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24)
일단 지금 상황에 집중하자. 어차피 지금 마주한 이야길 해결한 이후에야 생각해 볼 일이니.
“음, 래빗 황녀님?”
“왜 그로지?”
“아니, 하하. 말이 없으셔서요. 하하하.”
우선 중간에 끼어들어서 이 두 남매를 중재하고 함께 테이블에 앉히긴 했는데.
문제는 둘 중 어느 누구도 도통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대화하려는 의지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다, 적어도 의지는 있는데 입이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어린이가 한 명 있는 듯했다.
“너, 너는…….”
“아, 황자님 쿠키 더 드릴까요?”
“내가 이런 쿠키 따위를 먹을 거 같아? X…….”
“지금부터 욕하면 여기서 추방이래요, 황녀님이.”
래빗이 나를 흘끔 보고는 손을 뻗었다.
“허락한댜. 욕 쑤지마. 아기가 욕하는 거 보기 좋지 않댜.”
“누군 아기가 아닌 것처럼 말하기는!”
“자자, 쿠키 드시겠어요?”
“줘!”
오, 박력 보게. 나는 씩씩대며 손을 내민 3황자에게 접시를 밀어주었다.
“아, 그런데 황자님 미리 아셔야 할 게 있는데요, 여기 이 쿠기 중 하나는 꽝이에요.”
“꽝?”
“소금이 잔뜩! 들어가 있답니다.”
이전에 일했던 인간들은 역시 악랄했다.
언제 그런 건지 모든 쿠키 통에 소금을 뿌려 놓은 것이었다. 티타임에 내놓으려 다과를 찾던 중, 쿠키 통을 열어 보고서야 알았다.
먹는 걸로 장난치는 인간이 세상에서 제일 나쁘다.
아무튼 최대한 소금을 털어 내긴 했지만 먹어 보니 아예 쿠키를 만들 때 소금을 넣은 것도 있었다.
어찌하다 보니 복불복 쿠키가 되었다는 사정이다.
간략하게 이야기를 들은 꼬마 3황자님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 이런 게 취향이냐?”
“껄껄껄, 재밌지 않누냐.”
역시나 이런 건 시련으로도 치부하지 않은 위엄 넘치는 아기 황녀님이 껄껄 웃으며 쿠키를 입에 물었다.
사실 쿠키가 이런 상태인데, 내놓아도 되겠냐는 질문에 흔쾌히 수락한 것도 래빗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꼬마 3황자님이 까칠하고 뚱한 표정으로 쿠키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에퉤퉤퉤! 이게 뭐야! 짜!”
“저런, 운이 좋지 않으시네요.”
“넌 또 왜 태평하게 말하는 거야!”
“운이 조치 안아꾼.”
“이익!”
꼬마 황자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X…….”
“욕하시는 순간 쫓겨나요, 황자님!”
“이이익!”
꼬마 황자님이 분해 죽겠다는 얼굴로 주먹을 든 것과 동시에 래빗이 황자님을 쳐다봤다.
그러자 이 꼬마 3황자님이 손을 슬그머니 내리는 게 아닌가. 참 우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다시 보니 래빗의 손에 어느새 딸랑이가 들려 있는 게 아닌가.
……검기 딸랑이에 당한 적 있으시구나. 나는 꼬마 3황자님께 동질감을 느꼈다.
“황자님, 물드세요. 차가운 물이에요.”
“후읍, 짜…….”
꼬마 황자님이 내 손에서 컵을 받아 얼른 벌컥 들이켰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연거푸 몇 컵을 더 들이켰다.
덕분에 물병에 담아온 물이 모조리 동났지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을 많이 가져오길 잘했군.
꼬마 3황자님은 물을 마시고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 대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래빗을 노려보았다.
“넌 진짜 이상해…….”
“그리구 너는 머리털도 다 안 난 애쌔끼지.”
“뭐?”
“못 드롯나? 넌 애…….”
“우아아앙! 에취! 에취!”
더 이상의 건강 수치 하락은 용납할 수 없다. 그만! 그만해!
래빗이 덤덤하지만 그리 살갑지 않게 답변했는데, 이게 웬걸.
꼬마 3황자님의 반응이 묘했다.
“……네가 이렇게 오래 답을 하는 건 처음 봐.”
서늘하고 차갑게 생겼으며 약간은 심술이 어린 얼굴로 호기심이 스몄다. 기대도 살짝 보였다.
“이제 나랑 이야기하는 거야?”
“지굼 하고 있눈 게 대화가 아니묜 뭐지?”
[소설이 원작에 미세하게 가까워졌습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2 오릅니다! (○´3`)ノ⌒♡*:・。. 현재 건강 수치: 23]
……어라, 수치가 올랐다고? 처음 겪는 상황에 놀랐다.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건강 수치가 내려갔지.
반대로 적극적으로 움직이다가 소설이 원작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면 이렇게 수치가 오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럼 있잖아, 전부터 꼭 묻고 싶었는데 말이야. 설마 이런 게 취향이야?”
“취향?”
“이거 말이야.”
“금이 간고 마린가?”
“그래.”
꼬마 3황자님이 가리킨 건 금이 간 찻잔이었다.
꼬마 황자님은 이어서 정자 기둥에 금이 간 부분이라든가 언제나 입고 있는 똑같은 원피스 등을 차례로 지적했다.
