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23)
나는 눈으로 빠르게 아이를 훑어 다치지 않은 걸 확인했다. 손수건을 묶지 않은 손으로 뺨을 긁적이다가 하하, 웃었다.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황자님.”
그러자 3황자의 작은 어깨가 한 번 더 움찔했다.
“XX! 시키지도 않은 짓으로 다쳐서는, 유, 유세 떠는 거야!?”
“네? 제가 멋대로 행동했다가 다친 건데요.”
“뭐, 뭐?”
“저도 바보같이 행동하다 바보같이 다친 거죠. 그래도 창틀에 매달리신 건 위험했어요. 아래에 유리 조각이 있었다구요.”
“멍청하긴, 나는 그딴 거에 다치지 않아.”
“아하, 그렇구나. 솔방울로 수류탄도 만드시겠어요.”
“뭐?”
“아주 대단하시단 뜻이에요.”
나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
오, 워낙 인형처럼 생겨서 그런지 툴툴거리는 것조차 귀엽게 보였다고 해야 할까.
꼬마 3황자님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래빗이 내 어깨를 잡은 채 가로막고 섰다.
“건두리지 마라, 내 슈하다.”
“뭐? 무슨 개소리야. 건드리긴 누가 건드린다고…….”
“네 눈비치 불손해.”
“부, 불 뭐?”
3황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래빗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3황자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뵤다, 내가 여기 나타나지 말라고 했울텐뎨?”
“……이익.”
잠시 수그러드는 듯하던 꼬마 3황자님이 씩씩대며 주먹을 쥐었다.
“여, 여기가 네 땅이냐! 착각하지 마! 여긴 다 아버지 거야!”
“그 황제가 나한테 쥰 곳이 이 궁이지.”
“나, 나도 여기 들어갈 수 있거든?”
그런 3황자를 쳐다보던 래빗이 돌연 허리에 양손을 얹고 껄껄껄 웃었다.
“기개만은 사내답구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기 황녀님 진짜 그 아재 웃음 좀 제발.
웃음을 딱 그친 래빗이 잠시 물끄러미 꼬마 3황자를 보았다.
그 순간 세상 당당하던 꼬마 3황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누가 봐도 명백히 겁먹은 얼굴이었다.
“내가 지냔번에 제대로 경고를 한 것 같운데. 이렇게 다시 나탸난 곤, 각오를 했댜눈 거게찌?”
“익, 너, 넌…….”
어째서인지 꼬마 3황자님은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귀엽고 섬세한 얼굴에 서러움이 스쳤다.
“넌 왜 그렇게 우리를 싫어해!”
음, 둘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요정의 창이 보여주었던, 마이너스로 가득했던 호감도 창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보았던 마이너스 가득했던 호감도 창이 아기 황녀님이 가진 감정이었단 사실도 알았다.
아기 황녀님의 처우에 대해 고했을 때 황제와 두 오빠들이 보였던 반응도 잇달아 떠올랐다.
네 명 중 가장 어리고 서툰 만큼 3황자는 제일 정직하고 순수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게 당연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하하하, 노답이군!
근본적인 해결책은 결국 하나뿐이다. 래빗이 품은 낡고 고루한 감정의 골을 메우는 것.
이 감정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것이다.
결국 난 십수 년 이상을 쌓아온 걸 해결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주어진 시간은 겨우 100일뿐이네?
역시 노답이다, 젠장.
……하지만 해결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
나는 한 곳에 시선을 주었다.
“자자, 싸우지들 마세요. 싸우면 나쁜 어린이예요.”
“무슨 건방진 소리야? XX. 너, 저건 왜 데리고 있는 거지?”
“껄껄, 욕하지 마라, XX아. 죽고 싶으냐?”
[‘주인공’이 ‘클리셰에서’ 벗어난 발언을 반복했습니다. 소설이 ‘클리셰’에서 멀어집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졌어요! o(iДi)o 현재 건강 수치: 20]
아앗, 안 돼. 내 소중한 건강 수치들이! 제발 그만해라, 이 어린이들아.
“하하하하. 고귀한 분들, 제 귀를 존중해 주세요.”
애들 돌보기는 힘들구나. 어쩌다 보니 삶에 지친 유치원 선생님 같은 말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나는 싱긋 웃고 한곳으로 걸어갔다. 걸음을 멈춘 곳의 바닥에는 들꽃이 흩어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꼬마 3황자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이었다.
거칠고 무딘 손끝에 꺾인 듯 엉망이 된 줄기가 이리저리 축 늘어졌으나 용케도 꽃만은 망가지지 않은 채였다.
아마도 가져온 사람이 소중히 보듬었겠지.
나는 조심조심 꽃을 그러모은 뒤 원래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대신 래빗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꼬마 3황자가 잠시 긴장하는 것이 시야 끝에 잡혔다.
“무엇이냐?”
“꽃이죠. 꽃.”
“이걸 왜 나한테 주눈 고지?”
“예쁘잖아요.”
래빗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꽃을 받았다.
당사자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나는 어느새 발그레 뺨을 붉힌 인형 같은 남자아이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이거. 생각보다 이쪽은 쉬울지도?
