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27)
암살자들은 야무지게 눈까지 가려진 채였다.
나는 찬찬히 그들을 살펴보다 눈을 크게 떴다. 저건 시녀복이잖아?
“……야, 유엘. 저건 시녀복 같은데?”
“맞께 봐따.”
3황자가 마침 내가 묻고 싶던 걸 묻기에 나는 얼른 이어 말했다.
“저, 황녀님 혹시 시녀들이 괴롭혀도 그냥 두셨던 건 혹시…….”
“구래.”
세상에, 그간 시녀들이 본인을 괴롭혀도 그냥 두었던 이유가…….
“나랑 친해 보이면 인질이 될 슈도, 쥭울 수도 있지. 암살자에게 죽눈 고 보다는 날 괴롭히게 두눈 게 나으니가, 그냥 둔 고기도 해.”
소름이 살짝 돋았다.
본래도 괴롭히든 말든 관심 없었지만, 암살자랑 엮이기라도 할까 봐 괴롭힘을 그대로 두었다는 거네?
“그리고, 그게 괴로핌씩이나 되겠누냐.”
껄껄 웃는 아기 황녀님의 모습이 이전과 사뭇 달라 보였다.
전에는 그저 신경 쓰기 귀찮아서 괴롭히는 자들을 내버려 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름의 판단과 배려에서 참았던 거라고 생각하니 감탄스러운 한편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끄응,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에 황제로서 가졌던 힘과 능력이 이번 생에도 고스란히 이어져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 물론 시종 중에소도 암살쟈가 있었찌만.”
시종 옷을 입고 있던 암살자는 사라졌단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암살 길드도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왔다고.
그래서 여기 대충 버려두면 며칠 사이에 사라지곤 한단다.
이건 무슨 암살 길드 정모인가?
“그럼 이 사람들은 그냥 둬도 되는 거예요?”
“구래, 어차피 사라져.”
래빗은 지금까지 그래 왔다고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따로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무슨 소리야! 그냥 둔다고?”
문제는 여기에 납득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거다.
“당장 잡아들여도 모자랄 판에! 안 돼! 절대 안 돼!”
“모라는 고냐, 가만히 있오라. 먼지 난댜.”
“이거 이대로 둘 수는 없다, 당장 아버지에게 이를 거야!”
“해 바.”
래빗이 가볍게 딸랑이를 흔들었다. 그 순간 길길이 날뛰던 3황자가 입을 싹 다물었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아, 큰일 났다. 나 저 소리 꿈에 나올 것 같아…….
“해 보라고.”
“그, 익, 내, 내가 못 할 것 같아!”
“과뇬 알횬실까지 갈 수 있울까?”
욕 한마디 하지 않는데 이렇게 살벌할 수가.
설마 여기에 암살자들과 함께 묶어 두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잠시 후 우리는 그대로 오두막을 나왔다.
3황자는 아무것도 못 했다는 사실에 씩씩거렸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간다거나 멋대로 황제의 거처 쪽으로 달려가 버리지는 않았다.
‘힐끔거리는 걸 보니 미움받기 싫어서 황제한테 말은 안 하겠다 싶은데.’
이렇게 보니 이쪽은 확실히 아직 애다.
‘황제한테는 내가 보고해야 할까?’
암살자가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황제에게 간했다는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래빗의 신뢰도가 하락할 게 뻔했다.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참아 보자.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는 다른 쪽으로 말을 흘리기로 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래빗 황녀님.”
래빗은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한참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오동통하게 부푼 뺨이 보였다.
의문이 샘솟았다.
‘육아물에서 전생을 기억하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는데.’
이때 아기 주인공은 생존을 위해서든 목적을 위해서든 움직인다.
그러면서 가족과 반드시 어떤 형태로라도 관계를 맺게 되었고 때때로 이를 지속하기 위해 ‘애교’를 부려야 할 일도 발생했다.
그러나 래빗의 상태는 그것과는 달랐다.
‘래빗은 적국에 태어났지만 복수할 생각조차 없었지.’
차라리 유엘이 복수를 결심했다면, 내가 없었어도 어떻게든 가족과 엮였을 것이고 이야기 또한 진행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래빗은 그저 전생에 갇혀 버린 사람 같았다. 이번 생의 ‘유엘 래빗 비센’으로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그래서 처음에 나는 이야기가 멈춰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연회장에서 만났을 때, 래빗을 보는 2황자의 눈엔 체념이 서려 있었지.’
황녀와 황가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계의 뒤틀림은 여기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래빗의 이야기는 내가 나타나고서야 비로소 책장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아이인데 왜 아이다움은 전혀 남지 않은 걸까. 어째서 황녀 래빗이 아닌 황제 로아타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행동하는 걸까.
