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20)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주인공(아기 황녀)의 ‘황제(폭군)’를 향한 호감도 +25!]
으음, 그래도 다른 서브 퀘스트 조건은 하나 달성했다.
그런데 퀘스트 조건이라고 해도 그렇지, 갑자기 아기 황녀님의 호감도는 왜 오른 거지? 그것도 폭군을 향한 호감도가?
[‘주인공(아기 황녀)’은 시비를 걸던 하녀가 갑자기 사라져서 속이 시원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 ◝(・ω・)◟ ⁾⁾]
[‘주인공(아기 황녀)’은 ‘황제(폭군)’의 명으로 나타난 마법사가 시녀와 시종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보았어요!]
아, 명이 벌써 황녀궁에 닿아서 그랬구나.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마지막 마무리가 떨어졌다.
“그대를 황녀의 유모로 임명하지.”
“가문의 영광입니다.”
“물러나도록.”
용건이 끝나자, 황제는 나를 깔끔하게 쫓아냈다.
* * *
“온실을 수호하는 가문의 딸, 달린 에스테에 대한 소문은 폐하께서도 들으셨을 겁니다.”
달린 에스테가 알현실을 완전히 나갔을 때. 황제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는 달린 에스테가 인사를 올린 뒤로 쭉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으로 누군가 말없이 다가왔다.
“아버지.”
2황자 라이칸 포르 비센이었다.
“어제와 같은 소릴 하는군.”
“어제는 제 얘길 제대로 안 들으셨잖습니까.”
“들었다.”
2황자의 시선이 조금 전 닫힌 알현실의 문을 향했다.
비틀거리며 사라지던 뒷모습, 그리고 하얗게 질린 낯으로 자신을 보던 얼굴까지.
어제의 일이었지만 아직 생생했다.
색이 연한 분홍빛 머리, 마찬가지로 엷은 색소의 눈동자. 미인이었지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인상이 흐릿했다.
비유하자면 금방이라도 뚝 꺾일 장미같이 건강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였다. 모든 기술이 발달한 제국 내에서도 분홍 장미는 피우기 몹시도 까다롭고 연약한 품종이었다.
가는 손가락. 덜덜 떨리던 가냘픈 어깨. 톡 치면 그대로 날아갈 것 같던 몸의 어디에서 감히 황제를 상대로 할 말 다 하는 기개가 나오는 건지.
그 영애는 확실히 기묘했다.
자신에게 엉뚱한 소릴 하는 것부터 시작해, 황제의 분노를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살아남았으며, 지금까지 그 누구도 다가가지 못했던 제 여동생의 곁을 쉽사리 차지했다.
‘이러다 그 영애의 수명이 더 줄어드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달린 에스테, 에스테 백작가 영애가 불치병을 앓는 사실은 유명했다.
자산가였던 백작가가 지금처럼 몰락한 데에는 딸을 치료하기 위해 막대한 치료비가 들었던 탓이었으니까.
황실의 문장에는 장미가 들어간다. 하얀 장미 네 송이와 한가운데 자리잡은 붉은 장미.
매일 같이 장미를 보아서일까, 그는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항상 장미로 생각이 흘렀다.
2황자는 어째서인지 오래도록 여리고 창백한 얼굴을 지우지 못했다. 자신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평생을 무심히 살아온 그는 초봄처럼 슬그머니 다가온 감정의 씨앗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그놈은 비센의 황제룰 닮아따.”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기 황녀님의 말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깐의 버퍼링을 겪은 뒤에야 말뜻을 알아들은 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저어, 지금 말씀하신 ‘그놈’…… 도 비센의 황제신데요?”
여기서 ‘그놈’이란 방금 내가 알현하고 온 황제를 말했다. 그랬다. 이 아기 황녀님이 자기 아빠를 지칭하는 호칭 되시겠다.
“이론, 이해력이 떨어지눈구나, 롤린아.”
“롤린 아니고 달린입니다.”
“구래, 달리야. 내가 말하눈 황제는 내가 살아 있울 쩍의 비센 황제 노믈 말하눈 고다.”
……저기요 황녀님, 제 이름 제대로 불러줄 생각이 아예 없으신 거죠?
나는 끙,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말을 이었다.
“알아요. ‘프리히 호엔로헤 비센’을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흐웅, 어제까진 너와 내 나라도 기억하지 못하더니. 기억난 고냐?”
“음, 공부했죠.”
황제를 향한 아기 황녀님의 호감도가 왜 그리 유난히 낮나 했더니,
애석하게도 과거의 비센 황제, 즉 아기 황녀님의 펠프스 제국을 왕국으로 만든 장본인, ‘프리히 호엔로헤 비센’ 황제가……
지금의 황제와 아주 똑같이 생겼단다.
물론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지만 엄청 비슷한 모양이다.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아기 황녀님이 표정을 마구 찌푸릴 만큼.
물론 그 모습은 몹시도 귀여웠다. 뺨을 부풀리기도 했는데 한번 콕 찔러 보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음, 여기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지적해 봤자 내 입만 아프겠지. 아기 황녀님도 이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닐 테니.
눈을 떴는데 처음 보는 아빠가 내가 제일 미워하던 놈이랑 똑같이 생겼으면 나라도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은 의문이 하나 풀린 것만으로 아쉬운 대로 만족하기로 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아니겠어, 암.
