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33)
[퀘스트(서브) - ‘저 하늘의 별도 따다 줄게!’ ‘주인공’이 두 번째로 바라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들어주시겠어요? ٩( ᐛ )و]
“검이요? 어떤 검을……?”
“나눈 가끔 전장이 그립다. 그곳에 있돈 전튜! 검! 살육! 생명의 위기! 피!”
“……부탁인데 그만 말씀하세요.”
건강 수치 떨어질까 봐 무서워요, 흑흑.
드디어 래빗이 두 번째로 바라는 걸 말했는데. 게다가 본인이 진짜 갖고 싶어하는 걸 말했는데. 선뜻 들어주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소설이 육아물의 클리셰대로 흘러가도록 바로잡는 메인 퀘스트를 진행 중인데.
서브 퀘스트로는 단어만으로도 육아물과 백만 광년쯤 거리가 있어 보이는 ‘검과 피’를 주인공에게 가져다줘야 한다니.
이거 서로 충돌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들어주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는 건데? 그냥 서브 퀘스트에 성공하는 거야, 아님 클리셰를 벗어나서 메인 퀘스트에 실패하는 거야?
들어주느냐, 완곡히 거절하느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곧 결정을 내렸다.
내가 바라는 건 래빗이 ‘래빗’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면서 가족들과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메인 퀘스트도 깨는 것.
‘그리고 웬일인지 아직 요정의 창도 조용하니 말이야.’
요정이 가만히 있는 걸 봐선 래빗의 두 번째 소원이 시스템이 정한 범위를 벗어나진 않는다, 이거겠지.
들어주자.
“그, 황녀님. 제가 없는 전투를 만들어 드릴 수는 없을 것 같고.”
“알고 이써. 그리고 뭐, 전투 같은 곤 이미 하고 있다.”
아, 암살자랑 싸우는 걸 말하는 건가 보다.
오두막에 널브러져 있던 암살자를 떠올리는 순간 기분이 확 나빠졌다.
“롤린?”
“아니에요, 황녀님.”
정신 차리자. 내가 앞으로 진행하려는 방향은 솔직히 외줄 타기나 다름 없다.
클리셰 페널티를 받지 않으면서도 래빗이 스스로 행동하도록 만든다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내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이니 요정의 창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편이 안전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기 황녀님의 의사를 무시한 채 무턱대고 퀘스트만 진행하고 싶진 않아졌다.
이 소설의 내용이 조금씩 떠올랐다. 솔직히 내가 내 목숨이 달린 일만 아니었다면, 좀 더 이 내용에서…….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얼른 멈췄다.
‘소름 돋았어.’
어디선가 느껴진 시선에 순간적으로 오싹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실제로 쳐다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떤 무형의 존재가 그 이상은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한 느낌. 그래, 분명 경고였다.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누구겠어. 요정이겠지.’
나는 욱하는 마음을 꾹꾹 눌렀다.
[요정이 빙의자 님을 바라보며 웃고 있어요. ( *ฅ́˘ฅ̀*)]
네가 원하는 대로만 하게 두진 않을 거거든.
이런 반항적인 생각을 가슴 아주 깊숙이 꾹꾹 눌러 놓으며,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기사가 주군 앞에서 서약하는 듯한 자세가 됐다.
“래빗 황녀님. 제가 맹세 하나만 할게요.”
“엥? 맹세? 갑쟈기 말이더냐?”
“어떤 맹세는, 갑자기 나와요. 그렇기에 진심으로 흘러나오기도 해요.”
래빗의 말간 두 눈이 나를 향했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가 봤던 영화관에서 커다란 스크린 속 홀로 빛나는 주인공을 마주했을 때 이런 기분을 느꼈지. 정말 반짝거린다고.
지금이 꼭 그랬다. 어둡고 고요한 가운데 오직 아기 황녀님만 보였다.
“앞으로 황녀님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는 당신 편이에요.”
메인 퀘스트를 깨지 않으면 죽는다.
퀘스트가 내게 알려 준 것은 그것뿐이었다.
왜 래빗이 전생을 기억하게 됐는지, 로아타 황제의 자아가 너무나 비대한 나머지 이 삶을 체념해 원작이 멈춰버렸는지,
그리고 그런 일들이 이 소설이 원작에서 벗어나 다르게 흘러가게 된 것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무엇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굳이 내가 알 필요 없는 일이라는 듯.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내게 주어진 임무. 원작에서처럼 주인공이 가족들과 다시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것뿐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을 거야.
퀘스트를 마치기 위해 클리셰 안으로 무작정 당신을 밀어 넣는 게 아니라, 당신의 옆에 서서 네 편이 될 거야.
“…….”
래빗의 눈에 별빛이 서린 것 같았다.
아기 황녀님이 까치발을 들더니 내 머리 위에 자그만 손을 올렸다.
“……이미 그론 줄 알았눈데.”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했나요?”
내게 말을 거는 목소리에서 배어나는 물기와 미약한 떨림을 나는 눈치챘다.
“짐운, 다쉬 태어나도 사람 보눈 눈이 좋지.”
“아무렴요, 누구의 황제신데요.”
“구래…….”
