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30)
달린 에스테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영애를 두고 그렇게 오해했다니, 라이칸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미안함이란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자연히 그간 보아 온 달린의 행적이 머리를 스쳤다.
온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의에 까다롭다는 평을 듣는 자신임에도 다소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녀의 행동이 그리 싫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지금은 잠든 얼굴이 무척이나 여려 보이는 모습이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흡사 멈춘 것처럼 보이는 아주 미약한 숨결, 끊어질 듯 가는 숨이 그의 무언가를 툭 건드리는 듯했다.
라이칸의 눈이 재차 여동생을 향했다.
아이는 어렸지만 성스러운 힘의 탓인지 지나치게 조숙했다.
선대엔 이런 이들도 있었다고 하지만, 자세한 기록이 남지 않았기에 래빗을 의심하는 가족도 있었다.
줄곧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 잃은 새끼 고양이처럼 낑낑대는 표정으로, 여동생은 달린 에스테를 걱정하고 있었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다.”
재차 강조하자 여동생의 얼굴이 미세하지만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빠르게 치료 마법사에게 보여야겠지.”
“그롬 난 내 궁으로 도라갈게.”
래빗이 순순히 말했다.
라이칸은 그런 모습이 도리어 마음에 걸려, 짧게 말을 이었다.
“그래. 소식은 바로 전하겠다. 영애의 몸에 별문제 없을 거란 것도 보장하지.”
“너눈…….”
애써 눈물을 감추기라도 한 듯 아이의 눈이 이슬처럼 반짝거렸다. 통통한 뺨이 우물거렸다.
몹시도 사랑스러운 얼굴, 한 번쯤 웃어 주었으면 하건만.
“좋운 사람이어꾼.”
“……적어도 네겐 그렇겠지. 평생 그럴 예정이니, 좀 더 편히 생각해 주면 좋겠군.”
달린에게 의식이 있었다면 요정이 호들갑을 떨며 호감도가 상승했다고 알려 왔을 타이밍이었으나, 애석하게도 당사자는 강제로 빠진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래, 염려는 하지 말도록.”
라이칸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저도 모르게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했다.
“적어도 영애는 지금 죽진 않을 테니까.”
이런. 곧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음을 깨달은 라이칸은 낭패감을 느꼈다.
“무순 소리야?”
래빗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 비키지 않을 듯한 래빗의 모습에 라이칸은 차라리 이야기해 주고 빠르게 이동하는 쪽을 택했다.
“말 그대로다. 에스테의 막내딸은 원인 불명의 불치병을 앓고 있다.”
색색, 달린의 숨소리는 가늘기만 했다.
“그녀가 곧 죽을 시한부란 건 귀족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 * *
[……료 마법을 받았어요! 상태 이상 ‘기절’이 해제됩니다!]
가물가물한 눈을 떴을 때 하늘빛 천장이 보였다.
‘음, 천장 벽지를 바꿨나.’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집 나갔던 이성이 조금씩 돌아왔다.
우리 집 천장은 흰색인데, 하늘색 벽지라니?
눈을 뜨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일어났군.”
2황자였다. 어라, 쟤가 왜 눈앞에 있지.
아, 맞다, 나 기절했지. 황성에 재워 준 건가?
“그, 황자님을 뵙습니다. 창공의…….”
“인사는 됐다.”
나는 흘끔흘끔 2황자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2황자가 나를 빤히 보았다.
“몸은 괜찮은 건가? 상태를 말하도록.”
“아, 저, 음…….”
나는 팔을 움직이는 시늉을 해 보다 얼른 대답했다.
“괜찮은 것 같아요.”
사실이었다. 정확하게는 어디까지나 움직이기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지만. 그게 그거지.
이미 기초 체력과 근력 등등이 망해 버린 몸이라 이 정도도 감지덕지했기 때문이다.
“그래.”
“저, 움직일 수 있는데…… 이제 집에 돌아가도 될까요?”
그런데 기절했다가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일어난 거지?
지난번에 기절했을 때는 눈을 뜨기까지 며칠이나 걸렸다. 분명 눈을 떴을 즈음에 요정의 창을 본 것 같은데…….
“그러도록. 치료 마법사가 봐 주었으니, 회복되었을 거다.”
“아, 감사합니다……!”
아하, 마법이었구나.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치마를 붙잡고 인사했다.
2황자는 잠자코 지켜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방을 나서기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수월하게 황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엔 석양이 가물가물 지고 있었다. 땅거미가 저택과 저택 옆 온실에 드리운 모습은 장관이었다.
마차가 완전히 멈췄을 때, 문이 열리고 익숙한 사람이 나를 반겼다.
“왔냐.”
“파올로.”
파올로가 씩 웃으며 서 있었다.
“일찍 왔네?”
“아, 나는 외근했다가 바로 퇴근했지.”
오, 그럼 동료 기사들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 오늘 황녀궁에서 일어난 일은 전해 듣지 못했으려나?
좋아, 잘됐어.
