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32)
“사내둘의 심정을 뎡확하게눈 알 수 없다만, 랄린 너 정도의 미모라면 혹할 곳이라 생각한다.”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래빗이 빠르게 내뱉었다. 어쩐지 준비라도 한 것 같은 멘트라 나도 모르게 멍하니 들었다.
“내가 할 말운 아니지만, 둘 중에 고루라묜 황태자가 그나마 이 황송에서 제일 나운…….”
“잠깐, 잠깐, 잠깐만요!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나는 사색이 되어서 얼른 래빗의 입을 막았다. 사, 살았다! 건강 수치 떨어진 거 없지? 알람 없었지?
아기가 욕설을 뱉는 것처럼, 클리셰를 벗어난 적절치 못한 발언은 건강 수치를 떨어뜨린다.
같은 맥락으로 보건대, 혹시 조연인 내가 황자랑 로맨스로 엮인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건강 수치가 폭망할지도 몰랐다.
가뜩이나 아기 황녀님 바로잡기도 어려운데 괜히 어려운 길로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암. 황녀님에게 어리광 한 번 슬쩍 보여 드리려다가 하마터면 사망 플래그를 세울 뻔했네.
“오해하지 마세요. 전 황태자 전하랑은 얘기해 본 적도 없어요!”
“그롬 2황자 그놈인가……? 취향이 조금 독툭하군?”
“제 취향이 어때서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가 이번엔 황급히 내 입을 막았다. 아, 취향 소리에 급발진해 버렸다.
사실 2황자의 외모만큼은 남주 후보 초상화 컬렉션에 포함되었을 만큼 내 취향에 들어맞지 않았던가.
물론 그렇게 보편적인 취향까진 아니라는 점은 나 역시 인정한다.
“그놈운 너무 사납게 생기지 않았나?”
“요즘은 그렇게 눈꼬리가 올라간 게 인기예요!”
“세상이 마니 바뀐곤가?”
“황녀님 때랑 비교하면야 좀 변했지만 그렇다고 미의 기준이 어디 가겠어요? 다시 떠올려 보세요, 어쨌든 미남은 미남이잖아요.”
“흐움, 성질 나뿐 기생오라비처럼 생겻눈데.”
아니, 왜 이렇게 박하세요. 본인 둘째 오빠인데.
“뭐, 취향이라면야 말리진 않게따.”
“네? 아뇨, 그렇다고 또 연애 대상으로 보는 건…….”
“그러고 보니, 그놈이랑 만나면 나랑운 가족이 되눈 건가?”
잠시지만 래빗의 눈에 반짝 이채가 스쳤다.
“허락하게따!”
“예? 황녀님이 뭘 허락을 하세요!”
“넌 내 슈하가 아니더냐.”
그건 맞는데……. 나는 더 불리해지기 전에 얼른 말을 돌리기로 했다.
“구리고 둘째 놈도 생각이 없눈 것 같진…….”
“와하하하하하!”
“모냐! 왜 갑자기 손잡고 잡아당기눈 거냐?”
“아뇨, 일단 일어나시라는 의미에서…….”
나는 하하하하, 웃으며 얼른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황녀님, 정말 갖고 싶은 건 없으세요?”
띠링-. 마침 반갑게도 반가운 알람이 울렸다.
[퀘스트가 도착했어요! ˚✧₊⁎( ✿˘◡˘✿)⁎⁺˳✧༚! ]
[퀘스트(서브) - ‘저 하늘의 별도 따다 줄게!’
본래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고 많은 것을 가져야 마땅한 아기 황녀님!
하지만 세계가 뒤틀어져서, 아직까지 원하는 걸 쥐어 본 적 없어요, 아기 황녀님이 바라는 걸 들어줍시다!
내용: ‘주인공(아기 황녀)’이 바라는 것을 3가지 묻고 들어주자,
보상: 건강 수치 +3, 선택한 주요 인물(‘주연’)을 향한 ‘주인공’의 호감도 상승 (수치는 ‘주인공’의 만족도에 따라 확정)
※본 퀘스트는 연계 퀘스트입니다.]
