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45)
그 사이에서 눈을 크게 뜬 론도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가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내 나뭇가지가 바람을 갈랐다.
콰앙!
“어, 어떻게…….”
“신관께선 말조심하세요.”
론도가 등을 딱 붙이고 있던 나무의 반이 그대로 날아갔다. 래빗이 그랬듯 론도의 어깨와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서.
찢어진 어깨 쪽 옷자락이 휴지 조각처럼 맥없이 나풀거렸다.
“우리 래빗 황녀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사랑받고 계시니까.”
적어도 내 사랑은 우리 황녀님이 독차지했다. 알겠냐.
나는 심장을 작게 간지럽히는 감정을 느끼고 웃었다. 아, 물론 엠버넷 씨의 애정도 포함해서.
“……‘파훼’라니 그리운 힘이로규나. 잊혀진 그 힘…….”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래빗이 내 손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론도는 선 그대로 얼어붙어서는 겁에 질려 덜덜 떨 뿐이었다. 닿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신관의 퉁퉁한 뺨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이거 몸이 못 견딘 건지, 나뭇가지가 못 견딘 건지.’
기력을 많이 써서 조금 어지러웠다.
내려다보니 내 손에도 상처가 난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슬쩍 래빗의 손에서 손을 빼낸 뒤 뒤로 감췄다.
“이걸로는 혼내지 마시기에요.”
배시시 웃자, 래빗은 잠깐 나를 빤히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아, 어떡하지 씨알도 안 먹힌 얼굴인데.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래빗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래빗의 손이 앞으로 뻗어 나간 것과 동시에 무언가 쾅! 부딪쳤다. 돌아보니 론도가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뭐, 뭐야.”
“뒤로 물로나!”
다행히 아직 스킬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 나는 래빗을 한팔에 끌어안고 뒤로 물러났다.
“그르륵, 큭, 그륵.”
어떻게 된 건지 론도가 입가에 이상한 거품을 흘리며 흰자위만 드러낸, 전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상태로 손을 들었다.
론도가 비틀비틀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론도의 가슴에서 이상한 빛을 띤 목걸이를 보았다. 조금 전까지 아무런 빛도 발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황녀님, 저 목걸이!”
“봐따!”
래빗이 얼굴을 찡그리며 딸랑이를 들어 올린 것과 동시에 퍼억! 수박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스르륵 눈을 까뒤집은 론도가 그대로 앞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려나?”
당혹스럽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광경에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중얼거렸다.
그때 래빗이 쓰러진 론도를 향해 거침없이 뛰어갔다.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나는 손을 뻗다 말고 멀리 론도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았다.
……황태자?
분명 폭군 황제를 알현했을 때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
“멍청한 인간의 냄새가 나서 왔더니만.”
하늘하늘 흔들리는 머리카락은 폭군이나 다른 황자들과 마찬가지로 연한 하늘빛이었다.
“……여기 오고 싶은 것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하늘이 드디어 내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황태자의 입술이 비죽이 올라갔다.
“이렇게 내가 올 수밖에 없는 구실을 만들어 주시는구나.”
채도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눈에 띄는 짙은 하늘빛 머리칼. 그리고 눈동자는 청록색.
“아, 어, 창공의…….”
“됐어요.”
존댓말?
나는 그에게서 흘러나온 존대에 놀랐다. 부드러운 말씨였으나, 그렇다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내 귀한 여동생에게 선택받은 유모라니, 존중받아 마땅하지요. 내 그만큼 그대를 존중토록 하겠습니다.”
“아…….”
그는 폭군, 동생인 2황자나 노아와 비교하면 홀로 부드러운 느낌을 가진 미남이었다.
물론 차갑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다.
부드러운 인상, 웃는 얼굴로도 감춰지지 않는 냉정함이 뚝뚝 떨어졌으니까.
그러나 래빗을 보는 순간.
겨울에서 봄을 맞이하듯, 팥빙수의 얼음이 녹듯 냉기 어린 얼굴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러고는…….
“래애비잇! 우리 엘! 엘! 유엘!”
전혀 다른 얼굴이 되었다.
뭐야, 저 표정은? 순식간에 동네 푼수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 된 황태자를 보다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아니, 아니다. 진정하자. 사실 육아물 오빠라면 그럴 수 있지. 그래, 내가 기억하는 황태자는 좀 더 냉철했던 것 같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닐 거야.
“엘엘! 아이구, 다친 곳은 없어? 응? 응응?”
“……발 좀 치오 보지 구래?”
“세 달 만에 만난 오빠한테 인사는? 응? 인사는?”
“아랐으니까 좀 치어 보랬다.”
왜냐면, 지금 황태자가 래빗을 향해 호들갑을 떨면서 발은 착실히 론도를 짓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그의 발아래에선 론도가 작신작신 밟히고 있었다.
저걸 보고 있으니 어디서 이런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삐빅- 정상적인 육아물 오빠가 맞습니다, 라는.
‘……삼 형제 중에는 제일 전형적인 육아물 오빠 같네.’
안도인지 뭔지 모를 숨을 내쉬는데, 내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고는 내 손목을 살짝 붙잡더니 위로 들어 올렸다.
“영애는 볼 때마다 어디 한 군데씩 다치는 것 같군.”