나는 메인 퀘스트를 해결해야만 하는 처지지만, 래빗과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아기 황녀님이 가엽게 느껴져,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해졌으면 했다.
“구래, 다행이야. 이번엔 수하를 구해내소.”
“…….”
래빗의 말에 가슴 안쪽에서 옅은 슬픔이 느껴졌다.
반응한 건 내가 아니었다. 엠버넷이었다.
“3황자님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뭐, 나, 나? 나한테도?”
“네. 도망가려는 암살자를 잡아 주셨잖아요. 아주 멋있었어요.”
원래 애들은 칭찬하면 좋아하던데.
슬쩍 쳐다보자, 3황자가 고개를 돌리고 일부러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뺨이 달아오르는 건 감출 수 없었다.
“뭐, 뭐……. 영애도 대단했어. 솜씨가 제법이던데? 검을 배웠나?”
“음, 그런 건 아닌데……. 오빠의 영향을 받았나 봐요.”
“누군데?”
“파올로 에스테예요.”
“아아, 그 덩치 되게 큰? 알아.”
이야, 파올로 너 나름 이름난 인간이었구나.
다행히 3황자는 내 어설픈 변명을 아무 의심 없이 넘겼다. 정확하게는 내게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사이 래빗이 오두막을 다시 보고 오겠다며 쪼르르 달려가 버리는 바람에 우리 둘만 남았다.
“3황자님, 3황자님께서는 황녀님이 황자님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죠?”
“어? 뭐…… 당연한 거 아냐?”
“그럼 오늘 일, 아무한테도 말씀 안 하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러자 3황자가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런 짓이 무슨 소용 있어? 어차피, 쟨…… 날 그냥 싫어하잖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나 래빗이 오랜 시간 거리를 둔 만큼 가족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단단한 체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3황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느꼈다.
“황자님, 여기서부터 저기 나무까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보이세요?”
“보여.”
“황녀님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모든 사람과 이렇게 거리가 있는 분이세요. 심지어 가족에게도요. 황자님과 다르게 오늘처럼 암살자들이 노리는 환경에서 자라셨으니까요.”
“그건…… 내,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맞아요. 그렇지만 황녀님은 아무도 믿지 않으시죠. 그래서 3황자님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주시면 좋겠어요. ”
내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쟤는 이미 널 좋아하잖아……? 근데도 날 도와주겠다는 거야?”
“네. 저는 황녀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왜?”
이유라. 그렇다고 퀘스트 얘길 할 순 없으니, 아이가 이해할 만한 다른 이유를 대기로 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쭉 많이 아팠어요. 지금이야 건강해졌지만 언제 또 아플지 몰라요.”
“…….”
“제가 오지 못하는 날에 황녀님이 혼자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3황자의 강아지같이 커다란 눈이 일렁거렸다. 곧 시선이 단단해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영애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노력할게.”
마침 저 멀리서 래빗이 다가왔다.
래빗이 도착하기 무섭게 3황자는 묶어 둔 암살자들을 자신의 마법으로 오두막에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단슌하군.”
“뭐야?”
나는 얼른 아기 황녀님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그러고는 귓가에다 ‘황녀님, 조금만 더 친절하게요, 네?’ 하고 속삭였다.
래빗이 얼굴을 찌푸렸다.
“……뭐라고 해?”
“인사요, 인사.”
래빗이 그대로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찬찬히 입을 열었다.
“고먑다.”
꼬마 3황자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오, 역시 애기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도 귀엽구나. 줄곧 차가워 보이던 3황자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게 보였다.
“쓸모 있군.”
“마, 맞아, 난 대단하지!”
거기다 3황자의 새하얀 뺨이 차차 단풍처럼, 그리고 토마토처럼 아주 빠알갛게 물들었다.
“내가 도와주는 건, 절대 니가 귀여워서는 아니야!”
소년이 입을 우물거렸다.
“내가 오, 오, 오빠니까 옮겨 주는 거지!”
마지막 한 명까지 암살자를 빠르게 치워 버리고 다 같이 정원을 빠져나올 때까지, 꼬마 3황자님의 빨간 볼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 * *
‘음, 스킬 지속시간이 40분 남았네.’
정원을 나와서 황녀의 거처로 돌아오자, 딱 내가 예상한 시간이 됐다.
“롤린, 너 괜찮운 곤가? 식운땀이 흐른다.”
“아, 오랜만에 움직여서 그런가 봐요.”
현재 새로 습득한 스킬인 ‘몸에 나쁜 각성제’가 상태 이상 ‘기절’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긴 했지만 완전히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미약했던 현기증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스킬 해지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조금씩 몸이 무거워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