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38)
“황녀님, 혹시 외로우세요? 하긴 아직 전속 시녀도 없고.”
“아니, 시녀 같은 곤 없눈 게 더 조타. 그저, 유모랸 보통 하루둉일 함께 있어 주눈 걸로 알고 있눈데, 넌 집에 돌아가눈 것 같아서…….”
“아, 그건요.”
나는 뺨을 긁적였다.
내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자식 걱정이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부모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어떡하면 잘 포장해서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사실 제가 몸이 좀 약하, 아니, 약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께서 저를 많이 걱정하시기도 하고, 매일 진찰도 받아야 해서 폐하께서 출퇴근을 허락해 주셨어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깨달았다.
“아, 유모를 바꿔 드릴까요? 온종일 있을 사람이 필요하신 거라면…….”
“돼따! 너 말곤 피료 없어!”
“앗, 제가 그만둔다는 얘긴 아니었는데요.”
“…….”
“하하, 제가 그렇게 좋으세요? 응?”
나는 넉살 좋게 꽃받침을 하고 물었다. 래빗은 퉁명스럽게 나를 빤히 쳐다보다 가볍게 끄덕였다.
와, 길고양이를 길들인 기분이네. 나는 괜히 래빗을 한 번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건강 때문이라묜 대따. 나는 그론 걸 허할 만크믄 너그럽따.”
“네네! 감사해요. 그래도 상황을 봐서 한번 밤을 보내 볼게요, 여기서요.”
“……뎡말?”
“야, 너 혼자 자기 무서워? 크흠, 내, 내가 같이 있어 줘?”
“싫댜.”
우리 사이로 노아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가 래빗의 야멸찬 거절에 상처를 입고 발끈했다. 나는 하하 웃다 슬그머니 팔목을 등 뒤로 숨겼다.
[이런, 고통을 너무 오래 참았어요! 열이 오르고 있어요.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집니다! 현재 건강 수치: 30]
내가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자, 병아리 같은 아기들이 졸졸 쫓아왔다.
“뱨웅하게따.”
“어? 어디가? 나도, 나도!”
음, 할 수 없지. 조금만 더 참아 볼까?
마차를 타러 가는 길, 바깥에는 낯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왔군.”
“아, 창공의 날개에…….”
“됐다.”
기둥에 느슨하게 기대어 서 있던 사람은 2황자였다. 그는 노을빛 아래서 하나의 예술품같이 완벽한 자태를 자랑했다.
그런데 웬일이래? 인사 못 받아 죽은 귀신처럼 집요하게 굴던 사람이 생략하라니.
“그럼 황녀님, 저 이만 가 볼게요.”
“구래. 내일도 와.”
“당연하죠.”
당연히 래빗을 보러 온 거겠거니 생각하고 얼른 래빗에게 인사했다.
그 옆의 노아는 오늘 일로 내게 미안한 동시에 정이라도 든 건지 아쉬움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럼 갈게요.”
“가지.”
“네?”
“왜?”
내가 가는데 너는 또 왜 가세요? 나는 이상한 눈으로 2황자를 응시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왜인지 래빗이…… 묘하게 흐뭇해하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기 황녀님? 그 시선은 뭔가요?
“됴아, 오라버니여, 네가 사내댭게 데려다주거라.”
“사내답게가 아니라 신사답게겠지.”
“갖다 븉이기 나름이니.”
어디서부터 토를 달아야 할지 모르겠다. 왜 갑자기 오라버니라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내가 기절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언제부터 두 사람이 이렇게 10년은 된 사이처럼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게 된 건지.
나는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 얼떨떨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파.’
슬슬 손목이 참을 수 없이 아려왔기 때문이었다.
“미리 마차를 준비해 두었다.”
“아, 네? 어…… 감사합니다.”
손목의 고통에만 신경 쓰다 갑자기 들려온 2황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언제 이렇게 얼굴이 가까워진 거지.
물론 실제로는 일반적인 것보다 조금 가까운 정도였다. 그럭저럭 얼굴을 익힌 타인끼리 대화를 나눌 때의 거리, 아니 그것보다는 약간 더 가까운.
2황자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툭 말을 뱉었다.
“영애는 고통을 참는 데 익숙한가?”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 손목.”
“…….”
“참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닐 텐데.”
그 순간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어떻게 알았지?’
오늘따라 유달리 풍성한 소매에 숨겨져 손목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태도에서 티가 났다면 래빗이 알았을 테고.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래빗과 노아의 모습은 멀어도 한참은 멀었다.
“내 여동생이 들을 것 같아 고민한 거라면 염려할 것 없다. 이 거리에선 들리지 않을 테니. 그리고 이 주변엔 마나를 살짝 깔아 두었다. 우리 대화는 들리지 않아.”
하아, 다행이다. 참아왔던 게 모두 수포로 돌아갈 뻔했네. 근데 그럼 이 사람은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리 경계할 것 없다. 직접 본 것이니까.”
“……보았다고요?”
