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21)
그때 내 상념을 방해하기라도 하듯 요정이 메시지를 보냈다.
[요정이 너무 많은 생각은 때로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조언해요! (⸝⸝⸝ᵒ̴̶̷̥́ ⌑ ᵒ̴̶̷̣̥̀⸝⸝⸝)]
음, 그렇지. 일단 나의 최우선 목표는 생존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이 남았다.
“흐움…….”
래빗은 나를 한참 보더니, 약간의 시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표정이었다.
“구래, 너눈 미인이었지.”
“네? 어, 감사합니다? 근데 이건 저 말고 황녀님이 하시는 게 더 효과적일걸요.”
“어째소지?”
“황녀님, 개가 귀엽나요, 강아지가 귀엽나요?”
“강아지지?”
“고양이가 귀엽나요, 아기 고양이가 귀엽나요?”
“아기 고양이 아닌가?”
“네, 바로 그겁니다. 이건 시전자가 작을수록 더 효과적인 기술이에요.”
“그론가.”
래빗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짧은 팔로 턱을 괴며 끄응 작게 신음을 흘린다.
바로 그런 모습이 상대의 심장에 치명적이라는 걸 본인은 모르겠지.
“이게 왜 필요한고지?”
“황녀님께서는 지금 아기시잖아요. 그러니까 좀 더 아기의 생태, 아기의 행동 양식을 탐구해 보자, 이런 이야기죠.”
[스킬 ‘사기꾼의 혀(lv.1)’가 활성화됩니다!]
나는 찝찝함은 밀어두고 수능 1타 강사처럼 검지를 들어 올렸다.
저를 믿으세요, 황녀님. 하버드 애교학과 수석으로 넣어 드리겠습니다.
적국의 황제에게 애교를 부리는 로아타 황제라니, 상상도 안 됐지만 그래도 혹시 황제를 좀 더 아빠로 보게 된다면…….
아니, 아빠가 아니라 오빠들이라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지 않으려나.
“흐움, 일리가 없눈 건 아니군.”
“그죠? 그죠?”
“구래. 나도 언제까지고 과거만 답숩하고 살 순 없우니.”
래빗이 나를 빤히 보았다.
“네게소 엠버넷의 모숩이 희미한 것처럼. 나도 때로운 삶에선 새 모숩으로 사는 것도 나뿌지 않게찌.”
“…….”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어떤 말을 찾는 대신 그냥 웃었다.
지금 래빗이 느끼는 기분은 세상에서 오직 래빗 자신만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잘 부탁한댜.”
“네!”
[‘주인공(아기 황녀)’의 호감도가 소폭 올랐어요. °˖✧◝(⁰▿⁰)◜✧˖°]
‘아, 이건 날 향한 호감도가 오른 건가?’
[요정은 그렇다고 답해요!]
‘뭐야, 이건 왜 대답해 줘?’
[요정이 고개를 갸웃해요.]
[요정은 빙의자 님이 물어보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다고 말해요. (੭ु。╹▿╹。)੭ु⁾⁾]
나는 저 말의 진의를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꼭 알아야 하는 정보가 있어도 내가 눈치채지 못하면 그대로 내버려 두겠다는 소린가.
‘결정적인 단서를 눈치채지 못하고 퀘스트에 실패해서 죽더라도 말이지…….’
이 요정, 도대체 정체가 뭐지. 일단 나도 내 감정을 전부 드러내는 건 삼가야겠어.
[요정이 빙의자 님을 보며 웃습니다.]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저 XX를 당장 잡아 족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렀다.
대신 한층 깊어진 불신과 함께 저것의 정체를 꼭 알아내고 말리라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어쨌든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할 때였다.
예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 듯했다. 래빗이 새 모습에 적응하기로 마음먹었다니.
그럼 이제 가족들에 대한 꺼림칙함부터…….
“래빗 황녀님, 저…….”
그때였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기 황녀님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우리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깨진 창문이었다. 그리고 유리 파편으로 엉망이 된 바닥에는…….
“돌?”
돌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이게 뭐야. 세상에, 감히 황녀가 기거하는 궁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고? 그것도 정확히 황녀가 있는 곳을 향해?
말도 안 돼. 대체 누가 황녀 거처에 저런 짓을 한단 말이야?
얼마 되지 않는 원작의 기억을 뒤졌지만 이런 사건은 없었다. 서술되지 않았거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악, 진짜! 능력을 줄 거면 기억력 보정 같은 능력이나 줄 것이지!
[요정이 슬퍼해요.]
[요정이 그건 줄 수 없다고 말해요. (╥╯^╰╥)]
[요정이 빙의자 님의 기억력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조용히 해, 이 소름 끼치는 자식아. 내가 본 책 빙의 주인공들은 잘만 기억했거든?
나는 구시렁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돌에 주목했다.
“래빗 황녀님, 저건 대체…….”
“내버려 도.”
“네? 이건 황…….”
황제 폐하에게 아뢰라고 하려다 꾹 참았다. 그래, 황제는 몰라도 2황자랑은 이야기 정도는 나누는 것 같았지?
“황자 전하께라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모하러.”
뭔가 이상했다. 래빗은 돌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지나치게 태연한 모습이 마치 이 상황이 한 번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였다.