래빗이 고개를 숙인 채로 껄껄 웃었지만 지금 만큼은 아이답지 않은 웃음소리에 대해 뭐라고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래빗이 애써 ‘난 지금 웃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으니까.
“그래요, 황녀님. 그럼 다시 한번 원하는 걸 말씀해 주시겠어요?”
잠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가 말하자, 눈물을 겨우 참고 있던 래빗의 눈이 환하게 휘어졌다.
“검이다. 이 방을 채울 만큼 아주 많운 검!”
……예? 그렇게 많이요?
큰일 났다.
갑자기 소원의 난이도가 훅 올라 난감했지만, 그렇게까지 말한 이상 내 입장에서는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우리 래빗이 처음으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데 어쩌겠나! 들어줘야지.
“오떤 검울 줄 거냐? 레이피오? 바스타드 소두? 나눈 숏소두도 좋아한다. 찌루기 좋지.”
“음,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검들이긴 하네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갓 쪄낸 찐빵처럼 몰랑몰랑한 뺨이 너무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데……. 입을 열 때마다 움찔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해맑게 웃는 얼굴로 검! 살육! 전투! 피! 같은 살벌한 단어를 외치는데 누가 움찔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물론 래빗이야 과거 황제 시절의 영광을 떠올리며 얘기한 거겠지만, 그런 것 치고도 고르는 단어가 무척이나 거칠었다.
어쨌거나 래빗의 두 번째 소원을 들어주려니 처음부터 자잘한 문제에 부딪혔다.
래빗의 거처에는 아직 새로운 시녀들이 정식으로 배치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당장 필요한 것들은 임시로 배정된 시녀들이 새벽마다 다녀가며 처리하고 있었다.
‘직접 가야겠네.’
검을 요청하려면 내가 래빗의 궁을 벗어나 저 멀리 떨어져서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에게 직접 말을 해야 했다.
다행히 래빗은 시종들이 궁으로 검을 나르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하기야 그 검들을 나나 래빗이 다 들고 갈 수는 없으니까.’
래빗이 힘이 세긴 했지만 신체적 한계는 명확했다. 저렇게 조그만 손으로 쥘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는가.
이윽고 래빗의 거처로 누군가 나타났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깔끔한 차림의 노신사였다. 그는 자신을 서쪽 구역의 시종장이라 소개했다.
서쪽 구역이라면 래빗의 궁을 포함한 서쪽의 모든 궁을 아울러 관리한단 소리였다.
난 분명 호위병에게 종류는 상관하지 말고 있는 대로 검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시종장은 왜 빈손이지?
“바라시는 것이 있으시다, 이 말이지요?”
“음?”
저 인간 말투가 왜 저래?
내가 황당함에 눈썹을 찡그리자, 오히려 저쪽이 더욱 인상을 찌푸리는 게 아닌가.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최근에 이 궁에서 시녀고 시종이고 쫙 소집된 이유를 모르는 건가?
아, 아니면 설마 이거, 그건가?
장르 불문 로판 첫 챕터에 항상 등장하는 조무래기 악당?
여기서 말하는 조무래기 악당이란 대충 이런 식이다.
육아물에서 아기 주인공을 괴롭히는 시중인 또는 먼 친척이라거나. 빙의물이면 눈을 뜨자마자부터 주인공의 몸에 다른 영혼이 빙의한 줄 모르고 괴롭히는 하녀라거나. 자매품으로 뺨을 맞는 하녀도 있다.
[요정이 빙의자 님의 눈치에 감탄합니다! ˚✧₊⁎( ˘ω˘ )⁎⁺˳✧༚]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1 오릅니다! 현재 건강 수치: 26]
그래, 컨디션이 좋다. 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요정이 내게 건강 수치를 선물한 것에 대해선 이깟 송사리는 알아서 처리하란 소리로 받아들이면 되려나.
아니, 그 뜻이 아니어도 쫓아내야지.
“그래, 맞아. 내가 그대를 불렀어. 검을 좀 가져다줬으면 좋겠는데.”
“검이요?”
“요즘 시종장들은 모시는 분의 분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라고 교육받나 보지?”
내 눈초리가 날카로워지자, 시종장이 잠시 움찔했다.
대대적인 시녀 교체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는 건 둘 중 하나다.
황제와 황자들이 일부러 은폐했거나, 저 시종장이 소식을 아직도 접하지 못했을 정도로 귀가 어둡거나.
“지금 감히 이 지엄하신 황녀님의 거처에 검처럼 위험한 물건을 들여놓겠다는 겁니까?”
래빗은 심드렁했다. 아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얼굴이었다. 한마디 질책도 없이 체념하는 게 가슴 아팠다.
“그 지엄하신 황녀님께서 직접 하명하신 일이거늘. 지금 반대하겠다고 나선 건가?”
“겨우 세 살 난 황녀님께서 무얼 아신다는 겁니까. 온종일 사탕이나 빨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요. 오히려 그쪽이 순진한 황녀님을 상대로 공갈을 친 것 아닙니까?”
허. 뭐야, 이 인간이?
그 순간 래빗의 눈에 미묘한 기운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래빗의 앞을 슬쩍 막았다.
자자, 래빗. 무서운 딸랑이는 내려놓고, 가끔은 너도 어른의 든든함을 한번 느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