연계 퀘스트? 이런 것도 있었나.
하긴 래빗이 황제의 영혼을 가졌다고 해서 아이가 가질 법한 욕망 자체가 없는 건 아닐 거다.
거의 죽어 버린 것 같기는 하지만, 이 퀘스트가 그 욕망을 다시 살릴 기회인지도 몰라.
‘이걸 살리는 게 내 몫이고.’
적국에 태어났다는 걸 인지한 뒤로 자기 자신 자체를 거부해 온 래빗이니, 가지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욕망에 대해서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나 있을까.
본디 아이라면 떼도 쓰고, 바닥에 나뒹굴면서 생떼도 써 보고! 그래야 하는 법인데, 쯧.
“황녀님, 정말로 없으세요? 가지고 싶은 거요! 해 보고 싶은 거도요!”
“……없댸도?”
내가 강력하게 주장하자 래빗은 그제야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이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저는 황녀님의 유모라구요. 황녀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드릴 의무가 있어요!”
“뉴모? 언제 뉴모가 되었나?”
“아, 황제 폐하께서 제안해 주셨어요.”
“머? 설먀 그놈이 널 협빡했나!”
[이런, ‘주인공(아기 황녀)’의 ‘폭군’을 향한 호감도가 소폭 내려가요. (╯•﹏•╰)]
앗, 잠깐, 안돼!
“아뇨아뇨아뇨! 협박이라뇨! 오히려 제가 강력하게 원했던 상황이에요. 제가 의도했다고나 할까요?”
“으도?”
“네, 생각해 보세요. 전 처음에 놀이 친구였잖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보니 사교계에서 제 평판이 좋지 않아질 것이 염려되어 건의 드렸는데, 자비로운! 폐하께서! 기꺼이 들어주신 거죠.”
“아…… 내 놀이 친구룰 하눈데 왜 네 평판이 안 죠아진다는 고지?”
“아무래도 놀이 친구는 나이가 비슷한 아이가 맡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제가 하면 밖에서 보기 좀 그렇죠?”
래빗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쿤……. 친구가 있었던 적이 없어서, 몰라써.”
“예? 친구가 없으셨다니요?”
“철이 들 무렵부터 정복 전쟁으로 바빳우니까.”
전생에서도 형제자매는 일찍이 적이었으며, 주변엔 심복과 부하밖에 없었다고.
래빗의 오래된 결핍에 한 걸음 다가간 기분이었다.
“좋아요, 그럼 원하시는 걸 한번 말씀해 주세요, 황녀님! 이렇게 된 거 큰 거든 작은 거든 제가 뭐든 해 드릴게요! 유모가 아니더라도 전 수하잖아요. 그리고 친구도 할게요!”
래빗이 작게 웃었다. 살포시 퍼지는 웃음에 어쩐지 수줍음이 섞인 것 같았다.
“넌 참 이상하군, 엠버넷. 아니, 롤린.”
아무래도 우리 황녀님은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르실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자, 이제 말씀만 해 보시라. 그게 무엇이든 세 가지 소원을 들어 드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
“보약울 머거라.”
“네?”
그러나 래빗의 입술 사이로 첫 번째 소원이 흘러나온 순간, 나는 그 각오에 와그작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황당함 때문에.
“내가 바라눈 건 롤린 네가 보약울 마니 먹눈 거다.”
“저요? 제가요?”
“너눈 너무 약하다! 갓 태어난 토끼도 너보단 강할 거다.”
[퀘스트(서브) - ‘저 하늘의 별도 따다 줄게!’
‘주인공(아기 황녀)’이 첫 번째로 바라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들어주시겠어요? ٩( ᐛ )و]
“어, 네에. 그게 바라시는 거라면야…… 할게요, 하는데…… 진짜 그걸로 되겠어요?”
