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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34화 (34/281)

◈34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28)

“어? 진짜 웬 땀을 이렇게 흘려? 어디 아프냐?”

꼬마 3황자님은 기분이 아주 좋았는지, 관심도 없던 내 걱정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음, 저는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황녀님.”

“구래, 구로케 해라.”

래빗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아주 조그만 손이 내 옷자락을 잡았다. 내 옷이 와락 구겨질 정도로 강한 힘이었지만 어쩐지 그 점이 귀엽게 보였다.

“……내일도, 올 곤가?”

“물론이죠.”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아마 그다음 날에도 쭉 찾아올 거예요.

황녀님이 가족을 받아들이시고, 요정의 횡포로부터 제가 살아남는 날까지 말이지요.

“그리고 다시 한번 감사해요.”

난 치마를 잡고 허리를 우아하게 숙였다.

나의 생존 때문이 아니더라도 조그만 황녀님은 몹시 사랑스러웠다.

“구해 주실 때 아주 멋있었어요.”

“……당욘한 이야기룰. 나눈 머싯찌.”

“아니, 그렇게 웃으시라고 한 얘기는 아닌데.”

이제는 익숙해진, 껄껄 웃는 모습을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이번엔 래빗이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고 이따. 뜌하를 지키눈 건 당욘한 일이다.”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간 힘드시진 않으셨어요?”

오두막에 묶여 있던 수많은 암살자를 떠올리자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불쑥 흘러나왔다.

래빗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조그만 어깨를 으쓱였다.

“내 몸운 내가 지켜야지.”

“음, 그건 맞아요. 맞는 말 같아요.”

원래 전개대로라면 오로지 보호만 받았을 아기 황녀님이지만?

[‘주인공’이 클리셰에서 벗어난 발언을 했습니다. 소설이 ‘클리셰’에서 멀어집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Σ(゚Д゚|||)━ 현재 건강 수치: 20]

[현재 상태 이상 [기절](대기) 중입니다. 요정은 얼른 집에 돌아갈 것을 권고해요!]

[건강 수치 악화로 스킬 지속시간이 소폭 줄어듭니다. ※남은 시간: 27:58]

뭐야. 뭔데. 뭔데! 아기 황녀님이 스스로 지키겠다고 말해서 이런 거야? 왜?

육아물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지켜서도 안 돼? 보호받아야 마땅한 존재니까?

‘아니, 육아물이지만 강한 주인공도 있잖아.’

이와 별개로 점차 ‘클리셰’라는 것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눈을 뜨자마자 학대하는 사람이 가득했던 환경. 가족들이란 사람들은 무심히 방치한 채 아무도 지켜 주지 않았잖아.

필요하면 래빗도 가족들을 녹이기 위해 ‘애교’ 같은 걸 부려야 한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왜 그딴 인간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래빗이 노력해야 해?

내가 할 일은 지금 3황자를 설득한 것처럼 저쪽에서 먼저 다가오게 하는 것 아닐까.

‘따지고 보면 애교는 황제나 오빠들이 부려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정신 차려 보니 무려 10분이 사라져 버렸다.

헐, 큰일 났다. 이래서는 집에 돌아갈 시간도 부족하겠다. 나는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화, 황녀님! 저 아픈 것 같아요!”

“…머? 어디갸 말인가!”

“모르겠어요. 넘어졌던 엉덩이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또?”

“속도 울렁이는 것 같고……. 아, 여, 열도 나는 것 같아요!”

“뚀?”

생각해 보자.

신뢰를 잃지 않으면서도 래빗이 가족을 한 번이라도 더 마주치게 하기 위해 지금 도움을 요청하면 어떨까?

‘사람을 부르게 하자.’

그러려면 아픈 척이 최선 아닐까.

사실 몸은 스킬 덕분에 아직 견딜만했지만, 다소 엄살을 부려서라도 황녀의 거처에 사람을 부르게 할 생각이었다.

2황자도 황제도, 분명 황녀의 거처를 주목하고 있을 터. 이쪽에서 먼저 도움을 요청하면 그쪽에서도 관여할 명분이 생기겠지.

“진짜 욜나네…….”

조그만 손이 내 이마를 짚었다. 아, 아기 황녀님의 고민하는 얼굴, 진짜 귀엽다.

“내 성에 비상약이 이따. 이고 먹고 잠쉬 쉬어따 가도 죠아.”

“……네?”

“이론, 너뮤 걈동하지 않아도 된댜.”

뭔가 일이 틀어졌다.

아기 황녀님은 사람을 부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다급해졌다. 아니, 아니. 이게 아닌데. 사람을 불러주면 좋겠는데.

예상했던 것과 상황이 전혀 다르게 흘러가자, 난 일단 계획을 다시 변경하기로 했다.

“아뇨, 황녀님!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다시 생각해 보니 집에 가서 쉬는 편이 낫겠어요. 마차를 준비하게 누구든 불러 주실 수 있을까요?”

“무순 소리야, 안색이 이로케 나뿐데!”

“야야, 그래. 얼굴색이 많이 이상한데 그냥 쉬어.”

가만히 지켜보던 3황자까지 거들었다. 어어? 이게 아닌데.

