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31)
* * *
“황녀님, 저희 소풍 가요!”
다음 날, 나는 래빗의 처소에 들어가며 크게 외쳤다.
어젯밤 잠들기 직전까지 열심히 생각한 끝에 짜낸 방안이었다.
이곳은 래빗이 자신을 전생에 가둬 두기 위해 만든 공간이었다. 그래서 여기에는 래빗 스스로 고른 물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변화하라고 종용하면 거부감이 들겠지.’
취향에 맞는 물건을 골라 거처를 꾸미게 하는 건 차차 하기로 하고, 일단은 바깥으로 나가서 사람을 좀 더 만나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받는 감각을 알게 해 주고, 또 나간 김에 황실 가족과도 만나게 하자.
‘일타쌍피!’
육아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육아물을 더없이 사랑했던 고인물 독자로서 어떤 사명감이 들었다.
물론 클리셰대로라면 가족들을 이곳으로 오게 하는 편이 더 좋겠지만.
메인 퀘스트를 깨는 것이 우선이니 이 정도는 문제 되지 않을 거다.
‘요정, 모로 가도 메인 퀘스트를 깨기만 하면 되는 거지? 만약 내가 좀 과격한 방법을 쓰면 어때?’
[요정이 고개를 갸웃해요.]
‘예를 들면 내가 황제에게 래빗이 환생했다는 걸 말하면?’
[빙의자 님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필요 이상의 클리셰 파괴엔 페널티가 주어져요! ( ง ᵒ̌ ∽ᵒ̌)ง⁼³₌₃ ]
‘반대로 메인 퀘스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바뀌는 건 어때? 약-간 말이야.’
[원작과 완벽히 같지 않아도, 원작을 지키기 위한 선이라면 요정은 괜찮다고 말해요! ٩(ˊᗜˋ*)و]
“됴풍?”
래빗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해석하자면 ‘그 귀찮은 걸 대체 왜 가자는 거지?’ 하는 정도의 표정이었다.
무슨 주중에는 야근에 시달리느라 주말엔 외출을 꺼리는 직장인 같은 눈빛을 하시는지.
“뇨즘 절믄 애들은 그로케 노나?”
“젊은 애들…… 제가 젊은 거면 황녀님은 어리신 게 아닐까요?”
“흐움, 나 떄눈 전쟁 한 본 나가면 한동안 뻗어서 아무것도 못 해써. 떼잉.”
나는 오랜만에 느끼는 진한 중년의 향기에 그저 허허허, 웃었다.
“아, 눕지 마세요! 언제는 체력이 넘치셨다면서요!”
“그곳도 다 옛날얘기지. 말년에눈 허리가 쑤셔서 원.”
래빗은 누운 채로 허리를 통통 두드려 보였다. 난 이마를 짚고 끙, 숨을 내쉬었다.
“……끄으응, 머리 아프네요.”
내 모습을 본 래빗이 화들짝 놀라더니 얼른 소리쳤다.
“아푸냐!”
“네?”
“오디가 아푼 고지?”
“네? 저 지금 그냥.”
“신음울 내짜나!”
“……한숨 쉰 건데요?”
래빗은 다급한 표정이었다.
“숨쉬기 오렵다는 건가? 그론고지?”
“숨쉬기가 왜 어려워요?”
“구야 넌 아푸니가!”
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나가떨어진 모습을 보였었지? 많이 놀랐구나.
“저 안 아파요, 황녀님.”
“……들은 대로군, 숨길 고라더니…….”
“네?”
래빗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 틈을 타서 소풍을 가자며 래빗을 좀 더 졸라 보았다.
그러나 래빗이 조금 전까지 내 상태를 살핀 게 거짓말이라는 듯 휙 돌아누웠다.
“아아, 소풍은 좋은 거라니까요?”
“됴풍은 먼 됴풍이야. 이불 바끈 위험하다!”
“거짓말 마세요!”
그 위험, 딸랑이로 다 때려 부술 수 있으면서!
한창 실랑이하다 철퍼덕 옆에 주저앉았다. 끙,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래빗이 움찔하더니 눈치를 슬쩍 보았다.
“지굼, 속상해하눈 거냐?”
“속상해한다고요? 제가 왜요?”
“……아니라구?”
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얼른 속이 상한 척을 했다.
“아니, 조금 속상한 것 같기도 하고…….”
“…….”
“래빗 황녀님, 저는 황녀님이랑 저기 꽃핀 곳에 가서 맛있는 거도 먹고 산책도 하고 싶어요.”
“그곤 내 정원에도 할 수 이따.”
“음…… 황녀님의 정원엔 꽃이 없잖아요. 꽃이 어린이의 정서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데요!”
“그론 말운 처음 들어 보눈데?”
“당연히 처음 들어 보시겠죠. 전생에도 거의 정치학, 제왕학, 병법서만 읽으셨을 거잖아요.”
“…….”
앗, 찍었는데 진짠가보다.
“육아에 대해서는 제가 더 잘 알걸요?”
내가 덧붙이자, 래빗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일생일대의 비밀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심각해진 얼굴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아으, 볼 한 번만 찔러 보면 안 되겠지? 딸랑이가 날아오면 안 되니까 참자.
“크흠, 지금 당장 가자는 건 아니구요. 나중에요.”
적당히 회유하면서 흘끗 방 안을 둘러보던 난 탁자 위에 그대로 놓인 빵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내가 여기 도착한 것이 마침 점심시간쯤이니, 저 빵이 황녀의 식사 아닌가?
“표정이 왜 구로냐?”