그나저나 오빠들은 황제와 똑같이 생기지 않아서 얼굴은 마주하는 건가?
황태자와 2황자를 모두 보았는데, 확실히 미남이라는 것만 빼면 서로 다르게 생기기는 했다.
음, 잠시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오빠는 세 명 아니었나?
“황녀님.”
나는 일단 아기 황녀님의 손을 꼬옥 잡았다.
“어제 황녀님의 이름을 말씀해 보라고 하셔서 이야기했었잖아요.”
“구랬지?”
“그럼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머?”
난 생긋 웃었다. 저택에서는 내가 이렇게 웃으면 다들 끙끙대면서도 결국 부탁을 들어주곤 했다.
“이름요. 사람이 친해지고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게 첫걸음이래요.”
“……내가 너룰 롤린이라 부르는 것초롬 말이더냐.”
“롤린 아니라니까 정말……. 네, 그렇죠! 맞죠!”
아기 황녀님이 한 손으로 딸랑이를 흔들길래 얼른 정정했다. 물론 날 겁주려고 한 건 아니고 무의식중에 잡은 것 같았지만, 몸으로 익힌 기억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맞다. 나 쫄았다.
아기 황녀님은 나를 한참 쳐다보다가 눈을 깔았다.
의도하지 않게 그 모습은 아기 황녀님이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래빗이라 불로라.”
아기 황녀님이 작은 소리로 내놓은 답변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중간이름은…….”
“안다, 가까운 이둘에게 허락하눈 것 아니더냐.”
여전히 쑥스러움 같은 감정과는 거리가 먼 말투였다.
그러나 왜일까. 발그레 물든 얼굴이나, 장미색으로 물든 귀까지. 조그만 황녀님의 얼굴 위로 예쁜 빨간색 꽃이 핀 것 같았다.
“너눈 내 유일한 수하니까, 자격이 이따.”
“아……. 황녀님, 의외로 이런 부분에 약하시군요?”
“모야?”
아기 황녀님이 내 손에 얹은 손을 떼려 했다. 나는 얼른 아기 황녀님의 손을 마주 잡았다.
“감사해요, 래빗 황녀님.”
“……모가 말이더냐.”
“전생에도 지금도, 저를 수하로 받아 주셔서요.”
“크훔훔, 당욘한 소릴…….”
제 안의 엠버넷 씨도 기뻐하고 계시네요. 나는 심장 안쪽에서 꼼지락대는 희미한 기쁨을 느끼며 웃었다.
“그럼 래빗 황녀님, 앞으로는 제 부탁 들어주실 거죠?”
“부탁?”
“네, 황녀님의 나이에 맞게 살아가시는 걸 도와드리기로 했잖아요.”
“나눈 수락하지 않아써.”
“허락 안 하실 거예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봤다. 그러다 눈을 깔았다.
“저는 자격이 없나요?”
“아, 아라따. 아라따!”
조금 전처럼 웃음으로 안 될 때 써먹는 방법이었다.
어째서인지 눈을 이렇게 깔면 그 파올로조차도 한숨 한 번 내쉰 뒤 부탁을 들어주더라고.
“헤헤, 감사해요.”
좋아, 당사자의 허락도 얻었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아기 황녀님이 ‘친해지길 바래’ 작전을 수행할 때였다.
하지만 우선은 그전에 알아볼 것이 있었다.
“저기 래빗 황녀님. 혹시 이렇게 한번 해보시겠어요?”
“이로케?”
나는 내 뺨에 콕 검지를 찍었다.
아기 황녀님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 행동을 따라서 조그만 손으로 자기 뺨을…….
콕 찔렀다.
으윽, 너무 귀여워! 귀여워!
내가 얼른 나머지 손도 뺨을 콕 찍자, 황녀도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따라 했다.
“이건 몬가? 암호나 비밀 신호 같은 곤가?”
“네, 신호요……. 제 심장이 못 버티겠다는 신호…….”
“우응?”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황녀님 지금 기분 나쁘시지는 않죠?”
“떤혀?”
일단 이런 귀여운 행동에 딱히 거부감은 없어 보였다.
아기 황녀님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시켜 본 건데, 거부감은커녕 애교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예 이게 뭔지도 모르는 눈치니까.
음, 좋아. 체크해 두자, 원작의 아기 황녀님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사실 이야기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이 아기 황녀님의 성격이나 모습이 원작에 가까워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일단 이걸 예쁜 짓이라 부르도록 해요.”
“예뿐 짓? 이게 왜 예뿐 짓인가?”
“다른 사람한테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게 아니고, 쉽게 사람을 현혹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아기 황녀님이 갸웃했다.
“그게 무순 행위인 고지?”
“으음, 전생에선 이런 행동을 보신 적 없으세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아기 황녀님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간략하게 설명했다. 애교란 건 다른 사람들에게 귀엽게 보이기 위해 취하는 태도라고.
나 역시 애교라는 단어의 의미만 알고 있었을 뿐 실제 생활에서는 거리가 멀었던 티가 났다.
어쨌든 나는 지금 이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깊이 박힌 의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무슨 이유가 있든 간에 황제나 오빠들 모두 이 아이를 학대가 벌어지던 열악한 환경에 방치한 사람들 아닌가.
그런 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기 황녀님에게 이런 행동까지 가르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