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45화 (45/281)

◈45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39)

2황자는 뛰어난 검사였다.

이건 래빗도 넌지시 인정했던 바였다. 거의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던 로아타 황제의 눈으로 봤을 때 괜찮다는 건 객관적으로도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란 뜻.

그러니 그림자 기사 역할 정도야 거뜬히 할 수 있었겠지만…….

“덧붙이자면 상황만 본 것뿐이다. 거리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는 허하지 않더군.”

아니, 아무리 그래도 무슨 제국의 황자씩이나 돼서 여동생 스토커 비스무리한 역할을 하고 있어.

음, 아무래도 어감이 조금 안 좋으니까 일단 보디가드라고 하자.

아무튼 결국 비밀 보디가드 노릇을 하다가 노아 황자가 마법을 쓴 것까지 모두 봐버렸단 소리네.

“그래서 영애의 팔목이 꺾인 것도 아주 잘 보았지.”

“아…….”

이제야 이해됐다.

“이해가 됐다면 이제 좀 볼 수 있겠나?”

어느새 마차 앞에 도달했다. 마차는 평소 타는 곳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나에 대한 배려란 걸 알았지만 조금 얼떨떨했다.

“손목.”

나는 얌전히 손을 들어 손목을 내보였다. 어차피 래빗이 보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다.

이윽고 그가 소매를 걷어 올리는 순간, 나는 손을 휙 뒤로 뺐다.

2황자가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 * *

“그 전에 감히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라이칸은 멈칫했다. 절로 눈썹이 쑥 올라갔다.

“래빗 황녀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주세요. 부탁 드려요.”

라이칸은 대답 대신 그녀를 보았다.

어째서 유엘도 루이프도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전혀 몰랐단 말인가. 이토록 핏기가 사라진 얼굴인데.

살랑, 옅게 부는 바람에서 희미한 꽃향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봄바람에도 휘청거릴 것 같이, 생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달린 에스테가 서 있었다.

달린의 연두색 눈동자에 간절함이 어리자, 라이칸은 불편함을 느꼈다.

“영애가 바란다면 그리하도록 하지.”

난생처음 느끼는 이상한 기분이라 라이칸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확 찡그렸다. 그러나 이에 달린이 어깨를 떨자 거의 반사적으로 미간을 폈다.

“한번 얘기한 것으로 협박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다.”

“아…… 협박……. 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구요.”

눈을 깜빡이던 달린이 옅게 웃었다.

희미한 미소에 라이칸은 묘한 갈증을 느꼈다. 처음 마주했던 때는 분명 이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협박하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만…… 제가 이런 걸 부탁 드리면 싫어하실까 봐 걱정했어요.”

“걱정?”

“황녀님께 비밀을 만드는 것이요.”

수도의 귀족 중 달린 에스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혹 ‘달린’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에스테의 딸’이라면 누구든 알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겠지.

“아, 에스테 백작이 재산의 반을 탕진했는데도 못 살린 딸? 그 곧 죽을 영애?”

곧 죽을 운명이라기엔 그녀는 너무나 담담하게 서 있었다.

“……약조했으니 손을 보겠다.”

그러자 달린이 머뭇거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라이칸이 소매를 들추자, 달린이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라이칸이 삽시간에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이걸 어떻게 참은 거지?”

“네?”

고개를 갸웃하는 달린의 얼굴은 ‘그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아가 치밀었다.

그도 그럴 게 달린의 손목은 부풀다 못해 피부가 검게 변해 있었으니까. 혹독한 훈련에 길이 든 기사조차도 참기 쉽지 않았을 부상이다. 지독하게 아팠을 텐데 이걸 참았다고?

“어, 많이 심각한가요?”

혹시, 지독한 병마를 겪어 온 사람이라 이 정도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건가?

라이칸은 순간 눈앞의 여자가 어떤 삶을 살아 왔을지 상상해 보다 조금 아득해졌다.

“검게 변한 게 보이나? 이건 피가 고인 거다. 얼른 치료가 필요해.”

“아…… 곤란하네요. 아버지가 보시면…… 끄응.”

“지금 그런 게 중요한가.”

라이칸은 사납게 다그치려다 말고 인상을 찡그렸다. 달린이 겁먹을 걸 알면서도 타고난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시간이 괜찮다면 잠깐 치료하고 가지. 내가 돕겠다.”

“어, 황자님께서요? 그, 저는 아무렇지 않은데.”

이 여자는 본인 얼굴이 얼마나 솔직한지 알고 있을까.

‘네가 치료를?’이란 속마음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헛소리.”

