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50화 (50/281)

◈50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44)

나를 향했던, 내 몸 곡선을 샅샅이 훑던 신관의 시선이 어느새 내 다리 옆으로 고개를 삐죽 내민 래빗을 향했다.

남자는 한껏 성스러운 척 미소를 지었다. 살덩어리가 저렇게 흔들려서야 신성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황녀님. 당신께서 가지신 성스러운 힘은 아주 많은 것을, 그리고 더욱 위대한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당신께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지.”

한쪽 무릎을 꿇은 남자가 래빗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니, 기억났다고 할까.

[서브 퀘스트가 도착했어요! ˚✧╭( ・ㅂ・)و ̑̑✧༚!]

[퀘스트(서브) - ‘엑스트라 악역의 계획을 저지하자!’

육아물에서 빠질 수 없는 악의 세력! 개중 ‘그곳’의 엑스트라 악역1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주인공이 너무 강해졌습니다! 이대로는 엑스트라 악역의 목숨이 위험해요!

엑스트라 악역의 목숨만은 보전해 주고 계획도 저지합시다.

내용: 엑스트라 악역 ‘론도’의 생명을 지키기(내쫓기 가능), 엑스트라 악역 ‘론도’의 계획에 훼방 놓기

보상: 새로운 스킬, 건강 수치 +3

※본 퀘스트는 연계 퀘스트입니다.]

이 소설에서 신전은 이른바 ‘악역’이다.

‘로판에서 악역이 나왔다 하면 황실 아니면 신전인 것 같아. 주인공이 대공이면 악역은 황실, 신전. 주인공이 황실이면 신전……. 허허허.’

속으로 웃었지만 사실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퀘스트 창에 적혀 있듯이 이 세계의 신전은 주인공인 아기 황녀의 힘을 노리는 자들이다.

신전은 몇십 년 전 성녀가 외부에서 처참히 살해당한 뒤로 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유는 이 성녀가 신전을 지탱하는 성력의 근원이자 권력의 근간이었기 때문이다.

성녀를 잃은 신전 입장에서 대단한 ‘성스러운 힘’을 가진 아기 황녀의 등장은 그야말로 그들을 위한 선물처럼 느꼈을 터.

그 후로 신전은 아기 황녀가 자신들에게 오도록 유혹하거나 혹은 납치마저 서슴지 않았다.

거기다 폭군 황제의 딸바보력이 황성 밖은커녕 아직 내부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

실상은 래빗 쪽에서 황실을 거부했기 때문이지만 바깥사람들은 그렇게 자세한 사정까지는 잘 모른다. 밖에서 보면 황녀가 홀대받는다고 여겨질 것이다.

여기 이 뒤룩뒤룩 살찐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고.

‘무슨 퀘스트가 악역의 목숨을 보장해 줘?’

태클을 걸고 싶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나는 툴툴거리며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하긴 일부는 동의한달까. 우리 황녀님이 사람을 팬다거나 혹은 살해까지 간다거나……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사실 여기서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은 내가 직접 이 남자를 해치우는 대신 황자나 황제의 손을 빌리는 건데.

애석하게도 아직 새 시녀도 시종도 오기 전이라 지금 당장 그들을 데려와 줄 사람이 없다. 하는 수 없지.

“듣고 계십니까? 아니, 들어 주십시오, 황녀님. 당신이야말로 이 제국…… 나아가 대륙을 구원하실 진정한 위인이시자, 신전의 보물입니다. 오, 신이시여.”

“……롤린.”

래빗이 내 옷자락을 쥔 채 고개를 들었다. 심드렁한 얼굴 위로 살짝 짜증이 스몄다.

“내가 이 개소리룰 언제까지 둘어야 하눈 고지?”

“황녀님 ‘개소리’ 말고요, 우리 좀 더 귀여운 단어를 사랑하기로 해요.”

“멍멍이 소리?”

“네네, 좋아요.”

노골적인 무시에 혼자 떠들어 대던 신관 론도의 말이 멈췄다.

래빗의 괴상한 말투를 듣고서도 그리 놀라지 않은 걸 봐서는, 알현실이든 어디서든 예전에 이미 그녀가 말하는 걸 들어본 것 같았다.

그런데도 겁도 없이 혼자 나타난 것은, 제 능력으로 래빗의 힘을 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말로 현혹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하하, 황녀님. 제가 드린 말씀이 심기를 어지럽혔다는 점, 익히 이해합니다. 아직 어리시기에 모든 걸 이해하기는 힘드시겠지요.

하지만 신께서는 이 또한 이해하실 겁니다.”

“신 같운 소리하고 자빠져꾼. 내 발톱의 때나 머그라 해라.”

“……허허, 이거 아무래도 나쁜 영향을 받은 모양입니다. 황실의 기운이 좋지 않았던 탓이겠지요.”

“뭐?”

나는 신관에게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정확히는 회색에 가까운 빛이었는데, 그것이 우리를 빙 둘러 원을 만들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었다.

“래빗 황녀님.”

“괜찬타.”

“황녀님, 들어보시지요. 이런 낡은 거처는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포근한 잠자리와 새 옷, 그리고 맛난 식사가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와 함께 가신다면요.”

신관 론도가 유괴범같이 래빗을 부드럽게 꾀어냈다.