나는 더욱 미궁에 빠졌다. 어떻게 보는데? 내 표정을 읽은 듯 2황자가 바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기절한 날, 여동생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그림자 기사를 단 한 명 거처에 두기로 한 거였지.”
엥? 그 래빗이?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래빗이 황실의 사람을 얼마나 경계하는지는 그간 똑똑히 봐 왔다. 그건 하루아침에 거둘 수 있는 불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기절한 반나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2황자에게 이런 것까지 허락한 거야?
‘그러고 보니 2황자의 호감도가 대폭 올랐다는 요정의 창을 보긴 했지.’
그럼 봐야지.
‘2황자의 호감도만 보여줘.’
[퀘스트(메인) - ‘아기 황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자!’
진행 상황:
3. 2황자 : 81 / 90 ]
나는 흠칫 놀랐다. 뭐야, 거의 달성 직전이잖아?
호감도가 대폭 올랐다는 창을 보았을 때만 해도 그저 50 언저리까지 갔겠거니 했는데…….
아니면 그 뒤에 더 오른 건가? 내가 기절했을 때 무슨 일이 있어서?
“……황녀님께서 황자님을 그 정도로 믿으셨다고요?”
“믿었다, 라……. 영애는 재밌는 말을 하는군.”
2황자가 팔짱을 끼며 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그 애와 나는 가족이야. 믿지 못할 건 무에 있지?”
“…….”
“아니면, 그래. 영애는 깊은 곳까지 봤을 테니, 전부 알고 있다, 이건가. 그 애가 가족을 포함해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는 걸?”
2황자는 래빗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연회 날 보았을 때도 래빗을 적절하게 돌려보냈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영애가 막 기절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 다만, 그날 그 애에게 중요한 비밀을 알려 주고서 우린 조금 더 가까워졌다.”
“…….”
“답이 되었나?”
내가 잠시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2황자가 이어 말했다.
“전부 그대 덕분이다.”
“네?”
“그 애가 그러더군. 그대가 아니었다면 평생 나와는 말을 섞지 않았을 것이라고.”
래빗은 말을 쉬이 바꾸는 인물이 아니었다. ‘평생’, 그 단어가 정말 무거웠다.
내가 없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평생을 전생에 갇혀 지내려 했던 거구나.
‘나 때문에 오른 거였어, 이 호감도.’
2황자는 어째서인지 잠시 눈을 감았다.
“사실 나 또한 체념하고 있었지. 그리고…… 접근하면 안 된다고도 느꼈다.”
다가오는 말이 어쩐지 묘했다.
“부친과 형님은 아마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겠지.”
“저, 외람되지만 그 말씀은…….”
“지금 황가의 가족사를 알려 달라는 것인가?”
불편한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는 입을 합, 다물고 대신 머리를 돌렸다.
‘이거 혹시 3황자가 래빗이 자길 싫어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과 같은 맥락인가?’
“형들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 아버지 말도!”
이들에겐 래빗에게 접근할 수 없던 이유가 따로 있었나?
“어쨌거나 그대가 아니었다면 그 애 말대로 우리는 그 애와 평생 마주할 수 없었겠단 생각이 들더군.”
이 남자가 순순히 답을 알려 주진 않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 가지.”
“네…….”
“아니, 강요하는 게 아니라.”
내 체념 어린 얼굴을 보며 2황자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짜증 내는 건가? 워낙 까칠하게 생긴 얼굴이라 살짝 찌푸린 것만으로도 좀 무서워 보이긴 했다. 문제는 그마저 내 취향이었단 거지만.
“영애의 그 손목을 위해서라도 빨리 의원에게 보이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거다.”
“아.”
“치료 마법사를 불러다 주고 싶지만, 영애는 이미 얼마 전에 마법의 힘을 빌렸었지. 마법에 의한 치료가 잦으면 오히려 좋지 않다더군.”
아, 지난번 기절했을 때 빨리 깨어날 수 있었던 게 치료마법 덕분이었지, 참. 이것도 약처럼 내성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2황자가 성큼 걷기 시작했고, 나는 홀린 듯 뒤따라 걸었다. 걸음이 너무 빨라서 쫓아가기 힘들었던 난 후,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곧 걸음 속도가 느려졌다. 마치 나에게 맞춰주기라도 하듯.
“정리하자면 내 여동생이 거처에 그림자 기사 하나 두는 정도는 허락했다는 소리다. 그래서 모두 볼 수 있었지.”
“저, 황자님. 자꾸 봤다 하시는데, 그 말씀은 황자님이 다른 기사를 통해서 보고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았지. 여동생은 분명 그림자 기사를 둬도 된다고 했고, 그 기사를 내가 하면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어…….”
보통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을 붙인다고 생각하지 누가 직접 간다고 생각하나요? 할 말이 많았지만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 어, 대단한 열정이십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안 가면 누가 가는데!’
그래, 이쪽도 원작에선 완전 열렬한 여동생 바보였지. 캐릭터가 어디 가겠어.
‘가만, 그럼 설마 나랑 래빗의 대화도 다 들은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