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32화 (32/281)

◈32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26)

태평하게 불만을 털어놓거나 설명을 들을 시간은 없었다. 히죽 웃어 보인 검은 옷의 남자가 이미 검을 들어 올렸으니까.

빨리, 제발 좀 빨리!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발 늦은 뒤였다. 검이 대기를 가르고 나를 향해 날아왔다.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카앙!

[기사 ‘엠버넷’(B급 영혼-능력치 조정 상태)의 힘을 받아들였어요!]

[1분간 사용 가능합니다! ※남은 시간: 00:58]

“하아, 하아…….”

내 몸에 낯선 활기가 스며든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기분만이 아니라 정말 몸이 가벼워졌다. 건강 수치가 낮은 탓에 항상 몸이 무거웠다는 걸 지금 막 깨달은 참이다.

“이 미친놈들, 애를 상대로 뭘 어쩌고 어째?”

무엇보다 신기한 건 내가 가진 나뭇가지가 남자의 칼을 막아 냈다는 점이었다.

나뭇가지에서 불그스름한, 정확히는 분홍빛에 가까운 빛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이게 바로 마나라는 거구나.

“제길. 구경하지 말고 합류해! 이 여자, 마나를 쓰는 검사다!”

“검사? 정보에 따르면 이곳엔 기사는 없을 텐데?!”

“뭐해, 오지 않고!”

[※스킬 종료까지 남은 시간: 00:30]

급한 건 내 쪽이었다. 나는 바닥을 박차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세 자루로 늘어난 검이 나를 향해 한꺼번에 쇄도했다.

으아, 이대론 안 돼! 일단 도망쳐야 해!

[※스킬 종료까지 남은 시간: 00:15]

“좀 떨어져! 니네 꼴 보기 싫다고!”

카앙!

나가떨어진 한 명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은 몸이 가벼웠으나 이 상태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스킬 지속 시간이 끝나면 건강 수치가 곧장 14까지 떨어질 예정이다.

그 수치라면 그대로 쓰러질지도 몰랐다. 아니, 연회 때를 생각하면 기절할 수도 있었다.

촤아아악! 캉!

또 한 명 처리.

두 번째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미련 없이 도망갈 작정으로 등을 돌렸다. 지금 움직이는 속도를 보면 뛰는 건 더욱 빠를 거다. 내 안에 깃들어 나를 움직이는 엠버넷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딜 가시려고.”

“……!!”

그러나 돌아선 순간 내 뒤에는 또 다른 암살자가 서 있었다.

“원칙대로 목격자는 살려 두지 않는다.”

“예예, 빠르게 처리합시다.”

양쪽에서 검이 날아온 순간 처음으로 엠버넷이 당황한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몸에 생채기가 새겨졌다. 따끔한 고통이 스쳤지만 거기에 신경을 기울일 시간은 없었다.

[※스킬 종료까지 남은 시간: 00:05]

아, 안 돼. 나뭇가지가 뚝 부러졌다.

날아오는 검을 바라보며 팔로 얼굴을 가렸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이란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스킬이 종료되었습니다!]

내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며 순식간에 몸이 무거워졌다.

마치 추를 매단 채 물에 빠진 것처럼 사방에서 짓누르는 무게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지?

“물울 떠오는 속됴가 너무 느져.”

“……래빗 황녀님?”

눈을 뜨자 쓰러진 남자들이 보였다. 아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서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 조그만 아기 황녀님을 제외하고는.

손에 쥔 앙증맞은 딸랑이 위로 푸르른 검기가 덧씌워진 게 보였다.

래빗의 눈이 한곳을 향했다.

“끈질긴 놈이 있꾼.”

그쪽을 돌아보니 어느 틈엔가 일어선 자가 있었다. 도망가려는 듯 걸음이 재빨랐다.

“으악, 넌 뭐야?”

콰앙!

그러나 꼬마 3황자님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동시에 몰아친 거대한 바람이 남자를 바닥에 처박았다.

“하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너무 에너지를 많이 써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으니까.

“흐어어어엉!”

나는 바닥에 누운 채 울음소리를 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근데 서럽다.

[퀘스트(돌발) - ‘살려 주세요!’가 완료되었어요!]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8 오릅니다! ₍՞◌′ᵕ‵ू◌₎♡ 현재 건강 수치: 22]

[주요 인물(주연) ‘3황자(셋째 오빠)’가 빙의자 님께 호감을 가집니다!]

“헉, 이것들은 다 뭐지? 기절했네? 이봐, 이봐, 에스테의 영애. 네가 다 쓰러트린 거야? 너 좀 하는 모양인데?”

“건두리지 마.”

“아, 왜?”

“댜친 거 안 보여? 눈운 쟝식이야? 떼어다 엉덩이에 달아조?”

……저기요, 제 앞에서 싸우지 마세요.

나는 가물가물해지는 시야에 잡힌 두 사람의 모습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었다.

[경고! 빙의자 님의 몸이 갑작스럽게 변한 건강 수치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상태 이상 [기절]에 돌입해요! Σ(゜ロ゜;) ※남은 시간: 10:00]

아니나 다를까 달갑지 않은 알림이 떠올랐다. 연회장에서 기절하기 직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메시지다.

