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34)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린 뒤 손으로 입술을 가볍게 훔치며 기선 제압을 시도했다.
“허,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시종장이 잠시 놀라는 듯하더니 이윽고 내 얼굴을 빤히 쏘아봤다.
“지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렇게 불손한 말을 하는지 참 궁금하군.”
“그거야, 황녀님의 ‘놀이 친구’ 아니십니까? 성인 놀이 친구라, 참으로 놀랍긴 합니다만.”
음, 역시 이쪽은 조무래기 악역이었나 보네.
로판 속 조무래기 악역은 로판 매뉴얼대로 해치워 줘야지. 나는 픽 웃었다.
“나는 황녀님의 유모다.”
“……뭐?”
“나는 황녀님을 보호하기 위한 경우에 한해서는 황족에 준하는 위치와 권한을 갖지.”
로판 세계는 권력과 계급이 깡패야, 알겠어요, 아저씨?
“황녀님께 이런 불손한 태도라니, 폐하께서는 그대의 이런 방자함에 대해 아시는가?”
“유모라니, 그에 대해서는 전혀 전달받지 못…….”
“못했겠지. 그대 같은 이들을 가려내기 위해 비밀리에 임명한 것이니까.”
아, 이럴 때 손에 부채 하나만 들고 있었어도……. 나는 아쉬운대로 입을 슬쩍 가린 채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곤 고개를 뒤로 살짝 젖혔다.
분명 ‘달린’의 첫인상은 연약하고 순진한 귀족 영애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귀족으로 태어난 이 특유의 여유와 품격이 작은 몸짓 하나에서도 묻어났다.
눈을 뜬 바로 뒤부터 내 몸은 하녀들이 시중드는 것에 아주 자연스럽게 적응했다. 마치 처음부터 모두 가지고 태어난 재벌가의 일원이라도 된 듯했으니까.
나는 시종장을 차갑게 내려다봤다.
“이쯤 되면 더는 말하지 않아도 좋겠지?”
“…….”
“아니면 내가 황제 폐하께서 직접 붙여 주신 사람인 걸 어디 한번 친히 확인해 볼 텐가?”
내 눈이 휙 휘어졌다.
“기사를 부르는 건 어렵지 않아.”
그러자, 그제야 시종장이 주춤하며 기 싸움에 져서 물러나 우물쭈물 고개를 숙였다.
들리지도 않게 중얼거리는 대부분이 두서없는 사죄였기에 나는 시종장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그를 즉시 내보내며 처음의 지시대로 검을 가져오게 했다.
허둥지둥 나서는 시종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라 다행이에요. 그죠, 황녀님!”
“…….”
“황녀님?”
래빗이 왜 이런대?
내가 한 말을 듣긴 한 건지, 아기 황녀님이 조금 멍하다 싶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너어…… 갓 태어난 토끼인 듈 아라떠니…….”
“네?”
느닷없이 래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납득하기라도 했다는 듯 어째서인지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뭔데, 저 표정은?
“이빨은 있눈 토끼였군. 어디 가소 힘없이 맞고 있지눈 않겠오.”
“저, 인간도 이빨은 있는데요?”
사람은 이빨이 아니라 이 내지는 치아라고 하지만, 아무튼 간에 말이다.
그러나 래빗은 더는 말하지 않고 그저 뿌듯한 얼굴로 나를 꾸준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 모습이 흡사 처음으로 뒤처리를 해낸 아기를 보는 조부모의 표정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그나저나 저자도 쫓아내야겠네요.”
“웅? 머하러?”
“저런 사람을 굳이 관리자로 둘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장담하건대, 저 인간의 관리 소홀 때문에 암살자가 찾아오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을 거다. 덕분에 암살자가 한 4할은 더 늘었을 거야.
“……바주는 게 아니었나?”
“뭐 하러요?”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래빗이 먼저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대로 하라며.
하긴 이럴 것 같긴 했다. 주변 관리엔 통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까.
“래빗 황녀님.”
나는 래빗 앞에 쪼그려 앉았다.
래빗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봤다.
“저 완전 잘했죠? 헤헤.”
나는 래빗에게 손가락을 내민 채로 씩 웃었다. 검지와 엄지를 조절해서 하나의 모양을 만든 채였다. 이른바 ‘손가락 하트’였다.
“이게 모지?”
“아, 이거요? 하트인데, 손가락을 이렇게 이렇게 겹치는 거예요. 보이시죠? 이러면 하트 모양이 만들어져요.”
“으음? 그러쿤?”
이 세계에서도 하트가 의미하는 바는 같았다.
물론 이런 식으로 하트를 만들어 보이는 동작은 아직 없는 것 같았지만. 지구에서 친구들에게 자주 하던 버릇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래빗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가락을 꾸물 움직였다.
“이로케 하눈 건가?”
“음? 그렇죠.”
“너무 쟉다.”
나는 씩 웃었다.
“하지만 네가 이골 하면서 그로케 웃으니까 사랑스로워 보여따.”
“그런가요?”
난 어깨를 으쓱였다.
“친구들에게 많이 했어요. 제가 잘못해서 봐 달라고 빌어야 할 때나, 너무 고마울 때라거나.”
“고마움, 이라……. 그롬 내가 네게 해도 되게꾼.”
래빗이 어설프게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표정은 진지했다.
“……곁에 있어 조소 고먑다.”
나는 멍하니 보다가 쑥스럽게 웃었다. 이게 바로 육아의 맛인가,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주책이야 진짜.