……한 번이 아니라고? 설마 누군가에게 괴롭힘당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황녀가 얌전히 당하고 있을 성격은…….
아니지, 혹시 소금 쿠키 때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눈치를 보아 정답인 것 같았다.
“혹시 래빗 황녀님…… 범인을 알고 계세요?”
“웅, 알고 이따.”
“네?”
“알고 있우니 신경 쑤지 마라.”
아니나 다를까 무신경한 대답이 돌아왔다.
껄껄껄, 아저씨 웃음만 터뜨리지 않았을 뿐 내가 낡은 옷을 지적했던 때나 하녀들의 만행을 지적했을 때와 같이 무심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끄응, 이 황녀님은 대체 자기 안위에 왜 이리 관심이 없어.
물론 지금도 래빗의 손에 들려 있는 무시무시한 검기 어린 딸랑이를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었으나, 어쨌거나 지금 래빗은 어린아이였다. 그것도 아기에 가까운.
“그냥 두셔도 될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다치실 수도 있었잖아요.”
“웅? 무서옸나? 걱뎡하지 마라. 너눈 내가 지켜줄 쑤 있우니.”
“아, 그건 감사해요. 아니, 아니지, 원래는 제가 지켜드려야 하는 건데.”
“너눈 너무 연약해 보여.”
“끙, 그건 저도 잘 알고요. 제 말은 겉보기엔 래빗 황녀님보다 제가 어른이잖아요. 이런 건 어른이 해결해야 하는 거라구요!”
“배가 고푸군.”
“저기요, 듣고 계세요?”
래빗이 젖살이 오동통한 얼굴을 갸웃했다.
“하녀둘이 모두 사랴졌우니 밥운 알아소 해굘해야겠군.”
찔리는 구석이 있어 나는 대답하려다 말고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히 내 얼굴을 보지 못한 래빗은 홀로 머리를 이리저리 기울일 뿐이었다.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저기, 황녀님……? 제 말씀 못 들으셨나요?”
“나눈 툭 치면 쓰러지눈 사람의 말운 듣지 않는다.”
“툭 치면 쓰러진다뇨! 그 정도는-”
“아닌가?”
커다랗고 동그란 분홍색 눈망울이 나를 향했다.
“그 정도는 아니…… 아니! 아니……!”
“……라는 말은 못 하게찌?”
“……네.”
우리의 첫 만남 때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솔직히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 잠깐만.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그래서 이 일을 저지른 사람이 누군데요?”
“신경 쑤지 않아도 된다.”
“안 돼요. 이거 돌이잖아요, 위험해요. 아무리 래빗 황녀님께서 강하시다지만 이건 어디서 날아온 건지도 모르고, 너무 위험하잖아요.”
래빗은 윙크하듯 눈을 찡그리다가 나를 보다가 조그만 어깨를 으쓱했다.
“2황자나 그놈에게 말햐지 않눈다면 이야기해 줄 수도 있고.”
“그놈이 아니라 폐…… 아니, 예, 그놈님께도 이야기 안 할게요.”
“됴아.”
래빗이 드디어 딸랑이를 내렸다. 나는 가슴을 슬쩍 쓸어내렸다. 아, 이제 저 딸랑이만 보면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아.
“돌을 던진 놈운 3황자다.”
“그렇군요오…… 가 아니라, 네?”
마침내 듣게 된 대답은 산뜻했다. 그리고 나를 또다시 당황하게 했다.
“몰 놀라나? 내 위로 사내 셋이 있눈 건 알 텐데?”
“사내가 아니라 오빠 아니고요?”
“그로케 불리기도 하지.”
“아니, 왜 남 일처럼 말씀하세요. 그보다 3황자님이 돌을 던지시는 거라고요? 황녀님 거처에?”
원작에 세 명의 오빠가 나오는 건 맞다. 다만 각각의 캐릭터가 뚜렷하게 떠오르는 건 아니어서, 내가 가진 세 명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들을 육아물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 유형과 비교해 대충 어떤 성격일지 짐작할 따름이었다.
아니, 대략 기억나는 게 있는 것도 같은데. 셋째는 살짝 악동 느낌의 캐릭터 아니었나?
둘째가 남에게는 지나치게 차갑고 까칠하고 여동생에게만 다정했다면, 셋째는 사람 상대하는 법을 잘못 배운 초딩 같은 느낌이었다. 왜, 좋아하면 괴롭히고 보는 애들 말이다.
또래 친구같이 투덕거리다가 결국은 여동생을 아껴 주는 인물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런 좋은 오빠가 여동생 방에 돌을 던질 리는 없다. 이건 확실했다.
“……이건 좀 안 좋은데.”
이렇게 중얼거리며 창문을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깨진 창문 사이로 삐죽 얼굴을 내민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맑은 하늘만큼이나 신비로운 하늘색 머리. 짙은 녹색 눈동자. 차가운 인상이지만 어딘가 여린 구석이 있는, 빼어난 미소년이었다.
무엇보다 머리와 눈동자색의 조합이 무척 익숙했고 말이다.
내 팔목에 걸린 팔찌가 기다렸다는 듯 빛을 발했다.
[주요 인물(주연) ‘3황자(셋째 오빠)’가 빙의자 님께 적의를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