“잠시만, 이놈들 옷이 왜 이래? 뭐야, 뭔데?”

끄응, 여기서 기절하는 건 정말 좋지 않은데. 눈이 가물가물 감기던 그때였다.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새로운 스킬 ‘몸에 나쁜 각성제’를 얻었어요!]

[빙의자 전용 스킬 - 몸에 나쁜 각성제(lv.1)

등급: 레어(B)

빙의자 만의 고유 기술, 모든 상태 이상과 강제 패널티를 일시적으로 멈춰 준다.

스킬 지속시간은 레벨에 따라 증가한다. (현재 지속시간: 1시간)

※단, 스킬을 해제했을 때 상태 이상 혹은 강제 페널티의 영향을 그대로 받는다.]

[스킬 ‘몸에 나쁜 각성제(lv.1)’가 활성화됩니다!]

까맣게 점멸하던 시야가 다시 점차 선명해졌다. 그리고 몸도 한결 움직일 만해졌다.

그러니까 이게 비유하자면 ‘레X불’이나 커피를 한 열 잔쯤 마시고 밤을 새게 해 주는 스킬이다, 이 말이네? 스킬을 해제하면 멈춰 뒀던 상태 이상이나 패널티가 다시 온다는 거고.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건강 수치 때문에 또 얼마나 기절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임시방편이긴 해도 꽤 쓸 만한 카드를 얻은 셈이었다.

“뭔데, 뭐냐고. 딱 봐도 수상해 보이잖아!”

“아뮤뎟도 아니라니가. 성가시게 하디 말고 꺼뎌.”

“야.”

그 사이 아기 황녀님과 어린이 황자님의 싸움은 절정을 맞이했나 보다.

“빨리 말하라고!”

끙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키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 3황자님이 보였다.

“얘네 암살자지?”

사실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건만 이제야 정답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아니, 사실 눈으로 보고도 설마설마 싶었겠지.

이번 일과 관련된 원작 쪽 전개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기 황녀님을 노리는 암살자들의 세력.

이를 비밀로 하려다가 들켜 버린 아기 황녀님. 위험에서 아기 황녀님을 구하는 아빠와 오빠들, 이었나.

원작에서의 아기 황녀님이 가족들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말하지 못했다면, 이쪽은 다른 의미로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구냥, 내 거처에 놀러 온 사람둘이다.”

“야, 그 말을 믿으라고? 내가 바보로 보여?”

래빗은 습관처럼 팔짱을 끼려다 짧은 팔 때문에 실패하고, 뾰로통한 얼굴로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그러고 나서는 오동통한 볼 가득 바람을 채웠다가 길게 내쉬었다.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덴장, 뎡가신 놈이 아라 버려꾼.”

조금 전까지 겨를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아기 황녀님이 소설 속에서 습격을 받은 건 보다시피 한 번이 아니었다.

본래 전개라면 황제가 지켜 줬겠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관계가 뒤틀려 버렸지.

‘그럼 황제는 모르는 건가?’

래빗이 이미 감시자인 그림자 기사를 모두 눈치채고 내쫓은 거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신경 쓰이는 부분이 없진 않으나 아무래도 모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진짜 암살자라고? 어느 미…… 아니, 간 큰 놈들이 감히 황녀의 정원에 침입해!”

놀란 눈으로 한동안 멍하니 래빗을 쳐다보던 3황자가 갑자기 왈칵 성을 내는 걸 보면.

“마니 오던데.”

“많이? 뭐? 심지어 많이 온다고? 말도 안 돼, 어째서 너를 노리는 건데?”

“그걸 내가 아랐으면 해결해게찌.”

래빗은 일단 들키니까 시원시원하게 인정했다.

“마침 잘 돼쏘, 처치 곤란이옷는데.”

“곤란?”

래빗이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나는 스킬 지속시간을 한번 봤다가, 슬금슬금 따라갔다.

‘스킬 지속시간이 20분 남으면 돌아가야지.’

집까지 가는 데는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

쓰러진 암살자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기에 걱정됐지만, 이 부분은 3황자가 해결해 줬다. 바람이 씽씽 불더니 은색 밧줄이 나타나 암살자들을 한데 묶어 버린 것이었다.

“요쪽이댜.”

래빗이 우리를 데려온 곳은 조그만 오두막이었다.

관리가 되지 않아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 때문에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공간이었다.

한눈에도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오두막이었지만 문고리에는 먼지가 앉지 않았다.

‘자주 왔단 소리지.’

래빗이 익숙한 듯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문이 열리며 어두운 내부가 드러났다. 안쪽에서 먼지 냄새가 훅 끼쳤다.

잠시 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곧 방안에 잔뜩 널브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묶여 있다는 것이었다.

“훔, 역시 몇은 사라져꾼.”

“래빗 황녀님, 이건…….”

“이 몸을 공격했던 놈둘이다.”

이 몸이 아니라 나라고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보다, 이게 전부 암살자들이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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