2황자였다.
황태자는 혼자 온 게 아니었던 것이다.
2황자에게 붙잡힌 내 손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으아, 피가 언제 이렇게 났대?
“손목을 다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어, 그으렇죠?”
“거기다 같은 쪽이고.”
“세상에, 그렇네요?”
“할 말은 그것밖에 없나?”
나는 눈을 깜빡였다. 데구루루, 내 눈이 굴렀다. 뭐, 할 말이 없는 건 아닌데. 왜.
“그, 화나셨나요?”
“뭐?”
“아, 황녀님은 무사하세요. 다치신 데는 전혀 없구요! 제가 황녀님만은 열심히 보호했습니다!”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2황자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무섭게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 래빗을 위험에 빠뜨려서 화가 난 건가? 그건 내 탓이 아닌데 말이지.
[스킬이 종료되었습니다!]
[경고! 스킬의 지나친 과부하가 빙의자 님의 몸에 영향을 미칩니다!]
[상태 이상 [멀미]에 돌입해요! Σ(゜ロ゜;) ※남은 시간: 05:00]
멀미? 내가 아는 그 멀미? 잠깐만, 이봐! 머리 굴리기도 바쁜데 내가 이런 것까지 느껴야 해?
[스킬 ‘몸에 나쁜 각성제(lv.1)’가 활성화됩니다!
※스킬 종료까지 남은 시간: 1:00:00]
아, 다행스럽게도 멀미가 당장 들이닥치진 않았다. 유용한 스킬이 하나 더 빛을 발했으니까. 후, 일단 1시간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 거였다.
그러나 과부하의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아서, 몸에 힘이 풀린 나는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곧 단단한 무언가가 나를 지탱해 주었다.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한 나는 화들짝 놀랐다.
“죄, 죄송합니다!”
날 붙잡아 준 사람은 2황자였다.
“영애.”
“어, 이건 수작이 아니에요. 정말 아닙니다.”
“에스테 영애.”
“진짜, 아닙니다, 전 그런 파렴치한이!”
“알고 있다.”
말과는 달리 2황자는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알았으니까, 진정하도록. 오해하진 않겠다.”
“……오해하진 않겠다는 건 결국 믿는 게 아니라 그냥 넘어가 주시겠단 소리 같은데요오…….”
“제대로 들었군. 오늘만큼은 어떤 헛소리를 들어도 무어라 하지 않을 테니 진정하란 소리다.”
2황자는 여전히 내 손목을 쥐고 있었다. 가만 보니 꽉 움켜쥐고 있는 모양새가 지혈이라도 하려고 했던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나뭇가지가 부러진 건데 왜 손바닥이 찢어진 건지 모를 일이다.
“도대체가, 영애는 아프지도 않은 건가?”
“그, 조금 긁힌 줄 알고 따끔하단 생각은 했어요.”
아니, 그렇게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혹시 신경줄이 저 북해 고래의 질긴 심줄로 되어 있기라도 한 건가?”
“……하, 하하. 재, 재밌는 농담이십니다!”
“웃으라고 한 말 아니다.”
“넵.”
나는 치켜들려던 엄지를 얼른 내렸다.
근데 아끼는 여동생은 저렇게 멀쩡한 데다 황태자랑 잘만 실랑이 중인데 왜 화가 난 거지?
‘화를 내도 저 론도놈에게 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는 조금 뚱해졌으나, 티를 내진 않았다.
“저, 그런데 황자님께서는 여긴 어쩐 일로…….”
“형님께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시면서 끌고 왔다. 도착해 보니 웬 놈이 영애와 내 여동생을 덮치고 있더군.”
우릴 발견한 건 론도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난 뒤인가.
“영애가 몸을 던져 저 애를 지켜야만 했던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묘한 반응에 나는 슬쩍 눈썹을 밀어 올렸다. 왜 날 보며 씹어 먹을 듯한 표정을 하는 거지, 무섭게.
내가 뭘 놓친 건가? 이래 봬도 로판 고인물 n년 차인데, 설마 등장인물의 심리도 읽지 못한 건가?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요정의 창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퀘스트(연계) - ‘엑스트라 악역의 계획을 저지하자!’가 완료되었어요!]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3 오릅니다! ( ๑˃̶ ꇴ ˂̶)♪⁺ 현재 건강 수치: 38]
나는 슬쩍 눈을 내렸다.
[새로운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를 얻었어요!]
[빙의자 전용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lv.1)
등급: 에픽(A) / 패시브 스킬
빙의자 만의 고유 기술, ‘히든 피스’를 찾을 확률 증가, 생존에 필요한 눈치를 비약적으로 증가시킨다.
※단, 생존 외의 것에는 조금 둔해질지도?]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는 패시브 스킬입니다. 등록하시겠어요?]
[단, 한번 등록한 이후엔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해제가 되지 않아요! ╭( ・ㅂ・)و )))]
뭐? 히든 피스 확률 증가? 어머머! 이건 사야 해!
나는 앞뒤 재지 않고 결정했다.
‘당장 등록해!’
히든 피스 발견 확률 증가에다, 생존에 필요한 눈치라니! 이게 웬 떡이냐.
의미가 좀 애매해 보이는 표현이 있긴 하나 결코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