“래빗 황녀님! 지금 한 끼도 못 드신 거예요?”
“내가 왜 식샤를 모테?”
“음식이 그대로잖아요!”
“아, 그고. 오눌은 그놈이 다룬 걸 가져다 조따.”
그놈?
“설마 2황자님이 식사를 가져다주셨다고요?”
“그래, 그놈.”
다행히 그놈이란 단어 정도로는 건강 수치가 내려가진 않았다.
그나저나 그 2황자가 음식을 손수 가져다줬단 말이야?
“2황자님은 여기 못 들어오시는 거 아니었나요?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구랬지. 군데 어제 허락했따.”
오, 그거참 잘된 일이긴 한데. 왜 그 말을 하시면서 나를 빤히 보시는 걸까요?
“모두 너 때문이댜.”
“저 때문이라니요? 설마, 2황자님이 협박이라도 하셨어요?!”
래빗은 살풋 귀엽게 입을 오물거렸다. 마치 할 말이 있지만 차마 못 하겠다는 표정이랄까.
“아뉘, 아니, 아니다.”
래빗이 이마를 긁적이다가 끄응 하고 뱉었다.
“정정하먀. 네…… 뎍뷴이다.”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인 듯 래빗이 본인의 곱슬머리를 잡고 뺨을 슬쩍 가렸다.
“그뇸은 괜챠눈 사람이더구나.”
청명한 눈동자가 맹목적인 빛을 담고 나를 응시했다.
“네가 아니어따면 평생 알지 못해께찌.”
‘요정의 창.’
[요정이 부름에 답합니다! 요정은 실시간 대기 중이라 말합니다! ヽ〳 ՞ ᗜ ՞ 〵ง]
‘혹시 퀘스트 진척 상황을 한 번에 볼 수 있어?’
[요정은 가능하다고 말해요!]
[퀘스트(메인) - ‘아기 황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자!’
내용: 100일 내로 황가 사람들의 호감도를 90 이상 달성
진행 상황:
1. 황제(폭군) : -120 / 90
2. 황태자(첫째 오빠) : 11 / 90
3. 2황자(둘째 오빠) : 77 / 90
4. 3황자(셋째 오빠) : 25 / 90
※남은 시간: 94일
보상: 건강 수치 +30, 다음 소설 힌트, 새로운 스킬, ???
실패 시: 사망]
어제 2황자의 품에서 잠들기 직전 비약적인 호감도 상승에 대한 알람을 들은 것 같은데 정말이었구나.
거기다 처음 볼 때만 해도 마이너스였던 3황자를 향한 호감도도 꽤 높아진 상태였다. 3황자에 대한 호감도는 같이 차 마실 때 오른 건가?
일단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기쁜 일이었다.
‘후, 일단 ‘황제’라는 최종 보스는 좀 더 나중에 생각하자.‘
생각해 보면 3황자는 래빗이 자기를 엄청 싫어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지.
어쩌면 다른 가족들도 각자의 이유로 그렇게 오해하고 있을 수 있으니,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해.
2황자의 태도나 황제와의 면담을 통해 짐작해 보면 래빗의 가족들은 저마다 래빗과 가까워질 수 없는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작은 아마 황제의 목을 그었다던 사건이었던 것 같은데, 이에 대해 더 알아보는 건 파올로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은 좀 다른 걸 해 보기로 했다.
원작을 떠올려 보면 이맘때쯤 아기 황녀님이 원하는 걸 하나씩 손에 넣어야 했다.
정확히는 아기 황녀님을 아껴주기 시작한 가족들이 스케일 크게 선물을 하나씩 턱턱 안겨 줘야 하는데…….
지금 이 거처를 보라. 이 무소유 정신의 총체를! 내 육아물은 이렇지 않아!
이렇게 내버려 둘 순 없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이렇다.
첫 번째가 소풍을 핑계로 거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 특히 가족들을 만나 보는 거라면,
두 번째는…….
“래빗 황녀님, 혹시 갖고 싶은 거 없으세요?”
“없눈데.”
나는 얼른 끄덕이며 손을 펼쳤다.
“그럼 하고 싶은 일은요?”
“없눈데.”
“좋아요, 그럼 하고 싶은 일은 소풍으로 하고.”
“나눈 동의하지 않아따만.”
“……싫으세요?”
“…….”
턱 밑에 양 주먹을 대고 글썽거렸더니 래빗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자세룰 그러케 하눈 거지?”
“황녀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실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요?”
이제 래빗에게 애교를 가르칠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우리 래빗에게 애교를 부리고 말지!
래빗의 표정이 이번엔 떨떠름해졌다.
“그론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말을 들어준단 말이더냐?”
“음, 높은 확률로요? 누가 하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예를 들어 털이 숭숭 난 산적 같은 아저씨가 이런 행동을 하면 미쳤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일단 귀여울수록 더 효과가 좋죠. 저랑은 안 어울려요?”
“글쎄, 손목이 톡 치묜 부러질 거 가따는 생각운 했다.”
“그런 거 말고요.”
내가 좀 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눈마저 깜빡이자, 래빗이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미인이라눈 골 보여 주눈 곤가? 나눈 예쁜 거도 시로하지 않아.”
“아…… 감사합니다?”
“그래소 이론 걸 어디에 쑤려는 거냐?”
래빗이 고민하다 말고 손뼉을 쳤다.
“아, 아니면 혹시 네가 이러케 하묜 둘째 놈에게 효과가 있울지 묻눈 건가?”
“네?”
“구래서 2황자 구놈이냐, 아니면 황태자냐?”
“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