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46)
이대로만 간다면 건강 수치가 곧 40을 찍겠는걸. 흐뭇한 기분에 난 2황자를 보며 씩 웃음지었다.
“황자님, 일이 잘 해결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황녀님께선 전혀 다치지 않으셨잖아요. 아주 다행인 일이죠.”
“그럼 영애는 다쳐도 되는 건가?”
“둘 중 한 명이 다쳐야 한다면 당연히 제가 다치는 게 맞죠?”
“…….”
2황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둘 다 ……다치지 않는 방법도 있다.”
음? 소리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했는지 되물으려는데, 우리의 침묵 사이로 다른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래빗의 소리였다.
“……일단 지혈부터 하고 약은 옮겨서 바르도록 하지.”
“아, 감사합니다. 손목도 그렇고 또 한 번 도움을 받았네요.”
“그래서 보답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런 말은 안 했는데요?
“보통은 받지 않지만, 영애가 보답하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어…… 무엇을 드릴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2황자가 내 손에 손수건을 꽉 묶었다.
잠시 요정의 창에 시선이 쏠려 일시적으로 음소거 되었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 죰, 치어 보라고 하지 않나!”
“지지, 에비! 이 더러운 인간은 지지야. 이런 건 우리 엘엘 눈에는 지지다!”
……저 둘은 생각보다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황태자의 발은 아직도 론도를 꾹꾹 즈려밟고 있었다. 와, 밀가루 반죽이었다면 아주 호떡처럼 꽉꽉 납작하게 눌리지 않았을까 싶은데.
래빗에게 대답하는 틈틈이 밟아 대는 모습이 아주 교묘하고 환상적이었다.
대단한 분이시네. 황태자.
아른거리는 기억에 따르면 황태자는 이 육아물 속 다정한 오빠 겸 흑막 캐릭터였다.
그러니까, 아기 황녀님에게 흑막이 아니라 주인공의 적들에게 흑막이랄까.
주인공 앞에서는 몹시도 부드럽고 다정하지만 뒤에서는 북풍한설이 내리는 차가운 황자님…… 이란 설정인데.
“우리 엘의 눈에는 오늘도 별이 박혀 있구나! 하하하!”
“비키라고 하지 않았나!”
“아야야, 우리 엘엘의 발길질은 귀여운 망아지 같아. 하하하!”
다정 어린 부드러움과 주접은 종이 한 장 차이였나보다.
“다신 보지 말쟈며?”
“이잉, 그런 걸 기억하고 있었어?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 오빠의 말을 기억해 주었다니, 기쁘구나!”
음? 간과할 수 없는 말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다신 보지 말자고 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육아물 오빠’가 여동생에게? 래빗은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자못 심각해졌다.
“저, 2황자님.”
“대답 못 한다.”
아,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형님의 말뜻이 무엇이냐 듣고 싶은 게 아닌가?”
“그…… 맞긴 한데, 어떻게…….”
“영애는 잘 모르는 것 같지만 그대의 얼굴은…… 아니, 그냥 느낌으로 알았다고 해 두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수긍하고 물러났다.
‘역시 황자들에게도 접근할 수 없던 이유가 있던 건가?’
평생 가족을 보지 않기로 결심했던 래빗, 그리고 다신 보지 말자고 말했다던 황태자.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은 2황자까지.
관계가 쉽지만은 않은데.
‘이래서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클리셰가 꼬이고 이야기도 비틀린 거겠지.’
나는 일단 황태자의 말을 머릿속에 적어 둔 뒤 신전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몇 가지 정보를 취합해 대충 파악한 바로는 신전은 호시탐탐 황실에 자리를 잡으려 했다.
‘그리고 계속 래빗에게 접근하려고 한 걸 테고. 뻔하지.’
현재의 메인 악역은 부패한 신전이다.
갑작스럽게 신이 내린 ‘신성한 힘’을 가지게 된 아기 황녀를 어떻게든 손 안에 넣으려는 악한 세력이자 황제를 더욱 딸바보로 만들어 주는 어둠의 조력자.
아마 원작에서는 정말로 순진한 어린아이였던 아기 황녀를 구슬려서 가족들이 ‘널 사랑하지 않는다’, ‘널 버렸다’라고 생각하게 만든 뒤에 몰래 데려가는 그런 사건이 있던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신전은 철저히 준비해서 온 셈이었다.
무려 래빗의 초인적인 감각을 뚫고 침입했을뿐더러 학대받는 보통 어린아이였다면 가슴을 여러 번 다쳤을 말들을 잔뜩 준비한 채 침입한 것이었으므로.
‘혹시라도 래빗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론도와 함께 가버렸을지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황녀님.”
내가 다시 론도 쪽으로 다가갔을 땐 래빗이 기어이 황태자를 바닥에 때려눕힌 뒤였다.
