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42화 (42/281)

◈42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36)

“흥,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야, 약자는 확실히 존중해!”

거짓말. 완전 거짓말이지. 제가 방금 꼬마 황자님 입술에 침 바르는 거 봤습니다.

로판 고인물의 명예를 걸고, 댁 성격은 딱 좋아하는 것만 죽도록 좋아할 성격이야.

“오, 쪼아. 훌륭한 기사, 아니 기샤의 귀걈이로다.”

“귀감? 그게 뭔데?”

래빗이 방긋 웃었다.

“너 괜찮운 놈이라고.”

[‘주인공(아기 황녀)’이 ‘3황자(셋째 오빠)’에게 가진 호감도가 대폭 오릅니다!]

에엥, 이렇게 쉽게 오른다고? 이런 횡재가! 아이고,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생각이 제대로 박힌 놈이 있어꾼? ……놈의 아들치고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래빗이 또 황제를 두고 ‘그 비센 놈’ 어쩌구 하며 욕을 중얼거리는 입 모양을 보았기 때문이다!

제발 아버지를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구요, 패륜이라고요!

“흐음, 뭐, 뭐! 내가 좀 잘났긴 하지! 그래, 롤린! 들었지? 내가 널 지켜 주겠다!”

“아, 예…….”

“그 반응은 뭐야?”

“너무 황송해서 말이 나오지 않아요.”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다 말고 웃음을 꾹 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3황자의 어깨가 무슨 백두산인 양 치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여동생이랑 드디어 친해질 수 있겠단 생각에 한껏 들뜬 기분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아 귀엽다, 귀여워.

“형들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 아버지 말도!”

“네?”

“아무것도 아니다.”

뭔가 기묘한 말이라 생각한 순간, 3황자가 손을 흔들며 신난 기색으로 화제를 바꿨다.

“랄린, 뭐 필요한 건 없어? 나는 마법을 아주 잘 다뤄.”

“마법은 모르겠고, 먼저 제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시면 좋겠는데요…….”

“그건 안 돼. 우리 사이에 애칭은 중요하니까.”

노아 황자는 내 옆을 떠날 생각이 없는지 바로 옆에서 한참을 재잘재잘 떠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들어주면서 래빗의 머리를 예쁘게 빗어 내렸다.

“황녀님, 목마르진 않으세요? 아까 주방에 보니까 주스를 가져다 놓았더라고요.”

“주스? 으움, 나쁘지 않은데.”

“아, 그럼…….”

“내가 가져오겠다!”

노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마법으로 날아갔다.

“제봅이군, 롤린. 저놈을 이로케 다루는 건가?”

“네? 뭔가 오해가 있으신데요…….”

“아닐 텐데. 저 놈울 내게 붙이려고 한고 아닌가?”

“윽.”

나는 눈을 데굴 굴렸다.

“황녀님께 해가 될 일을 하려 한 건 아니에요…….”

래빗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어어, 머리 묶는 도중에 그러면!

빗에 머리가 걸려서 아플 거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래빗은 자기 뒤통수를 잡고 꼬리를 밟힌 강아지처럼 한참 낑낑대다가 눈을 올렸다.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그로케 생각 안 해!”

“아, 감사합니다?”

“널 믿고 이써! 내 눈에 너눈 그냥 풀밭도 못 걸어갈 솜뭉치 같운 부하다!”

“그런 수식어는 조금 바꿔 주시면 좋겠는데요…….”

아니, 나 분명 암살자도 거뜬히 막았던 것 같은데 평이 왜 이리 박한 거지?

“믿고 좋아해 주셔서 감사한데, 부디 좀 더 정상적이고 건강한 모습으로 바꿔 주세요. 솜뭉치라뇨. 사람이 인형도 아니고.”

“그롬, 언제 밟힐지 모루눈 개미?”

“와, 진짜 너무하시네.”

그때 툭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쟁반을 들고 삐딱하게 선 노아가 보였다. 꼬마 황자는 그새 심술이 난 얼굴이었다.

래빗과 투덕거리느라 나는 노아가 돌아온 줄도 몰랐다. 래빗은 아마 알아챘겠지만 딱히 신경을 안 썼을 터였고.

아, 저쪽도 일곱 살, 많이 쳐줘야 여덟 살이었지? 자기가 주스를 가져오는 사이 우리 둘만 재밌게 놀고 있었다고 생각해 심통이라도 난 것 같았다. 떨어진 건 접시 위에 놓여있던 쿠키였다.

“노아 황자님 오셨네요. 가져다주셔서 감사드려요. 같이…….”

노아의 손에 있던 접시가 둥실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타다닥, 발소리가 들렸다.

어어, 할 새도 없이 사나운 표정의 노아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사달을 낼 것 같은 얼굴이었다.

“둘이 떨어져!”

아니, 그새를 못 참고 질투냐! 언제는 친해지게 도와줘서 좋다며!

그 순간 거대한 바람이 불었다. 날카로운 바람에 몸을 움츠린 순간 무언가 나를 떠밀어서 그대로 휘청했다.

