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43)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날이니까. 끙, 시간이 없긴 한데 잠시 너 보러 온 거야.”
노아는 이렇게 말하면서 래빗의 반응이 신경쓰였는지 그녀를 흘끗 보았다. 하지만 래빗은 이미 평소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온 뒤였다.
“갈게.”
그렇게 노아는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마법을 써서 날아가 버렸다.
뭐지? 내가 노아의 등을 보며 의아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자, 래빗이 설명했다.
“황죡운 매달 한 번씩 황뎨 그놈 앞에서 자신의 성취룰 보인댜고 한댜. 오눌은 저 셋째의 차례게찌.”
아, 그런 행사가 있구나.
“으음, 이런 중요한 날까지 황녀님을 찾아오신 거네요. 노아 황자님은 그만큼 황녀님이 좋으신가 봐요.”
“뎡가신 어린애야.”
그러고 보니 래빗도 노아처럼 달마다 시험을 봐야 하나?
아기 황녀님과 황제의 만남이라…….
좋은 결과가 상상되진 않는데.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낀 건지 래빗이 입을 열었다.
“나도 하눈 고냐고 묻고 싶운 고라면 난 아직 안 한댜. 세 샬이니까, 라고 하더균.”
“아, 그렇죠.”
그치, 겨우 세 살짜리에게 한 달에 한 번 시험이라니, 그건 좀 미친 듯해. 그간 래빗이 보여 준 발군의 능력만 생각하다 깜빡했다.
“물론 말운 이러코 딱 한본 해 보긴 해찌만.”
“아? 이미 하셨다고요?”
“구래, 내게 성수로운 힘이 있다눈 게 알려지자마자 시험해 보쟈고 끌려가따.”
래빗이 잠시 하늘 쪽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
“내게 성수로운 힘이 있다는 게 알려진 그 냘.”
래빗은 담담히 설명했다. 아마 원작의 첫 챕터에서 일어났을 일들을.
래빗이 성스러운 힘을 각성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건 신전 사람들이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신관이 처음 그 힘을 느꼈고,
다음으로 황족들이 차례차례 찾아왔으며,
그 후로는 시험을 위해 끌려갔다고.
“음, 외람되지만 그냥 끌려가신 건…….”
“아니지. 그냥 갈 뚜야 있나. 더러운 비센놈둘에게.”
“황녀님, 저도 비센! 저도 비센 사람!”
“……더러운 비센 기사둘.”
후, 꽤 많은 게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먼가 보다.
어쨌거나 시험을 위한 날, 비센의 황실 기사들이 래빗을 모시러 왔고, 개중 반 이상이 래빗의 능력에 휩쓸려 쓰러졌단다.
아무래도 황제와 황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래빗의 뛰어난 능력은 물론 성질머리까지 알게 된 거겠지. 전혀 어린애답지 않은 구석도.
“아뮤튼 그때 황족도 대신관됴 있눈 자리에 꿀려가서 억지로 시험울 받았눈데, 내가 비센에만 내려오눈 힘 따위 쑬까 바.”
황실 기사들을 쓰러트린 사건으로 래빗의 성스러운 힘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사실이 알음알음 알려졌다.
이후 이를 보고받은 신전도 놀랐다고 했다. 전생의 힘이 성스러운 힘으로 와전될 만큼 강해서 사람들이 쉽게 착각했던 듯하다.
“구래서 시험 자리에소.”
“자리에서요?”
“황뎨 그놈울 찔렀다.”
“…….”
……아, 파올로가 말한 사건이 이때 일어난 거였군.
“그 장난감 같은 걸로 황제 폐하를 찔렀대. 그 뭐라더라…… 아, 그 아기들 손에 쥐고 있는 거 있잖아?”
“딸랑이?”
“그래, 딸랑이. 그걸로 황제 폐하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셨다나 봐.”
딸랑이의 역사가 이때부터 시작된 걸까.
여러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분명 그 딸랑이에서 검기가 치솟았을 거고 황제는 똑똑히 봤겠지.
“그 후로눈 날 부루지 않더군. 아직 자격이 부됵하다나. 웃기지도 않눈 소리다.”
“아니, 그건 자격이 부족해서가 아닐걸요…….”
그 자리에 있던 건 황제와 황자들, 소수의 최측근 고위 귀족, 그리고 신전. 이들이 그 장면을 보고 느꼈을 충격에 애도를 표했다.
‘어쨌거나 관계가 크게 틀어진 건 여기서부터였군.’
어쩐지 그 사태를 겪고도 래빗에게 애정을 드러내던 폭군 황제가 약간이지만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도 신전이 있었군요?”
“신관울 만난 적 없나?”
“아, 네. 없어요.”
눈을 뜨고 난 후 내 몸을 치료하러 의사, 의학자, 치료마법사 등 온갖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그중에 신관은 없었다.
왜지? 보통 신전이나 신관이라고 하면 치료 혹은 힐러의 이미지와 연결되는데 말이다.
