사실을 황녀님께서 알게 되신다면 좋지 않을 것 같아…….”

“비밀을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황녀님께서 영원히 모르시리라 생각하십니까?”

“…….”

차갑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그래서 할 말이 뭐냐는 의미 같았다.

“시종이 몰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면 폐하를 두려워하실지도 모릅니다.”

일단 원작은 이랬지만. 나는 고민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스킬 ‘사기꾼의 혀(lv.1)’가 활성화됩니다!]

“설사 두려워하지는 않으시더라도, 황녀님께서 추후 성장하시면서 이 일을 알게 되신다면……. 폐하를 머, 멀리하실지도 모릅니다.”

“건방진 말이로군.”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저도 이리 뛰어도 죽고 저리 뛰어도 죽을 것 같아서 애를 쓰는 거란 말입니다.

“…….”

폭군은 오래도록 지그시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표정이 저래서는 그냥 무표정인지 노려보는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식은땀이 손바닥과 등을 축축하게 적실 즈음 폭군이 고개를 돌렸다.

“물러나라.”

기사들이 빠르게 인사를 올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단, 지금 당장 황녀의 거처에서 모든 시종들을 몰아내도록. 마법을 써도 좋다!”

“예!”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참고 있던 숨이 탁 터져 나왔다.

명을 내린 뒤 폭군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늘한 눈이 내게 닿기 무섭게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이었다.

“흥미롭군. 이래서야 놀이 친구가 아니라 훈육 교사라도 들인 것 같으니.”

“…….”

“하긴 영애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쪽이 더 바람직할 터.”

고개를 들라, 하는 말에 나는 얼른 시선을 들었다. 황제의 얼굴로 의미 없는 가벼운 웃음이 스쳤다.

“좋다, 허하겠다.”

“……네?”

“영애를 그리 여기겠단 소리다.”

“그것은…….”

“앞으로 짐에게 감히 이딴 조언을 지껄여도 좋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본능적으로 이게 끝이 아니란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판단이 언제나 옳길 바라야 할 것이다.”

[서브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퀘스트(서브) - ‘눈떠 보니 내가 폭군 의 딸의 유모?!’

대단합니다! 폭군을 설득한 당신!

폭군은 당신을 미세하게 신뢰합니다.

아기 황녀님 옆에 둘 유모로 임명하고자 합니다.

받아들일 시, 1. 단기 유모직 2. ‘주인공(아기 황녀)의 ‘황제(폭군)’를 향한 호감도 상승 +25

※단, 위 퀘스트는 폭군의 심기를 거스를 시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오릅니다!

기한: 메인 퀘스트 종료까지(D-98)]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N]

……이거 완전 양날의 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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