래빗이 나 대신 앞을 막아선 것이었다.

그 덕에 내게는 날카로운 바람이 아주 잠시 스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이미 중심을 잃고 있던 날 넘어트리기엔 충분했다.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는데, 손을 잘못 짚었는지 손목이 꺾이며 삐끗했다.

‘윽, 아파.’

동시에 펑, 소리와 함께 래빗의 몸이 튕겨 나갔다.

“래빗 황녀님!”

나는 놀라 래빗에게 뛰어갔다.

다행스럽게도 래빗은 숨만 가쁘게 내쉴 뿐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손이 좀 빨개진 것 같지만 이건 주먹을 꽉 쥐어서인 것 같고.

와, 분명 대단한 마법 공격이었는데 상처 하나 없다고? 감탄스러웠다.

슬쩍 내 손등을 보자 생채기가 보였다.

나는 얼른 소매에 손을 숨기고 손을 뻗었다. 그대로 노아를 등지고 래빗을 보호하듯 쪼그리고 앉았다.

“괜찮으세요?”

“……괜찮타.”

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헉, ‘주인공(아기 황녀)’이 ‘3황자(셋째 오빠)’에게 가진 호감도가 대폭 내려갔어요! ≡≡≡=Σ(゜ロ゜;)ノ]

알고 있다. 그럴 것 같았으니까.

“저 새X가 지굼 감히…….”

“으아아아, 래빗 황녀님, 진정, 진정!”

아니나 다를까 래빗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황급히 래빗의 양어깨를 잡고 억지로 눈을 마주했다.

“자, 황녀님 저 보이시죠? 짜잔, 멀쩡하네?”

“지굼 누굴 애 취굽을……!”

“애 맞으시잖아요! 으앙! 무서우니까 그 기운 좀 없애 주세요! 아이고, 손 떨린다!”

[‘주인공(아기 황녀)’이 ‘3황자(셋째 오빠)’에게 가진 호감도가 대폭 내려갔어요!]

미친 듯이 떨어지는 호감도를 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뭐든 하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생각해 보자, 지금껏 주연들을 만나며 이런 위기가 없진 않았잖아?

그리고 항상 이럴 땐…….

‘퀘스트가 도착했지.’

[정답!]

[돌발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돌발) - ‘화해가 필요해!’

애써 달성한 아기 황녀님의 3황자(셋째 오빠)를 향한 호감도가 날아가게 생겼어요!

얼른 두 사람을 화해시킵시다!

내용: 30분 안에 ‘주인공(아기 황녀)’과 ‘3황자(셋째 오빠)’를 화해시키세요!

실패 시: 건강 수치 -8

보상: 건강 수치 +5, 주인공(아기 황녀)의 3황자(셋째 오빠)를 향한 호감도 원상 복구

※본 퀘스트는 성취 내용에 따라 히든 보상으로 이어집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였다.

“네 배가 사라질 뻔했오!”

“배가 왜 사라져요!”

“뚤릴 뻔해따고!”

“사람의 배는 그렇게 쉽게 뚫리지 않아요!”

그러나 상황은 쉽지 않았다. 래빗이 씨근덕거리며 검을! 아니, 잠깐만 그건 안됩니다!

“그고 내가 지금 보여주지!”

“으아아아, 안돼요!”

래빗의 분노는 정당하다. 하지만 저쪽은 미숙한 어린아이다. 오히려 래빗보다도 더 어리다면 어리다고 할 수 있었다.

“황녀님, 저 봐 봐요, 네? 잠시만요!”

래빗은 눈을 사납게 떴지만 내 말을 무시하진 않았다.

등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 뒤에는 자기가 저질러버린 짓을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린애가 있을 것이다.

“……흡, 흐흡, 왜, 왜 나만 무시해! 왜! 흐어어어엉! 둘만 놀고!”

아니나 다를까,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래빗의 표정엔 더욱 분노가 어렸지만. ‘잘못한 주제에 울어?’ 하는 표정이었다.

“왜 둘만 놀고, 나 빼고, 흐어어엉!”

“비켜 바, 롤린.”

“황녀님, 우는 애를 때려서 어쩌시려고요. 우는 애 때리는 건 안 내키시죠? 그렇다고 달래고 싶지도 않으시고요.”

래빗이 눈을 굴렸다.

“3황자님이 잘못했으니까요. 근데요, 애들은 그런 논리 몰라요.”

“성가셔.”

그치. 하지만 나는 너도 그런 애가 되었으면 좋겠어.

더욱 거세지는 울음소리에 래빗이 귀를 막았다.

“황녀님, 제가 저 울음을 딱 그치게 하면서도 다시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요. 근데 좀 유치해요.”

“뭔데?”

“맞불 작전이요.”

나는 귀를 막으며 말했다.

“쟤보다 더 크게 울어 버리세요.”

래빗의 표정이 무슨 헛소리냐는 듯 잔뜩 찌푸려졌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