“흐움, 비센의 신뎐은 극히 폐세적이라고 둘오따. 그들이 가진 힘을 밖우로 유출하지 않눈다고.”
“그래요?”
“구래, 어쩌다 둘운 고지만.”
예전에 시녀들이 있을 적에 몇몇 신하들이 다녀가며 떠들던 걸 래빗이 우연히 듣기로는, 몇십 년 전 신전의 성녀가 외부에서 살해당한 뒤로 신전은 그 어떤 힘도 밖으로 유출하지 않는다고 한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성녀를 허무하게 잃었기 때문이라나.
하긴 애지중지하던 존재를 비교적 최근에 잃은 집단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서 부친이 부른 의료진 중에 신관이 없었던 거구나.
“어쨌고나 신뎐은 크게 신굥 쓰지 않아도 되지만 동시에 성가신 곳이다. 그고만 알묜 돼.”
“성가신 건 왜요?”
“자꾸 나룰 부르려 했댜. 시험 냘에.”
“아, 성스러운 힘 때문에요?”
“구래.”
으음? 여기까지 듣고 나니 머리 한쪽에서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한데…….
머리를 싸매고 끙끙 고민했지만 좀처럼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 아프냐며 놀란(걱정하는) 래빗을 얼른 진정시키고 래빗의(조그만) 손을 이끌었다.
“곧 황녀님 거처에 사람들이 아주 많이 온다고 했잖아요. 그럼 저희 둘만 보내는 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한 바퀴 산책이라도 할까요?”
느긋하게 걷다 보면 뭐라도 기억날지도 모르지. 나는 래빗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정확히 30분 뒤, 나는 이 결정을 후회했다.
“아이고, 세상에, 안녕하십니까, 황녀님? 혹시 저를 기억하실는지요.”
두툼한 뱃살이 출렁거리다 못해 푸짐하게 넘쳐, 엎어지더라도 가슴이 땅에 닿지 않을 것 같은 중년 남자였다.
살짝 벗겨진 머리와 말로만 알랑거렸지 경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
거기다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옷을 걸친 사람이었다. 옷에 새겨진 무늬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문 문장인가? 이런 건 리제가 잘 알 텐데.’
“넌 모야.”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거처에 나타난 침입자를 향해 래빗이 날 선 경계를 드러냈다.
아니, 날이 선 정도가 아니라 분노마저 엿보였다.
‘궁 안에는 기사가 없더라도 경계에는 보초를 잔뜩 세워 뒀을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황제와 황자들은 극도로 감시를 싫어하는 래빗의 의견을 받들여 거처에 사람을 두지 않는 대신, 궁과 궁을 나누는 경계에는 과할 정도로 호위병을 배치했다.
래빗의 무력을 본 뒤에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나 보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말이지.
“오, 죄송합니다, 사랑스러운 황녀님. 제 소개가 늦었군요.”
이 나이 먹은 남자는 세 살짜리 아기 황녀를 상대로 공손한 척할 뿐, 속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가 정말 예의를 차리고 싶었다면, 내가 매번 2황자에게 까이던 그 인사, ‘창공’으로 시작하는 인사말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것이 황족을 대하는 기본이자 최고의 예의였으니까.
“저는 신전에서도 단 다섯 명뿐인 대신관, 그중 ‘이비탄’ 님의 세 번째 종, 론도라고 합니다. 이미 황녀님과는 황제 폐하의 알현실에서 한 번 뵌 적 있지요.”
“너 같운 놈운 모루눈데.”
“하하, 아직 어리셔서 기억을…….”
“아푸로도 업다는 말이다, 멍청한 놈.”
론도란 남자가 웃다 말고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 또박또박 박히는 래빗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래빗을 슬쩍 가리며 앞으로 나섰다.
“신관이시라고요? 누가 되었든 이곳은 황녀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나가 주세요.”
“오호, 이 미인은 누구실까.”
아, 이 인간 귓등으로도 안 듣네. 심지어 나를 보면서 음험하게 눈을 빛냈다.
신기한 것 혹은 탐스러운 무언가를 보듯.
래빗이 못 보게 앞을 가린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저는, 딸랑이에 피가 묻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황녀님의 유모, 달린 에스테입니다. 경고는 이번 한 번으로 끝입니다.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오셨는지요?”
“크흠, 신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는 귀천이 없으며, 신의 발걸음이 닿지 못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지요.”
미쳤군, 몰래 들어왔다고? 기사란 인간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딴 놈을 들여보내기나 하고?
모르긴 몰라도 나중에 2황자를 만나면 이 부분은 꼭 바로잡아 달라고 하겠다 다짐했다.
“허허, 젊은 영애가 눈빛이 새침하군요, 그래. 신께서는 당신을 대리할 종을 보내시기 위해 성스러운 힘을 사용해 저를 이곳까지 인도하셨지요.”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자연스레 밝힌 건, 나나 래빗이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나는 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
내게는 ‘빙의’ 스킬이 있다.
의지를 다지자, 가슴 한 곳이 희미하게 따뜻해졌다. 엠버넷의 응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