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47)
“랄린, 신굥 쑬고 업따. 구냥 뎡가신 인간이댜.”
“어, 음…….”
“그냥 때려눕힐 슈도 업오소 아주 뎡가시지.”
못 때려눕힌다고? 내 표정에서 의문이 드러나자 래빗이 짧게 설명했다. 저쪽이 보기보다 강한 검사라서 제대로 제압하려면 래빗도 진지하게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그 말을 하는 눈이 별똥별처럼 반짝거렸다.
“괜차눈 검사댜.”
아, 나는 황태자를 향한 래빗의 호감이 어디서 시작했는지 깨달았다.
‘혹시 이러면 이야기가 더 쉬워지려나?’
아무래도 황태자 쪽의 호감도는 좀 더 쉽게 올릴 수 있는 모양이다.
‘일단 나타나긴 했으니까.’
무슨 영문으로 다신 보진 말자 같은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알겠지.
이러다 ‘히든 피스’까지 또 찾으면 퀘스트 완료도 금방인 거 아니야? 후후후.
하지만 황태자는 형식적인 마지막 대화 이후로 내게 전혀 말을 걸지 않았다.
“엘엘,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빠 좀 쳐다봐 줘, 응? 응?”
“귀차는 소리하지 먈고 꺼져.”
“후, 하는 수 없네.”
다만 이후로도 래빗의 주변을 맴돌며 나한테 했던 것처럼 손잡아 달라, 옷자락만 잡아 달라, 쳐다보기만 해 달라며 애원, 아니 구걸하기도 했다.
끝내 한숨을 쉬며 흑흑 우는 시늉과 함께 포기한 쪽은 황태자였다.
“흑흑, 엘엘, 오빠는 일단 가 볼게. 오늘은 조금 바쁠 것 같네.”
“구래, 잘 샹각했군. 꺼죠라.”
“‘이걸’ 처리해야 할 것 같으니 말이야.”
황태자가 한 손으로 덜렁 들어 올린 건 다름 아닌 아직도 기절한 신관 ‘론도’였다.
한눈에 봐도 살집이 대단한 사람을 무슨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물 듯 덜렁 든 모습에 좀 무서웠달까.
“그리고 음, 다신 보지 말자고 했던 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는데 말이지.”
“궁금하지 안으니 꺼져.”
“알겠다, 알겠어. 라이칸, 이만 가자.”
“…….”
“라이칸?”
함께 돌아가려는 모양인지 황태자가 몇 차례 2황자를 불렀으나 웬걸, 2황자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래빗도 고개를 갸웃했다.
“먼저 가세요, 형님. 뒤따라 가겠습니다.”
“뭔데, 설마 지금 유엘엘을 독차지하려고! 너만 오빠라고 불린다 이것이냐!”
“……오빠라 불린 적 없습니다.”
“오라버니나, 오빠나! 치사하다! 너만 들락날락하더니, 혼자서 다 차지했다 이것이냐!”
“그렇게 억울하면 형님도 가끔 오지 그러셨습니까?”
정곡을 찔려서 뜨끔했는지 황태자가 마구 손가락질을 하며 신경질을 냈다.
이런 말을 하긴 조금 그렇지만 잘생긴 얼굴로 저렇게 구니까 확실히 없어 보이긴 하네. 역시 나는 내 취향인 미남에게만 유한 모양이었다.
신전에 대한 내용이 떠오름과 동시에 내가 이 소설을 읽을 때 2황자를 제일 아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났다. 그렇지, 뻔하지만 여기서 내 취향은 저 사람이긴 하지.
“그래, 너만 실컷 즐기겠다, 이거지. 각오해 둬. 황실 기사단 총 동원 훈련은 네 차지다!”
“그건 원래 제가 맡았던 것입니다.”
“마정석 토굴 시찰도 네 차지다! 여름 축제 첫 연설문 초안도 네가 해!”
“……알겠습니다. 알았으니 이만 가세요.”
“허? 그럼 세금…….”
“형님. 자꾸 이러시면 안 알려 드립니다?”
“아, 안 돼!”
황태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 뒤 한참 입을 삐죽이더니 손에는 덜렁 론도를 매단 채 돌아섰다.
무슨 형제 싸움이 이렇게 유치해? 걸려 있는 안건이 딱 봐도 중요해 보여서 그렇지, 투덕거리는 모습만 보면 흡사 초딩 싸움 같았다.
“넌 사람울 다룰 줄 아눈구나. 기상이 있도댜.”
“그냥 형님의 약점을 잘 아는 거다.”
“공뉴 가눙한가?”
“대가를 치른다면.”
래빗은 조금 전 황태자가 치대던 것이 어지간히 성가셨는지 2황자를 상대로 거래를 걸고 있었다.
그리고 세 살배기 아기와의 거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 남자는 또 뭐지.
“약점 하나에 부탁 하나. 하나는 공짜로 알려 주지.”
“조타, 몰 좀 아눈군. 너 마움에 둘어따. 다시 나탸날지 모루지만 저건 좀 뎡가시단 말이지.”
2황자가 사나운 낯으로 슬쩍 끄덕이더니 래빗을 곁눈질했다.
“부탁은 먼저 해도 되나?”
“모, 조탸. 기분 죠으니 이룸을 걸고 머든 들어주게따.”
“……오빠라고 불러 다오.”
“기갹한댜.”
