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48화 (48/281)

◈48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42)

“황녀님께 저는 특별하지 않은 존재인가요? 정말?”

“그, 그곤 아니지만…….”

“뭐야, 뭔데. 너네 왜 싸우는데? 야 그리고 나는? 나는 안 특별하냐!”

래빗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끙끙대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봤지만 역시 안 되겠어!’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알려 듈 수 업따.”

“네에…….”

내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래빗이 화들짝 놀라 나를 다시 쳐다봤다. 어우 깜짝이야. 누가 암살자 때려잡는 분 아니랄까 봐 속도 한 번 놀라울 정도였다.

“그로타고 너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눈 곤 아니다. 그저 지굼운 말하기 좀 그롤 뿐이야. 그로니까…….”

래빗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네 뎍분에 그놈이 생긴 곤 젼형적인 비센 황죡이지만 나뿐 놈운 아니란 걸 알아따!”

양손을 마구 흔들며, 우물우물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가 스르륵 풀렸다.

아니, 사실 별로 화가 나지 않기도 했지만 래빗의 얼굴을 보면 누구든지 없던 화도 풀릴 것이다. 아무튼 풀린다. 이 얼굴을 보고 안 풀리면 유죄다.

아, 역시나 내 덕분에 오른 수치구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말씀하시기 곤란하신 거라면 괜찮아요.”

나는 뺨을 긁적였다.

“대신 시간이 지나 나중에라도 이야기해 주실 수 있는 내용이면…… 그땐 꼭 알려주세요.”

“그곤…… 죠타.”

“네. 사실 황녀님의 작은 것 하나까지도 궁금해서요. 전 유모잖아요.”

그러자 래빗이 진심으로 감동받은 표정을 지어서 아주 조금, 조금 양심에 찔렸달까. 사실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자세한 건 2황자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

미안하지만 이쪽은 생존이 걸린 문제란 말이야.

“야야, 왜 내 질문에는 대답 안 해? 나도 물었잖아! 나도 특별하냐니까? 어? 엉?”

“안 둘린다.”

“야!”

“더 쿠게 말하면 쫓아낼 고다.”

“이익…….”

그 사이 무슨 영문인지 이번엔 래빗과 노아 황자가 투닥거리고 있었다.

‘음, 호감도가 올라서인지 전보다는 좀 더 친해 보이네.’

어째 래빗은 좀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다음 순간 노아가 분을 못 이겨 눈물을 글썽글썽, 울먹울먹한 얼굴을 했다. 아이고야.

“씨이, 왜, 왜 나만, 안 끼워 줘. 이제 말 잘 듣잖아…….”

“안 끼워 쥬다니, 나눈 랄린에게도 안 알려 줘따.”

“그거 말고!”

래빗은 대꾸하면서도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딴에는 장난을 치려 한 것 같은데, 어린 셋째 오빠가 서럽게 눈물을 떨어트리니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긴 검술과 전쟁에는 능해도 아이의 생태는 전혀 모르는 분이셨지. 나는 얼른 나서서 3황자를 달랬다.

“에이, 당연히 특별하죠. 원래 진짜 특별한 건 말하지 않아도 티가 나는 법이에요, 황자님.”

“진짜?”

그럼요, 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노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시선을 돌렸더니 래빗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꼬물거리면서 척 내밀었다.

“구만 울어라, 시끄롭다.”

나는 묘한 기분과 함께 가슴에서 퍼져나오는 찐한 감동에 코를 찡긋했다.

‘저건 손가락 하트잖아?’

내가 예전에 지나가듯이 알려 주었던 거였다.

“친구들에게 많이 했어요. 제가 잘못해서 봐 달라고 빌어야 할 때나, 너무 고마울 때라거나.”

왠지 감동으로 가슴이 찡해진 나는 아기 고양이의 발인 양 작고 앙증맞은 래빗의 손과 손목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그러면서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고 소리를 높였다. 노아가 이쪽을 보지 않을 수 없게.

“세상에! 이거 보세요, 노아 황자님!”

“뭐, 뭐야. 훌쩍.”

“아니, 황자님, 이거요, 이거! 안 보이세요? 세상에, 황녀님이 황자님께 사과하시려고 하트를 만드셨어요!”

“……하트?”

“네, 이거 보이시죠?”

나는 래빗의 손을 잡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래빗이 아주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내 손길을 뿌리치진 않았다.

뭐랄까, 넌 내 집사이니 앞발 정도는 허락하노라, 하는 고양이 같달까.

“보이시죠? 이건, ‘미안하고 너를 좋아한다’는 의미예요.”

“……좋아해?”

“그럼요. 와, 황녀님께서 제게는 한 번도 안 해 주셨는데, 노아 황자님께는 해 주셨네요!”

노아가 래빗을 쳐다보자, 래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아의 얼굴에 한여름처럼 퍼붓던 소나기가 갑자기 그치고 무지개가 걸리더니, 이내 눈까지 접어가며 활짝 웃었다.

“뭐, 뭐야! 난 또, 나만 싫어하고 나만 빼놓고 노는 줄 알고.”