나는 하트를 만든 손가락을 그대로 움직여 포옥 래빗의 뺨을 아프지 않게 찔렀다. 어찌나 반사신경이 빠른지 바로 조그만 손에 붙잡혔지만.
“저 쓰러질 것 같아요.”
그대로 래빗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자, 래빗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어정쩡하게 팔을 뻗어 나를 안아 주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짐은…… 모루는 게 많았군.”
자신의 틀어진 하트를 보던 래빗이 침울하게 고개를 폭 숙였다.
“그러실 수 있죠. 바쁘셨잖아요.”
“아니, 그론 게 아니다. 짐운…….”
래빗이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분홍빛이 블랙홀처럼 잠시 깊어지는 것 같았다.
“나눈 무수히 많운 형졔, 자매둘 사이에서 암투룰 벌였꼬, 꿑내 부황이 먼저 스러진 자리에 올라따. 그 뒤로 평생 가족이란 걸 몰랐고…… 내 뒤룰 이운 아이눈 유일하게 살아남운 조카여찌.”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로아타 황제는 평생 혼인을 하지 않았고, 그 뒤를 이은 건 황위 싸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카로, 가족이라 부르기엔 냉랭한 사이였다고.
“그래소 이런 곤 익숙하지 않아. 고마움울 표현하눈 방법이라니…….”
나는 얼른 대답했다.
“곧 익숙해지실 거예요.”
래빗의 손을 잡고 말했다.
“사실 황녀님은 전생에 매우, 아주 매우매우 대단하신 황제 폐하이셨지만 지금은 아직 어린 황녀님이시잖아요. 언젠가 세상에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고도 하셨죠.”
나는 씩 웃었다.
“그렇기에 저는 황녀님께서 이 모습 그대로 활짝 웃으시는 모습을 좀 더 많이 보고 싶어요. 이렇게 태어나신 것에도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지금 이 모습에 한번 적응해 본다는 생각도 좋고, 한번 멋지게 살아본다는 생각도 좋고, 동기가 무엇이든지요.”
내 손에서 래빗의 어설픈 하트가 완전한 모양을 갖췄다.
세상에 처음부터 완벽한 건 없다.
이렇게 되풀이하다 보면 언젠가 완전한 모양을 갖추듯이, 네 삶도 그럴 거야.
“보세요, 짠, 완벽해졌죠? 제 손을 거치면 이렇게 된답니다.”
래빗이 빤히 보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흘러나온 웃음소리는 처마에서 흔들리는 작은 종소리처럼 맑았으며, 익히 알던 아저씨 같은 웃음이 아니라 좀 더 아이에 가까웠다.
* * *
잠시 후, 황녀의 거처에 많은 인원이 들이닥쳤다. 수많은 시종들이 래빗이 기다리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세상에, 이로케 발전했다니! 비센의 검은 날이 좀 더 길어져꾼!”
래빗은 성인도 들지 못할 것 같은 검을 보고 꺅꺅 좋아했다.
윽, 내 심장! 저절로 심장을 부여잡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닌지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문밖으로 나서는 순간까지도 시종들이 아닌 척 래빗을 훔쳐보고 있었다.
“아주 멋찌다, 롤린! 이거 바!”
“어어, 조심하세요, 검이 너무 큰데요!”
“아니다! 이 검의 멋찜을 모르다니! 불쌍하구나!”
[퀘스트(서브) - ‘저 하늘의 별도 따다 줄게!’ ‘주인공’이 ‘두 번째’로 바라는 것을 들어주었습니다! (달성도: 33%)]
흐음, 세 가지 중 하나가 달성되어서 33퍼센트인가? 나쁘지 않았다.
“황녀님! 잠깐, 잠깐만요!”
나는 황급히 래빗의 손목을 잡았다.
막 카펫을 베어 보려던 래빗은 찡그릴 뿐 뿌리치지는 않았다.
“우리, 물건은 부수지 말고 그대로 둬요, 네?”
“으움, 검운 써 바야 아는 거 아닌가?”
아뇨, 안 됩니다. 짐작일 뿐이지만, 검을 가지는 건 몰라도 검으로 뭔갈 부수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면 혹시나 건강 수치가 떨어질까 봐 걱정이 되거든요.
‘슬슬 요정의 패턴 같은 걸 알 것 같으니까.’
[요정은 아주 놀랐어요!Σ(゜ㅁ゜)]
[눈치가 빠르시군요? 보상으로 요정이 팁을 하나 드립니다!]
[Tip. ‘주인공(아기 황녀)’이 검으로 사람을 해칠 시, 페널티 발생!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대폭 떨어집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훌륭한 육아물 ‘주인공’은 살인하지 않아요! ✧٩(ˊωˋ*)و✧]
뭐야? 언제부터 훌륭한 육아물 운운했다고……. 일단 한발 앞서 요정의 창의 내용을 알게 된 걸로 만족하자.
‘예측 불가한 존재는 아니야.’
난 고개를 돌렸다.
“……랄린. 너무 좋구냐.”
으아아앙, 이렇게 홍조까지 띠고 좋아하시다니. 제가 다 기쁩니다!
“고맙댜.”
사람만 안 죽이면 된다는데, 물건 정도야 부숴도 되지 않을까?
벌컥!
그때였다. 누군가 창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등장했다.
“야!”
갑작스럽게 난입한 인물은 다름 아닌 3황자 루이프 노아 비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