내가 당황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스킬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스킬 영향력이 줄어듭니다! ※남은 시간: 20:58]

“쿨럭!”

후드득. 내 입에서 무언가 쏟아졌다.

‘이런, 낭패다. 시간 좀 줄었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해?’

나는 손을 적신 피를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병약한 ‘달린’의 몸으로 눈을 뜬 뒤, 몇 번 피를 본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단순히 몸이 힘들 때조차도 피를 토하는 꼴을 몇 번 봤다 보니 별로 놀라울 것도 없었다.

“뭐야!”

문제는 내가 아니라 내 주변의 어린아이 둘이었다.

“피! 피가 나잖아! 영애, 검에 찔렸어? 언제?”

“아, 이건 찔린 게 아니라…… 쿨럭! 쿨럭!”

아놔, 말 좀 하자! 피가 다시 한 움큼 쏟아졌다. 별로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그래도 아기 황녀님은 전생에 황제셨으니 겨우 이런 장면에 놀라지 않겠지.

그러나 시선을 돌린 순간 애써 미소 지어 보이려던 나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얗게 질린 래빗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그만 손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빼앗기기라도 한 듯,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은 그렁그렁해져 금방이라도 눈물을 팍 터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가장 아이다운 얼굴을 보였다.

“엠버넷! 엠버넷!”

“황녀님?”

“너, 쥭어?!”

이상하게도 아이 같으면서도 어른의 모습이 겹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공’(아기 황녀)이 혼란을 느낍니다!]

[‘주인공’(아기 황녀)이 전생과 현실을 혼동합니다! 전생의 자아가 더욱 커집니다.]

[소설이 ‘클리셰’에서 멀어집니다.]

“쥬, 쥭지 마라. 살기로, 살기로 해짜나!”

조그만 손이 나를 마구 흔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그녀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래빗은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먼 과거를 보고 있는 거야.’

아기 황녀님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나는 애써 힘을 주어 래빗이 주는 흔들림을 참았다.

“지, 짐을 두고 가지 마라!”

[‘주인공’이 클리셰에서 벗어난 발언을 했습니다. 소설이 ‘클리셰’에서 멀어집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Σ(゜ロ゜;)!! 현재 건강 수치: 18]

“……읍, 쿨럭, 엘! 유엘!”

“엠버넷!”

나는 가까스로 래빗의 손을 잡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여기서 수치가 더 떨어지면 정말 기절할 것 같았다.

“래빗!”

거짓말처럼 래빗이 멈췄다.

“당신은 래빗이야!”

그제야 아기 황녀님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나는 피를 삼켰지만 채 삼키지 못한 일부가 주르륵 흘렀다.

“저 보이세요?”

“……보인댜.”

다행이었다.

“황녀님, 죄송해요. 그, 정말 죄송한데…… 이번엔, 흐, 정말 사람을 불러 주시면 좋겠어요.”

“아.”

“3황자님이 불러 주셔도 좋고요…….”

“아? 불러? 누구? 시, 시종? 기사?”

3황자가 당황해서 중얼중얼하다, 래빗의 눈초리를 받고서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나 곧 래빗이 입을 열었다.

“데료와.”

“아, 어? 어어, 알겠어!”

3황자가 얼른 달려갔다. 아니, 마법을 써서 날아갔다.

황자도 좋고 황제도 좋으니 제발 누구든 불러와 주라.

‘정황상 의사를 부르러 가는 거겠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달려오겠지.’

나는 천천히 눈을 돌렸다.

아, 죽겠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그러나 나는 내 현재 상태를 티 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당장 내 몸보다도 길 잃은 아이같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래빗이 신경 쓰였으니까.

“……죄송해요, 황녀님. 사람 부르는 거 싫으실 텐데.”

“아니, 아니야.”

래빗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쥭고 사는 것보댜 즁요한 건 없어.”

음, 나는 죽는 게 아니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간 래빗이 고집스럽게 암살자를 쫓아내고 거처에서 사람을 물렸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황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

그래, 이제 길이 더 확실해졌다.

내가 할 일은 래빗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황자들, 그리고 황제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 오지 않았다면 클리셰에서 벗어나 영원히 단절되었을 이들 말이다.

이 이상한 관계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내가 래빗에게 황제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될 것.

두 번째, 가족들을 그냥 지켜보기만이라도 하게 래빗을 설득해 볼 것.

마지막, 각 황자들과 황제에게 접근해 그들이 먼저 래빗에게 다가가게 만들 것.

‘조금 전 요정의 창은 래빗이 전생과 현실을 혼동한다고 했어. 전생의 자아라고도 했고.’

메인 퀘스트에 나왔던 문구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래빗은 아예 현생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영원히 단절되길 바랄 만큼.’

하지만 당신은 전생에 부하를 아끼는 황제였고, 자기 사람이 위험해질 때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챙기는 사람이었지.

그토록 싫어하던 외부인을 처소에 부를 정도로 나를 위하는 래빗의 애정에, 나는 이 황녀님을 꼭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곧 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유엘!”

날카롭게 터지는 목소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아기 황녀님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하늘색 머리, 날카로운 눈매.

도착한 사람은 2황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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