“웅, 그로타.”
“뭐…… 그래서 제가 뭘 먹으면 되는데요?”
나는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래 백작 저에서도 수없이 많은 알약을 먹어 왔다.
약 먹는 건 솔직히 고역이었지만 래빗이 바라는 일이라면 이 정도는 거뜬히 들어줄 수 있다. 오히려 한 번만 참으면 되니 쉬운 일이겠네!
“요줌도 바실리스크의 내쟝이 보약인가?”
“……예?”
“냐 때눈 마리야, 해룡의 콩팥이 최고에 명약이어찌. 시간이 지난 지굼도 같울려나?”
“뭐의 콩팥요?”
그래,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이 아기 황녀님 입에서 세상 처음 듣는 기이한 괴물의 이름들이 나오기까지는 말이다!
“저어, 황녀님 저 그거 괴물 도감에서 본 거 같은데…….”
“그로치, 인간울 괴롭히는 놈들이다.”
“그걸 먹으라고요?”
“편식하나? 원래 몸에 조운 건 입에 쑨 법이야.”
“아니, 편식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 아기가! 지금 내게 뭘 먹이려는 거야!
[앗, ‘주인공’이 첫 번째로 바란 것을 포기하시겠어요?]
[포기할 시에는 페널티를 받습니다! ⌒(o^▽^o)ノ゚ 건강 수치 –10]
페널티가 너무 큰데?!
“……뭘 먹으면 된다구요?”
그래, 래빗이 로아타 황제일 때 살아 있던 괴물들이라면 지금에 와서는 사라졌을 수도 있잖아?
우선은 래빗의 첫 번째 부탁은 일단 재료가 도착해야 가능했기 때문에 실행하는 건 뒤로 미뤄졌다.
“그래요, 황녀님. 첫 번째는 그렇다고 치고, 두 번째는요? 또 없으세요?”
“왜 자꾸 묻눈 거지?”
“그동안 이런 걸 묻는 사람이 황녀님 곁에 없었을 테니까요.”
“…….”
“제가 3년 치 질문 모두 드리려구요.”
어떻게 3년간 이 거처에는 제대로 된 시녀나 시종 하나 없이 순전 괴롭히는 사람만 있었나.
하기야 보통은 그런 게 육아물의 클리셰지. 주인공이 가족들의 도움을 받기 전까진 온갖 불행만 겪는 것.
거기다 래빗은 성격상 다정한 유모 같은 사람도 곁에 두지 않았다.
“왜 표뎡이 심각해져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래빗 황녀님께는 어떤 리본이 어울릴까 고민했죠.”
“그론 건 조도 안 해.”
“앗, 왜요! 예쁠 텐데! 힝, 안 하시려고요? 진짜?”
“……생각운 해 보게따.”
내가 입을 가리고 절망 어린 표정을 짓자, 래빗이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마지못해 끄덕였다. 난감해하는 것마저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고, 꽤 효과적인 것 같군.”
“뭐요? 아, 주먹을 입에 가져다 대는 거요?”
“구래. 들어주고 싶오져따.”
야생의 래빗이 애교의 효용을 깨달았다!
딱히 강요할 생각은 없었는데, 래빗이 호기심을 가지게 된 듯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래빗의 손을 잡아 은근슬쩍 턱 밑에 대 주려다가 살벌한 시선을 받고 잽싸게 그만두었다.
음, 본인이 직접 하고 싶은 건 아니었군.
“그래서 제가 이상한 걸, 아니, 보약을 먹는 건 재료가 다 준비 된 뒤에야 할 수 있겠고요. 다른 건요?”
내가 빤히 쳐다보자, 래빗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갖고 싶다.”
“……뭐라구요?”
그리고 이윽고 대답을 들은 난 과연 이대로 괜찮은 건지 살짝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의문이 아주 많이 들었다.
“검이 갖고 싶다고 해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