심지어 노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헤헤 웃으며, 래빗에게 하트를 돌려주기까지 했다. 저렇게 웃으니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처럼 귀엽기 그지없었다.

이번에는 래빗도 조금 놀랐는지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오호…… 이곤 애둘 달래는 데도 효과가 있나?”

“하하.”

나는 작게 소리 내어 웃다가 속삭였다.

“글쎄요. 어른 달래는데도 효과 좋을걸요.”

[빙의자 님이 ‘주인공(아기 황녀)’을 올바르게 인도했어요!]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오릅니다! °˖✧◝(⁰▿⁰)◜✧˖° 현재 건강 수치: 37]

나는 요정의 창을 보며 콧방귀를 꼈다.

‘올바르게 인도는 무슨. 그냥 애가 애다워진 거지.’

그러고 나서 무심코 응접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까지 가득했던 검이 보이지 않았다.

“래빗 황녀님, 여기 있던 검들은 다 어디 간 거예요?”

“아, 그고.”

래빗은 대수롭지 않게 다른 방에 옮겨두었다고 얘기했다. 확실히 궁에는 남는 방도 많으니 옮겨 놓는 것이 좋겠지만, 무슨 수로?

한두 자루도 아니고, 래빗 혼자 옮기기엔 양이 지나치게 많았는데 설마 밤새 나른 건 아니겠지?

“오뎐에 옮겨따. 랴이칸이 도와줘찌.”

“아, 2황자님이요.”

2황자가 데려온 기사들이 순식간에 옮겨줬다는 대목에서는 조금 놀랐다.

“그리고 내 거처룰 담댱하눈 구역 시종쟝이 바뀔 고라고 하더군.”

나는 차림이며 생김새는 멀쩡했지만 사람 가려가며 성질을 부리던 못된 노인을 떠올렸다. 허, 이렇게 빨리 바뀐다니 좋네.

“2황자님이 많이 노력해 주셨네요.”

2황자를 칭찬해 준 난 잠시 망설이다가 슬쩍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아직은 절 제일 좋아해 주세요.”

……언젠가 래빗이 가족을 더 좋아하게 되면 살짝 서운할지도.

“웅? 그게 무순 소리지?”

“아, 아무것도 아니…….”

“당욘한 이야기룰.”

래빗이 짧은 손을 뻗어 내 옆머리를 쓰다듬었다.

“너와 나눈 그 누구도 모루눈 것을 공유하지 않우냐. 아마도 앞으로도 푱생. 영원히.”

“…….”

“그곤 어디에도 가지 않눈다.”

왜일까, 그 말이 외롭고도 참 단단하게 느껴져서, 래빗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티 내지 않고 그저 ‘그렇죠?’ 하고 웃었다.

참 미안하게도 기분이 좋네. 나도 모르게 이 작은 아기님에게 마음을 많이 주고 의지했나 보다.

난 쑥스럽게 웃다가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곧 이곳에 새 전속 시녀와 시둉이 온다고 해따.”

“아, 드디어 오나 보네요.”

“군데 수는 아주 적울 고다.”

래빗은 자신의 처소에 사람이 많은 게 싫다고 했고 2황자가 이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사람이 없다 못해 삭막하던 모습도 곧 마지막이라니 좋은 일이었다.

그럼 나는 오늘의 할 일을 해야지.

우선 난 래빗과 노아 황자를 나란히 앉혔다.

“황녀님, 저는 어린 시절부터 벼락치기를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벼락? 벼락을 칠 듈 알았다눈 고냐? 설마 마봅사였나?”

“엥? 너 마법사야?”

래빗이 반쯤 거수하고 얘기하자, 노아가 따라서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왜 그렇게들 말씀하시는 거죠?

“제가 말씀드린 벼락치기는 그 번쩍하는 벼락이 아니고요. 일이 코앞에 닥치고서야 처리한다는 뜻의 관용어구를 얘기한 거였어요.”

“아, 이해해따.”

“뭔데?”

“롤린은 임기웅뵨에 강하댜는 고다.”

“임기응뵨? 뭔데 그건.”

노아 황자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했지만, 래빗이 한 번 더 풀어 설명해 주자 바로 이해했다. 그러고는 할 말이 있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그렇게들 손을 들고 말씀하시는 건지?

“그래서 갑자기 벼락 얘기는 왜 한 건데, 롤린?”

“음,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요?”

그래, ‘히든 피스’를 찾겠다는 각오 말이다.

오늘부터 내가 할 일은 히든 피스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그게 있으면 훨씬 빠르고 안전하게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단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제 이름은 롤린이 아니라 달린입니다. 두 분 다 제 이름을 이제 그만 제대로 불러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노아 황자는 삐딱하게 웃으며 “싫은데?” 하고 대꾸했다. 그 개구진 얼굴이 몹시 악동 같았다.

씨알도 안 먹힐 줄 알았지. 나는 피식 웃다가 나도 모르게 노아의 옷에 시선이 머물렀다.

“음, 황자님 오늘 어디 가세요? 멋지게 차려입으셨네요.”

“아, 아버지 뵈러 가야 해. 시험 보러.”

아버지란 말에 래빗이 잠시지만 멈칫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