래빗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과 별개로 어린아이라면, 적어도 이런 거처에서 학대받았던 아이였다면 한번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말들이었다.

“달콤한 과자는 어떻습니까, 사탕은? 초콜릿도 있지요. 신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론도가 개기름이 살짝 낀 얼굴로 부드럽게 웃었다.

“어차피 이곳에 계셔도 당신은 사랑받으시지 못할 것입니다. 신께서 이르시는군요.”

“…….”

“당신이 가엾은 아이라고.”

그 순간이었다.

쾅!

딸랑이에서 튀어 나간 푸른빛이 땅을 갈랐다. 조금만 옆으로 갔다면 론도의 발이 그대로 베였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 앉아 래빗의 어깨를 붙들었다.

‘아이고, 황녀님! 살인은 안 됩니다! 안 돼요!’

바람에 딸랑이가 살짝 흔들렸다.

래빗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살짝 떨리는 눈꺼풀이 보였다. 무엇이 그렇게 거슬렸는지 몰라도 단단히 수틀린 눈이었다.

“지굼, 감히 누가, 누굴 동뎡해?”

“아, 이런, 죄송합니다. 진실은…… 아프고 차갑고 쓰린 법이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론도는 무언갈 단단히 오해하고서 피식 웃는 채로 말했다.

이봐, 아저씨 그거 아니야. 전혀 아니라고. 이쪽은 그냥 사랑 못 받은 꼬맹이가 아니라고!

댁의 출렁거리는 뱃살과 함께 인생 종 치고 싶어?

그런데 정신 못 차린 론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눈에는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이쪽은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앞잡이겠군요. 제대로 된 애정은 주지 않은 채 그저 감시만 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 너무 어려운 말이었나요?”

“저기! 그 입 좀!”

“아니면 굳이 곧 죽을 계집을 곁에 둘…….”

“아앗, 안 돼요, 황녀님! 때리면 죽어요!”

래빗을 말리느라 론도의 말은 거의 못 들었지만 나는 래빗의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뒤로 밀쳤다.

그 순간 론도에게서 나온 회색빛이 나를 덮쳤다. 그가 짜증 어린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히 무엄하게도 황녀님을 밀친 겁니까? 단죄해 드리겠습니다.”

회색빛이 내 몸을 옥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래빗을 보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스킬 ‘빙의(lv.2)’가 활성화됩니다!]

[기사 ‘엠버넷’(B급 영혼-능력치 조정 상태)의 힘을 받아들였어요!]

[1분간 사용 가능합니다! ※남은 시간: 00:58]

나는 벌떡 일어나 그대로 앞에 보이는 단단한 정강이를 걷어찼다.

후, 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한 손에는 일어나며 주워든 나뭇가지가 들려있었다.

“후, 멍멍이 소리도 작작 해야지.”

나는 탁탁 손을 털었다. 몸이 몹시도 가벼웠다.

1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내 안의 ‘엠버넷’이 저 아저씨를 때려눕히는 데는 충분하다고 속삭인다.

“황녀님, 이건 저한테 맡겨 주세요.”

나는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손을 휘둘렀다.

타아앙! 회색빛 반투명한 막이 검기가 깃든 나뭇가지를 막아 냈다.

그와 동시에 놀란 론도가 히익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채로 손을 교차했다.

“이익, 시, 신의 신성한 힘, 성력이다! 감히 유모 따위가 상급 신관에게 반기를 들다니!”

“유모 따위가 검기를 쓰는데 할 말이 그것뿐이라니, 상급 신관은 얼어 죽을.”

나는 손등으로 턱밑을 툭툭 치며 피식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이.

“폐하께서는 무려 검기 씩이나 쓰는 사람을 소중한 황녀님께 유모로 붙이신 거다.”

“……뭐?”

“뭐긴 뭐야, 개소리에 대가를 치를 시간이지.”

이렇게 말했지만 엠버넷의 검기는 막을 통과하지 못했다.

론도는 겁에 질려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런 식이면 알아차리는 것도 시간문제일 터.

스킬 제한 시간이 있는데, 어떡한다?

그 순간이었다.

-‘파훼의 힘’을 쓰세요.

그게 뭔데요? 나는 엠버넷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래전 펠프스에 전해지던 힘입니다. 마수에게서 기인했으며 신성력을 깨트릴 수 있는 파괴의 힘이지요.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무튼 지금 사용하기 좋은 힘이라는 거지?

근데, 그거 어떻게 쓰는 건데?

“집듕해라!”

동시에 래빗의 말이 들렸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직여 자세를 잡았다.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엠버넷이었다.

엠버넷의 힘이 내게 스며들더니 푸른빛의 검기 대신 더욱 진한, 남색 빛이 흘러나왔다.

[축하합니다! 빙의자 님이 ‘영혼의 능력’을 깨우쳤어요! °˖✧◝(⁰▿⁰)◜✧˖°]

[경지의 깨우침으로 스킬 레벨이 올랐어요!]

[스킬 ‘빙의(lv.3)’가 활성화됩니다!]

[기사 ‘엠버넷’(B급 영혼-능력치 조정 상태)의 특수능력 ‘파훼’를 발현합니다!]

[스킬 지속시간이 늘어납니다! ※남은 시간: 01:58]

대치하고 있던 회색 막에 쩌저적 금이 가더니 곧이어 쨍그랑 소리와 함께 세차게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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