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40)
“저녁은?”
“안 먹었지, 당연히. 같이 먹을 거야.”
나는 눈썹을 쓱 밀어 올리며 덧붙였다.
“뭐야, 나 빼고 밥 먹고 싶어서 쫓아온 거야? 난 먹지 말라고?”
파올로가 씩 웃었다. 나랑 같은 색 눈동자를 익살스럽게 휘면서.
“어휴, 무슨 무서운 소릴. 그랬다간 내가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쫓겨나지. 어머니는 저택에 얼씬도 못 하게 할걸.”
“그럼 왜? 나 배고파. 용건만 간단히.”
“할아버지가 대단한 무관이었던 것 기억해? 기억이 나려나.”
용건만 간단히라니까 왜 뜬금없이 조상님은 찾고 있어.
“아버지는 문관이라 조금 둔하시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파올로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빤히 보았고, 난 고개를 갸웃하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게 왜?
“그래서 그 손목은 왜 그런 건데?”
파올로의 질문에 따지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그대로 멈춰 섰다. 뭐야, 소름 돋게.
“무슨 손목?”
“흐음.”
파올로는 그 커다란 덩치로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따라 한 몸짓이다.
“아무래도 순순히 털어놓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잡아서 확인해 볼 수도 없고. 가장 쉬운 건 부모님께 말…….”
“알았어, 알았어. 네 말 맞아. 어떻게 알았어?”
“나랑 부모님을 속인 이유가 있겠지?”
“어떻게 알았냐니까?”
“나 기사라니까. 내가 약초 냄새를 못 맡겠냐.”
파올로가 자기 코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더니 곰같이 커다란 손으로 내 팔을 잡아 기어이 소매를 들췄다.
“아마 일부러 냄새 안 나게 잘 동여맨 거 같은데, 나 같은 기사는 못 속이지.”
“허. 허투루 황실 기사 자격을 딴 건 아니었다? 난 또 어디서 주워 온 줄 알았지.”
“이게 오라버니에게 못하는 말이 없다.”
“아! 아파!”
나는 오빠 놈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래서 이건 왜 이 모양이 된 거냐?”
“아 그게…….”
사실 숨기려면 숨길 수 있겠지만 딱히 파올로에게까지 감출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부모님이야 놀라 호들갑을 떨며 황성에 가지 못하게 할 수도 있지만 파올로는 아니었으니까.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는 ‘그래, 뭐 너 하고 싶은대로 해라. 그래도 조심 좀 해.’ 하고 말 성격이랄까.
그래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한데 모든 이야기 듣고 난 뒤 파올로의 표정이 묘했다.
“……허, 너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냐? 3황자 전하의 마법이라니.”
“사고라니, 표현에 주의를 좀 해 줄래?”
“3황자 전하의 마법은 이미 숙련된 마법사보다 뛰어나다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지금 원작도 다 기억 못 해서 오로지 고인물의 클리셰 지식에 의지해 이끌어 가고 있구만.
나는 뚱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듯 받아쳤다.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마.”
“왜?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는지 난 잘 모르겠는데.”
“응. 지금은 일단 모르는 척 해 주면 안 돼?”
혹시라도 제지당해 아무것도 못 하게 되면 그냥 아픈 게 아니라 죽는다고.
“갑자기 황녀님께 관심을 쏟는 거랑 같은 이유야?”
“뭐…….”
“그래, 그런 거면 마음대로 해.”
“안 말려?”
“말리면 듣고?”
내 침묵에 파올로는 잠시 나를 빤히 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부터 난 부모님과 다르게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했으면 하는 쪽이었으니까.”
파올로가 말하는 건 먼 과거를 가리키는 듯했다.
아파서 일어나 움직이는 날 보다 누워 있는 날이 많았던 ‘달린’.
하고 싶은 걸 거의 못 해 봤을 여동생을 안쓰럽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대신 나한테는 숨기지 마. 아무리 그래도 가족 중 한 명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너도 나인 게 낫지 않겠냐?”
“뭐, 부정할 순 없네.”
파올로가 씩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였다. 손이 하도 큰 탓에 머리는 대번에 엉망이 됐다.
이거 고의다. 백 퍼센트 고의야.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사이로 장난스러운 듯하면서도 걱정이 어린 오빠의 얼굴이 보였다.
“그럼 난 간다. 빨리 갈아입고 나와. 그리고 붕대는 나 말고는 알아채지 못할 정도니까 그냥 가리기만 해. 장갑을 끼든지.”
“오냐. 좀 가라.”
말버릇이 좋지 못하다며 파올로가 다시 한번 내 머리를 헝클였다.
“그리고 시간 나면 네 친구인 트리샤 양에게 편지나 해. 요즘 너를 통 못 본다고 울상이더라.”
“아.”
그간 래빗에게 일상을 올인 하다 보니 잠시 소홀히 대하고 만 친구, 리제를 떠올리자 미안해졌다. 그러고 보니 리제를 만난 지도 정말 오래됐구나.
“넌 어떻게 알았어? 둘이 연락해?”
“너 없을 때 방문한 트리샤 양을 누가 반겨 줬겠냐.”
“음, 미안하네…….”