지적이 하나씩 쌓일 때마다 나는 공감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이런 낡은 것들을 좋아하는 줄 알았지!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그런가 보네. 대체 이런 게 왜 좋은 거지…….”
“낡운 것이라, 그롤지도 모루지.”
“아, 역시 그래? 그럼 선물도 일부러 낡게 만들어야 하나…….”
“피료 없다.”
“왜! 아, 혹시 여기에 정들어서 다른 궁으로 옮기지 않은 거였어? 여기가 낡아서?”
아니, 아니. 설마 진짜 낡은 물건만 좋아하는 특이 취향이겠냐고. 래빗은 한눈에 봐도 그저 만사에 심드렁한 것뿐인데!
안타깝게도 3황자는 이를 전혀 눈치 못 챈 것 같았다.
“아버지랑 형들 말이 맞았구나. 진짜 낡은 걸 좋아하는 거였어…….”
보아하니 황제와 황자들은 래빗이 허름한 걸 좋아해서, 혹은 이 장소에 정들고 좋아해서 여기 있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한평생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껴 본 적 없는 인간들이라 가능한 착각이었다. 원래 원작에서도 이런 상태에서 시작했다가 딸바보, 여동생 바보들이 됐었지.
어떻게 된 게 기억이 선택적이다 보니 정작 중요한 줄기는 기억나지 않고 이런 쓸데없는 설정들만 간간이 떠오르네.
“야, 야야.”
꼬마 3황자님은 래빗에게 웬일로 답이 돌아오자 좀 신이 났는지, 아예 래빗 쪽으로 몸을 돌려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야아. 야.”
그러나 래빗이 한결같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볼을 쿡 찔러 보거나 래빗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아무래도 저 꼬마 황자님은 원래가 좀 악동인 것 같은데 문제는, 계속 저렇게 굴었다간…….
“듁고 싶냐?”
그렇지, 우리 래빗 황녀님이 정의로운 딸랑이를 다시 드셨고 꼬마 황자님은 대번에 꿀 먹은 인간이 되어 입을 딱 다 물었다.
어째 셋째 오빠가 주는 애정은 심술궂은 초딩처럼 삐뚤어진 것들뿐인가 보다.
문제는 우리 아기 황녀님이 웬만한 건 껄껄껄 웃어넘기다가도, 선을 넘는 순간 칼같이 딸랑이를 들어 검기를 날려 버린다는 것이었다. 장난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아예 관계의 진전 자체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치잇…….”
그렇게 별 소득 없이 조금 시무룩하게 고개를 돌린 나는 3황자와 눈이 마주쳤다.
차가운 느낌이 드는 청록색 눈동자가 한순간 반짝 빛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넌 뭐야?”
“네?”
“얘가 수하라고 했는데, 진짜야? 뭐 하는 사람이야? 어느 가문인데?”
음, 참 빨리도 물어보는구나 싶었지만 나는 을이니까 내색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에스테 가문의 달린 에스테라 합니다.”
“에스테? 온실을 수호하는 가문의 딸이야?”
“네, 맞습니다.”
“흐응.”
꼬마 3황자님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곧 얼굴에 씩 악동 같은 미소를 그렸다.
“너 머리색이 신기하네.”
“아, 그런가요?”
그렇게 신기한데 왜 이제야 발견하셨는지 의문이었지만 웃으며 답했다.
래빗은 바깥 구경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방안에서도 정원을 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지.
“만져 볼래.”
“네?”
그 말과 동시에 쪼르륵 달려온 꼬마 황자님은 내 앞에 서서 나를 올려다봤다. 아깐 여덟 살쯤으로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또래보다 조금 작은 것 같기도 했다.
아이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눈을 좁혔다.
“안 된다고는 하지 않을 거지?”
“음, 어. 네? 아니죠.”
머리카락 정도야, 뭐 대수겠냐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 황자님을 위해 상체를 숙이자, 조그만 손이 내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색은 처음 봤어. 황가에는 죄다 하늘색뿐인데.”
“아, 황녀님만 하얀 머리칼에 끝만 연한 하늘색이시죠. 예쁘고 신기해요!”
“쟤는 신성한 힘 때문에 그렇고.”
꼬마 황자님이 경치 감상에 푹 빠진 여동생을 보았다.
“누구보다 강한 힘을 타고났지만…….”
말을 하다 말고 꼬마 황자님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딘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울먹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순간이었다.
“물도 부어 봐도 돼?”
3황자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짓고,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식탁이 잘게 진동했다.
……진동?
식탁 위에 올려 둔 내 몫의 물컵과 찻잔이 둥실 떠오른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쾅! 꽤 커다란 소리와 함께 찻잔이 잘그락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떨어졌다. 다행히도 그리 높이 떠오르지 않았어서 잔이 엎어지는 대신 찻물만 몇 방울 튀고 말았다.
래빗이 탁자를 내리친 자세 그대로 3황자를 노려봤다.
“너, 일반인한테 수쟉 부리디 마.”
“치잇.”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탁자와 아기와 어린이를 번갈아 보았다.
“저어, 황녀님 방금 뭐였어요?”
“마나야.”
래빗이 3황자 쪽을 눈짓했다. 꼬마 황자님은 억울함이 가득하고 뚱한 표정이었다.
“쟤도 마나를 쓸 줄 아눈 거지.”
“아, 2황자님처럼요?”
“아니, 쟤눈 좀 댤라.”
래빗이 뺨을 살짝 부풀리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쟤눈 마법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