나는 래빗의 딸랑이에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하하 웃었다.
“조금 늦었지만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옵다.”
“역시나 늦었지만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래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황태자와 2황자는 내가 스킬을 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당장은 내 능력을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적은 게 좋을 터였다.
래빗을 노리는 세력이 확실해진 이상 정보가 어디서 어떻게 새어나갈지 모르니까. 적이 방심하기 쉽도록 내 정보를 숨기는 게 좋겠어.
“크게 다치지 않아소 다행이다.”
“아, 네! 크게 다치지 않았어요!”
“영애의 손바닥이 찢어진 것도 그리 크게 다치지 않은 걸로 친다면 말이지.”
갑작스럽게 끼어든 2황자의 말에 래빗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힐난이 가득 담긴 시선이 내게 돌아오자 나는 속으로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 일러바치는 건데!
“아하하, 찢어졌다니요! 황녀님, 그게 아니라요.”
“이뎬 고짓말까지 하게따?”
“아니에요! 진짜 안 아팠어요. 그래서 정말 몰랐어요!”
“그런 것 같더군, 피가 흐르는데도 모르던데.”
“허엉?”
볼을 부풀리고 더욱 샐쭉한 눈매로 나를 보는 래빗의 시선에 나는 핼쑥해졌다.
마침 부스스 일어나는 황태자가 보였다.
나는 황급히 “아, 전하!” 하고 그를 불렀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아, 어렵게 대하지 말아요. 우리 유엘엘의 유모라면 나와도 멀지 않은 사이이니.”
“이룸 똑바로 불러라. 그리고 꺼져.”
“하하하, 우리 유엘엘도 참.”
음, 래빗의 이름을 똑바로 부르지 않는 습관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이 사람이 시작이었나.
‘퀘스트 창, 황태자를 향한 호감도만 보여줘.’
[퀘스트(메인) - ‘아기 황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자’!
진행 상황:
2. 황태자(첫째 오빠) : 15 / 90 ]
음? 뭐야,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꽤 높아서 놀랐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를 향한 래빗의 호감도는 맨 처음 보았을 때도 가장 높았던 데다 홀로 마이너스가 아닌, 10 정도의 수치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황태자에게만은 그리 감정이 나쁘지 않았단 얘긴데.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래빗의 호감 10 정도는 싫어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대화는 나눌 수 있는 정도.
‘다신 보지 말자고 했는데도 이런 수치라고?’
아니다. 래빗의 입장에선 오히려 이런 말이 더 반가웠던 걸까? 적국의 황자가 다신 보지 말자고 먼저 선포한 셈이니…….
연회 날 래빗이 2황자를 대하는 태도가 어땠는지 생각해 보면, 황태자와는 의외로 꽤 오래전부터 사이가 괜찮았던 걸 수도 있다.
신기하네. 분명 처음에 황제는 물론 황족 전체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내 옆으로 오지 마랴, 그 손모가지룰 오눌부로 보고 싶지 않은가, 앙?”
“세상에, 협박마저 달콤한 타르트 같구나, 엘엘!”
“사내놈이 한 입우로 두 먈 하냐? 다시는 보지 말자며!”
“하하하, 그럴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알고 보니까 이 광경이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황녀님, 오라버니를 협박하면 안 돼요.”
내가 래빗을 잡고 작게 속닥이자, 래빗이 샐쭉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횹박한 게 아니다. 진심이어따.”
“저런, 설령 진심이어도 오라버니의 앞에서 대놓고 손목을 자르겠다고 말씀하시고 그러면 안 돼요.”
그러셨다간 제 건강 수치가 남아나질 않을 거라구요. 흑흑.
황녀를 대충 달래놓고 고개를 들자 나를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황태자였다.
파란색과 녹색이 적절히 섞인 눈동자에 부드러운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상당히 오싹한 느낌을 주는 미소였다.
웃고 있기는 한데 그 사이에 ‘감히.’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 같은데…….
“와, 스치듯 들리는 얘기는 믿지 않았는데, 내 여동생과 그대의 모습을 내 눈으로 보니 훨씬 더 놀랍네요.”
“아…….”
“아니, 아니, 일어나라고 한 말은 아니니 앉아 있어도 좋아요, 영애.”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말을 높이니 편하기는커녕 가시방석 그 자체였다.
설마 이걸 노린 건가?
“약간 질투는 나지만.”
어째 질투라는 부분에 상당히 힘을 주는 듯한데,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등 뒤에서 싸한 감각을 느꼈으니까.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생존에 관한 눈치를 증가시켜 주는 스킬 알람이 바로 뜬 것이 과연 뭘 의미하겠는가. 지금 내가 느낀 게 그냥 느낀 게 아니라는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