래빗이 단 3초 만에 말을 바꿨다.
하나 2황자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너는 네 이름을 건 약속을 그리 쉽게 여기는 사람이었나? 그렇다면 그 이전에 내게 약속했던 것도 그만큼 가벼웠고?”
“으윽, 치샤하게 그고까지 끌어두리눈 고냐.”
“치사하다고 하기 전에 먼저 약속을 저버리려는 건 누구지?”
“아라따. 지키게따.”
래빗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입을 꾸우욱 앙다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시선만 올려 주변을 살피는가 싶더니 다시 빼꼼 고개를 들었다.
“……오뺘.”
내 옆에서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돌아보니 빨개진 목덜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올리자 예쁜 색으로 발그레 물든 귀가 보였다.
‘오, 쑥스럼 탄다.’
2황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 그 모습이 더욱 잘 보였다.
살짝 타긴 했어도 여전히 하얀 피부가 붉게 물드니, 까칠함이나 사나움이 일순 걷히면서 섬세하고 청명한 생김새가 두드러졌다. 완전 절경이었다.
나는 멍하니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외람되지만 전하, 정말 잘생기셨네요.”
말하고 나서야 핫 정신이 들었다.
“아, 이건 정말 이성으로서의 사심 없이 그냥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오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해…….”
“네!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까요!”
그러자 2황자가 확 미간을 찡그렸다. 긴장으로 어깨가 떨려왔다. 뭔데. 뭔데, 또. 대체 뭐가 심기가 불편한 건데!
“아, 죄송해요……. 이런 칭찬도 불편하셨던 거면…….”
“아니,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니 그만 말해도 좋다. 그, ……그런 말은 자주 들었으니 영애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새삼 기분이 나쁘거나 할 건 없다.”
“아, 그렇군요?”
“들었나? 기분 나쁠 건 없다고.”
“어, 네……? 네, 나쁠 건 없으시군요!”
마침 래빗이 끼어들어서 우리 대화가 잠시 중단됐다.
“그론데 오…… 빠. 넌 왜 요기 남운 고냐? 저 놈울 쫓아가지 않고?”
“그 호칭, 생각보다 기분 좋게 들리는군.”
제삼자의 눈에도 확실히 그래 보였다. 듣자마자 나 때문에 굳었던 얼굴이 다시 슬쩍 풀렸으니까. 와, 이래서 육아물 오빠들에게 여동생이란…….
“호오, 이론 걸 이용할 슈 있군?”
[훌륭한 육아물 ‘주인공’은 호칭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아요!]
[클리셰 달성! 요정이 기뻐해요,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오릅니다!⁽⁽◝( ˙ ꒳ ˙ )◜⁾⁾ 현재 건강 수치: 39]
흐음, 하지만 이번엔 히든 피스를 얻었다는 알람은 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로는 얻어걸리지 않는다는 건가.
사실 지난번 히든 피스가 사실 소 뒷걸음치다 닭 잡은 격이었던 거라 크게 아쉽진 않았다.
“치료를 위해 남았다.”
“치뇨? 아.”
두 쌍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로치, 랄린은 치료가 피료하다.”
“네 거처에 상주할 의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말이지.”
“적절한 대응이어꾼, 훈늉하다.”
래빗이 2황자의 손등을 탁탁 두드려 주었다. 그는 제 손등을 물끄러미 보더니 나지막하게 웃었다.
“손은 씻지 않아야겠군.”
……이렇게 차분한 태도로 극단적인 여동생 바보 모습을 보일 수도 있구나. 이게 바로 진짜 광기인가.
2황자는 내 시선을 마주하고도 ‘뭘 그렇게 쳐다보냐’는 표정으로 맞서며 다시 한번 광기를 입증했다. 여동생에 관해서는 그 무엇도 부끄럽지 않다는 거지?
“어쨌거나 치료하러 가지.”
“됴타.”
2황자가 자연스럽게 래빗에게 팔을 내밀었다. 래빗이 흠칫 경계하며 딸랑이를 꾹 움켜쥐었다.
“모 하는 거지?”
“안는 거다.”
“니가 왜 날 안눈단 말이도냐.”
“그럼 내 거처까지 걸어가려 했나?”
“사람울 시쿄.”
“넌 이곳에 낯선 사람이 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뿐만 아니라 약을 여기까지 가져오게 하는 것보다 직접 가는 게 빠르다.”
오, 논리적인데.
2황자는 팔을 거두지 않은 채 이어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루이프가 없지. 널 허공에 띄워줄 사람도 없단 거다.”
“그롬…….”
“설마 부상자의 손에 안겨 가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건 아니었는지, 래빗이 입을 딱 다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2황자에게 안겨 가고 싶진 않은지 부풀린 볼에 불만이 가득했다.
“아니면 여기 남아 있어도 좋다. 영애와 함께 다녀오지.”
“익, 날 안아라! 툭별히 허락하게따!”
오, 2황자 입꼬리 올리는 것 좀 봐. 꽤 근사한데.
“기꺼이 그러도록 하지.”
“롤린, 요기다 요기.”
내가 옆으로 가서 서자 래빗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더니 2황자를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봤다.
“왜 그런 얼굴이지? 불편한 곳이 있나?”
“……불푠해지면 때릴 고다.”
“편하다는 이야기군.”
“…….”
인정하기 싫은 거구나.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정말로 웃을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