파올로가 ‘알면 잘해, 친구도 없는 게.’하고 타박했지만 별 타격은 없었다. 내가 친구가 없긴 하지.
조만간 교우 관계를 위해 시간을 내기로 하자. 다행히 메인 퀘스트 진척 상황이 좋으니 말이다.
“그래, 얼른 만나라.”
그 말을 끝으로 파올로가 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작은 불씨가 보였다.
불씨? 아니, 빛이었다. 나도 모르게 팔목을 보았다. 붕대를 감지 않은 손에서 덜렁 흔들리는 팔찌.
사이렌 오더, 주연이 근처에 있으면 빛을 내보이는 팔찌였다.
‘지금…… 빛났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은 다시 꺼진 상태였다.
정말 켜진 거라면 2황자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환한 빛을 계속 발하고 있어야 할 텐데?
음, 잘못 본 거겠지. 하지만.
……두 번이나 잘못 볼 수가 있나?
‘저번에 마차에서도 오빠에게 반짝거린 적 있는 것 같은데……. 설마 요정이 불량품을 준 건 아니겠지?’
* * *
저녁 식사는 아주 순조로웠다. 나는 파올로의 조언대로 손에 장갑을 끼고 나왔고 이는 식사 예절에 그리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잘 넘어갔다.
2황자가 진통 효과가 있는 연고를 발라 주기도 했고 나중에 덧바를 약도 따로 챙겨 준 덕에 손목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식사하는 정도로는 크게 무리가 가지도 않았다.
가장 좋은 건 건강 수치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지.
‘드디어 30을 찍었어!’
평범한 사람의 체력 수준에 점점 다가갈 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그래서 아빠, 황녀님이 아주아주, 아주! 귀여우시다는 거죠.”
“허허, 그렇더냐?”
부친인 백작이 턱을 쓰다듬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께선 폐하를 많이 닮으셨다고 하던데, 필시 대단한 미모를 지니셨겠구나.”
“아, 한 번도 직접 뵌 적은 없으세요?”
“글쎄다, 아주 멀리서 스쳐 지나가듯 뵌 적은 있다만…… 누구나 볼 수 있는 정식 연회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으셨으니 말이다.”
흐음, 그럼 제국 귀족 대부분은 아직 래빗의 얼굴을 제대로 모른다는 거구나.
“아무튼 아주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우신데 말이죠.”
“호호, 얘야. 오늘 자리에서 귀엽다는 이야기만 50번을 들은 것 같구나. 그렇게도 좋니?”
“어머니, 50번이라니요.”
파올로가 정색했다.
“96번입니다. 난 질려. 질린다고.”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정말로 질렸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뭐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다고, 아무튼 저 오라버니는 유난이다. 나는 혀를 쏙 내밀고는 고개를 돌렸다.
“혹시 나중에 한번 황녀님을 우리 저택에 모셔도 괜찮을까요?”
“흡, 콜록! 뭐라고?”
“아…… 저택에 온실이 있잖아요. 에스테가랑 황실만 드나들 수 있는. 황녀님도 오실 수 있지 않나요?”
“아, 그건 그렇다만. 어린 황녀님께는 아직 위험하지 않겠느냐.”
나는 발화초를 떠올렸다.
마법등이 없을 때의 온실은 위험하긴 했지. 나도 2황자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크게 다칠 뻔했으니까.
반대로 마법등이 있으면 아주 안전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법등을 교체한 뒤로 한 번 가본 적 있었으니까.
“안 될까요…….”
내가 간식을 빼앗긴 강아지처럼 시무룩하게 눈길을 내리자 모친이 부채로 부친의 어깨를 내려쳤다.
아니, 어머니 그렇게 세게 후려치시면 어떡해요…….
“애가 원한다잖아요, 여보.”
“아, 나도 안다오…….”
부친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아빠, 마법등도 고쳤고 그 등의 수명은 한참 남았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지난번엔 마법등이 없어서 위험했던 거잖아요.”
우려할 만한 부분을 짚어 이야기하자 부친은 흐음,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듯이.
“앗, 그럼 황녀님께서 좋다고 하시면 폐하께도 허락을 받고 한번 모실게요.”
“그래, 네가 편한 대로 하거라.”
좋았어. 오는 김에 2황자나 노아 황자도 같이 오라고 할까. 왠지 분명 말하면 올 것 같은데.
‘황태자는 함께 올 수 없나?’
래빗의 2황자를 향한 호감도를 달성하면, 다음 목표는 황태자와 황제다.
* * *
식사 자리가 파한 뒤 씻고 침대에 누웠지만 내 방의 수면등은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 정리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히든 피스’.
“요정, ‘히든 피스’가 뭐야?”
[요정이 ‘히든 피스’는 숨겨진 조각이라고 대답해요! ₍₍ ◝(・ω・)◟ ⁾⁾₍₍ ◝(・ω・)◟ ⁾⁾]
이게, 지금 그걸 몰라서 묻나. 뜻풀이를 원한 게 아니잖아.
그래, 이런 식으로 물어서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거지?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히든 피스라는 건 메인 퀘스트 달성을 돕는 일종의 지름길이야,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