“황실 기사도 꽤 편한 직업이었네? 부럽다.”
“부럽냐? 너도 검 좀 잡아 볼래?”
파올로의 말을 슬쩍 넘기며 속으로 요정을 불렀다.
‘요정, 궁금한 게 있는데.’
[요정은 빙의자 님의 말을 기다리고 있어요! ≡(*′▽`)っ≡]
‘빙의 스킬 말이야. 건강 수치가 높을수록 끌어낼 수 있는 힘이 커져?’
요정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특이한 일이었다. 항상 망설임 없이 지껄이던 창이었으니까.
[맞습니다! 레벨은 받아들일 수 있는 영혼의 범위와 지속시간만 결정할 뿐, 빙의자 님의 상태에 따라 빙의시킬 수 있는 영혼의 등급이 달라져요! ٩(•̤̀ᵕ•̤́๑)૭✧]
영혼의 등급.
나는 엠버넷의 영혼에 붙었던 등급을 떠올렸다. 강제로 조정되었다는 항목도.
‘영혼의 등급은 변하기도 하겠네? 내가 상태가 좋으면 같은 영혼이라도 더 높은 등급이 되거나 강해질 수 있고 말이지.’
[놀랍네요, 빙의자 님! 빙의자 님의 통찰력에 놀란 요정의 창이 부끄러워해요!]
놀랍기는 개뿔.
‘내가 묻지 않았다면 이 사실도 따로 설명해주지 않았겠지.’
보이지 않는 요정이 어쩐지 낄낄 웃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너는 알현하려던 일은 잘 해결됐고?”
“아아. 대충.”
파올로가 계단 앞에서 팔을 내밀었다. 나는 얌전히 그 팔을 붙들었다.
“오빠, 깜빡하기 전에 말하는 건데.”
“엉?”
“나 오늘부로 황녀님 유모로 임명받았어.”
“그래, 유모…… 잘됐, 네…… 가 아니라! 무슨 소리야? 왜 알현하러 갔던 애가 갑자기 유모가 돼서 나타난 건데?”
“뭘 또 놀라고 그래. 이게 놀랄 일인가.”
“그럼 안 놀라?”
“이 나이 먹고 황녀님 놀이 친구가 됐던 건 안 놀랍고?”
파올로가 입을 다물었다. 너도 그쪽이 더 어처구니없었지?
“끙, 사실 네 나이를 생각하면 놀이 친구보다는 차라리 그쪽이 더 맞기야 한데…… 그렇긴 한데…….”
우리는 그래도 이상하다, 이미 임명받은 걸 어떡하냐 하는 얘기로 투덕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물론 여기서 끝은 아니었다.
잠시 뒤 외출에서 돌아온 부친이 이 얘기를 듣고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임명된 걸 어쩌랴. 무려 지엄하신 황명이란 말씀.
난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몸이 좋지 않을 때는 출근하지 않기로 조율했다.
이 정도는 래빗도 양해해줄 터였다.
‘다만, 그럴 일은 없다는 거지.’
앞으로 몸이 나빠지는 건 오히려 나가지 않았을 때 그럴 테니.
자기 전, 나는 누워서 생각했다.
“쥬, 쥭지 마라. 살기로, 살기로 해짜나!”
내가 피를 토하자마자 삽시간에 흐려지고 울먹이던 얼굴.
“지, 짐을 두고 가지 마라!”
래빗은 사실, 다시 태어나 누구에게도 의지하고 싶지 않았던 거고, 현생을 살고 싶지 않을 만큼 전생에 사로잡혔던 거구나.
너무나도 어린 아기 황녀님은 다시 태어나서도 과거에 짓눌려 있던 거였다.
전생에서 벗어나지 못해, 래빗으로서는 전혀 성장하지 못한 채. 아니, 스스로 그 성장을 완전히 거절한 채로.
그러나 태어난 이상 평생 전생의 모습으로 살 수는 없다.
이제야 이 이야기 속 진정으로 일그러진 부분이 확실하게 보였다.
그러니까 이제는…….
과거의 힘든 기억들을 잊고, 행복만으로 가득 찬 황녀 래빗의 삶을 살길 바랐다.
‘사람은, 현재를 살아가야 해.’
분명 내가 받은 퀘스트는 황녀님이 가족들에게 가진 호감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건 근본적으로 황녀님이 래빗으로 살 준비가 되어야 했다.
사랑받기 위해 억지로 아이가 되라는 것이 아니야. 진짜 ‘래빗’이 되길 바라는 거지.
혹시나 요정이 들을까 봐 나는 말조차 꺼내지 않고 무수히 많은 생각 속에 진심을 감췄다.
외로움과 슬픔에 잠긴 ‘로아타’란 성 대신, 웃음과 행복이 넘치는 ‘래빗’의 성을 만들자.
아무도 오지 않는 성은 차차 낡아 갈 뿐이니까.
그러니.
‘래빗을 그 성에서 꺼내는 게 먼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