달린이 찔끔했다. 곧 진짠데, 하고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훈련하다 보면 다치는 게 일상이다 보니 기사라면 누구나 간단한 부상쯤은 스스로 치료할 수 있다.”

라이칸의 설명에도 달린은 한동안 망설인 끝에야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내 손목을 정말 저치에게 맡겨도 될까’ 하는 무례할 정도로 솔직한 표정이었기에 라이칸은 헛웃음을 삼켰다.

“호의 감사히 받겠습니다. 2황자님께서는 친절하시네요.”

새하얀 손이 입가를 가렸다.

라이칸은 다시 한번 묘한 갈증이 일었다.

보통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좀 더 자신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지 않나? 그런 처지임에도 영애가 여동생에게 진심을 다하는 모습은 신기하다 못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애가 지금은 사라진 모든 이를 박애하는 신전의 성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늘 제 아픔은 꾹 눌러 참은 채 필사적으로 여동생만 안아 주던 그 모습.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애정은 분명 확실히 여동생을 향하고 있었다.

“그럼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도대체 무슨 수작인지. 온실에서 겁도 없이 들이대던 모습에 그녀의 첫인상은 최악을 달렸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평가가 바뀐 것은 여동생과 함께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부터였다.

그러고 나니 그녀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있던 마음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의 자신은 사실 그에게 호감이 있던 이를 너무 야멸차게 뿌리친 건 아니었을까.

호감. 두 글자를 속으로 내뱉는데, 다시 한번 갈증이 치밀었다.

“내 거처로 가지.”

* * *

[등장인물(주연) ‘라이칸’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빙의자 님에게 새로운 루트 ‘나만의 로판’을 개척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 * *

“오, 아가 왔느냐.”

내가 에스테 저택에 도착한 건 초저녁 무렵이었다.

마침 저녁 식사시간에 맞춰 도착해 응접실에 모여 있던 가족들이 나를 반겨 주었다.

그중 가장 반갑게 맞이한 사람은 아버지인 에스테 백작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치마를 살짝 잡고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들자 날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부친이 보였다. 그러나 깊게 패인 눈 어딘가에는 숨기지 못한 염려가 가득했다.

“그래, 어서 오거라.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부친의 어깨너머로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모친 백작부인의 얼굴이 보였다.

“네, 괜찮아요. 오늘도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보냈네요. 기뻐요.”

이제는 이곳의 영애처럼 간드러진 말투를 구사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아니, 이렇게 하지 않았다가 죽을 위기를 몇 번 겪고 나니 뭐든 되던데. 역시 죽음이란 위대하다.

“아마 제 병도 이제 차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 아닐까요?”

달린이 어떤 지병을 앓고 있었는지 나도 아직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다만 지금 보니 그냥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몸에 이런저런 문제가 겹치면서 비롯된 합병증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그, 그래. 네 병 말이더냐…….”

내 말에 부친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건강 수치만 유지하면 쭉 잘 살아남을 수 있대요.

가족들은 이 사실을 모르지만 요즘처럼 내가 계속 건강하게 지내면 믿겠지.

“그나저나 너 오늘 살짝 늦었다?”

분위기를 환기한 사람은 다름 아닌 파올로였다. 그 말에 나는 조금 전, 그러니까 집으로 출발하기 직전의 일을 떠올렸다.

“내 거처로 가지.”

그 말을 건넸을 때만큼은 꽤 다정한 목소리라 의외라면 의외랄지. 근데 의외로 난 그 목소리 또한 마음에 들었다.

저 얼굴로 절대 내비치지 않을 것 같은 다정함이라니, 신선하잖아?

얼굴만 봐선 아주 고전 중의 고전인 ‘내 뺨을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다!’나 ‘내 아내가 돼라!’ 같은 게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지.

어쨌든 나는 그에게 응급처치를 받았고, 내 손목에 곱게 감긴 붕대는 그의 솜씨였다.

왜인지 붕대를 들었을 땐 냉랭한 얼굴에 잠시 난감한 표정이 어렸었지만.

“어떻게 감아도 피가 안 통할 것 같군.”

“……??”

“부러질 것 같다는 소리다.”

그 나름의 옹색함을 표현한 말이었으리라. 하긴 지금 내 몸은 어디라고 콕 집을 필요도 없이 온몸이 마르고 가냘팠다.

“아아, 오늘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출발했지.”

“일?”

“그런 게 있었어.”

어깨를 으쓱하며 응접실을 지나갔다.

어차피 인사하러 왔던 거라 이제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문을 나서는 내 뒤로 누군가 졸졸 쫓아왔다. 가려지지도 않는 이 곰 같은 덩치는 파올로였다.

“뭐야, 왜 쫓아와?”

뭐 할 말이라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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