슬쩍 쪼그려 앉아 래빗과 시선을 마주했다. 꼬마 3황자님을 등졌으니, 황자님 쪽에선 내 등만 보일 터였다.
나는 래빗을 향해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래빗만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이거, 3황자님이 가져오신 거예요.”
“……알고 이따.”
래빗은 살짝 얼굴을 찌푸린 채로 뚱하게 답변했다.
“어린아이의 삶에 익숙해지기로 하셨죠? 이제 시작인 거예요.”
“이고랑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지?”
“그으, 후. 황녀님께서 그놈님을 보기 껄끄러워하시는 건 이해해요.”
“…….”
눈을 떠 보니 아빠라며 나타난 사람이, 선명하게 기억하는 원수랑 똑같이 생겼으면 거부감이 들겠지.
나라도 어느 날 환생했더니 전생에 내가 싫어했던 인간이랑 똑같은 얼굴이 내 가족이라고 그러면 싫을 것 같은데.
더군다나 아기 황녀님에겐 몇십 년은 족히 묵은 원한까지 있다. 그렇게 생긴 건 황제의 탓이 아니긴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폭군에게 유감이 있어 그런지 그리 딱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귀한 딸내미를 이런 초라한 궁에서 혼자 자라게 둔 업보를 치르는 거겠지, 뭐.
“하지만 3황자님은 아직 아이예요. 아이는 어른과 다르잖아요, 그죠?”
아이에게 죄는 없다, 뭐 이런 거창한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뜻은 잘 전해진 것 같았다. 래빗의 표정이 달라졌으니 말이다.
“……구래. 몰 말하고 싶운지눈 알게따. 저건 구냥 철딱서니 없눈 아기지. 나댭지 않게 감정적이어꾼.”
“……황녀님도 이제 겨우 세 살이신 걸 이젠 좀 알아주시면 좋겠지만, 네.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웃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간단하게 티타임이나 함께하시면 어떨까요?”
래빗이 마지못해 끄덕이는 동시에 반가운 알람 소리가 들렸다.
[퀘스트(서브) - ‘콩가루 집안이지만 화해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가 완료되었어요!]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주인공(아기 황녀)’의 ‘3황자(셋째 오빠)’를 향한 호감도가 5 오릅니다!]
“좋아요, 그럼 티타임 준비는 제가 할게요.”
“녜가?”
“아, 오면서 보니까 하녀들이 전혀 보이지 않더라구요.”
“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에 래빗에게 황급히 물었다.
“근데 황녀님, 저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몬대?”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머쓱하게 웃었다.
“……3황자님 성함이 뭐예요?”
* * *
‘루이프 노아 비센’.
꼬마 3황자님의 이름은 이러했다. 꽤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알았어도 여전히 그와 관련된 내용이 추가로 기억난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니, 정확하게는 뭔가 기억날 것도 같은데 좀처럼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치 시험지 풀 때 기억날 듯 말 듯한 문제를 마주한 기분이랄까.
“날씨가 엄청 좋네요.”
아기 황녀님의 궁은 조금 낡긴 했지만 있을 건 다 있는 곳이었다. 특히나 정원에 있던 기둥 여기저기 금이 가긴 했지만 아직 쓸만했다.
현재 우리가 앉아 있는 곳도 정원의 정자였다. 테이블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고 잔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하녀들이 모조리 황제의 명으로 차출당한 지금 대체 누가 이런 걸 준비했느냐, 하면 바로 나였다.
혹시나 싶어 주방을 뒤져보니 티타임에 필요한 물건들이 어느 정도는 갖춰져 있더라.
물론 먼지가 잔뜩 앉아 씻기는 해야 했다. 그나마 이런 걸로는 건강 수치가 안 닳아서 다행이었달까.
이런 것도 이야기를 클리셰로 이끌기 위한 노력으로 쳐주는 모양이었다.
“…….”
“…….”
문제는 이 자리의 주인공들이 각자의 이유로 뚱한 표정을 한 채 입을 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홀로 싱글싱글 웃으며, 차를 만끽했다.
내가 기분이 좋은 이유는 하나였는데, 조금 전 3황자 관련한 퀘스트를 완료하면서 이런 창도 떴기 때문이었다.
[퀘스트 시간 단축 성공!]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추가 보상 –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3 오릅니다! ₍՞◌′ᵕ‵ू◌₎♡ 현재 건강 수치: 21]
25를 훌쩍 넘었던 며칠 전에 비하면 낮은 숫자지만 이게 어디야. 수치가 20만 넘어도 행동하기 한결 편했다.
‘이렇게 쭉 유지할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거기다 가족들을 향한 ‘주인공’의 호감도 90 이상을 달성해야 하는 메인 퀘스트.
이걸 완료하면 무려 건강 수치가 30이나 오른다고 했다. 그럼 나도 드디어 정상인의 건강 수치 범위로 가는 거지!
……그렇게 되면 두 번째 소설은 좀 더 쉽게 깰 수 있으려나.
나는 차를 홀짝거리며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