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49)
“아니, 그 나이엔 다 그렇다뇨?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진짜 아니라니까요?”
“어허, 나 때눈 마리다, 젊은이둘이 더 솔직하게 지내고 그래써.”
여기서 라떼 찾지 마세요!
“내가 마리야, 남녀 문제눈 좀 쟐 알고 이찌!”
“거짓말 마세요, 평생 혼자 사셨으면서!”
평생 대륙 정벌만 하면서 결혼도 안 하고 황위는 조카에게 물려주고 혼자 늙어 죽은 거 알고 있거든요?
래빗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자기도 즐길 건 다 즐겼다고 소곤대는 것이었다.
이게 정녕 아기 입에서 나올 소리가 맞냐고요.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끙, 황녀님, 제가 어떤 부분에서 오해하시게 만든 건지는 알겠는데, 진짜 아니에요.”
그러나 래빗은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는지 그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만 솜뭉치처럼 작고 말랑한 두 손이 내 손가락을 꼬옥 잡았다.
“나눈 가죡이 되눈 것두 챤성이댜. 어누 놈으로 쥴까?”
“진지하게 말씀하지 마세요!”
애초에 황녀님이 줄 수 있는 거냐고요!
내가 정말 진저리를 치자 래빗은 그제야 고개를 갸웃하며 추궁을 멈췄다.
결국 다른 화제로 넘어가긴 했지만 래빗은 포기하지 않고 간간이 두 사람의 얘기를 꺼내려고 시도했다.
그에 질린 나는 일단 히든 피스고 뭐고 황태자 얘기를 아예 꺼내지 않기로 했다.
“알게따. 사실 네 심졍도 이해눈 한댜. 한쪽운 멍쳥이에 푼수고, 다룬 한쪽운 너무 사납게 생교찌. 아무리 잘생교도 진지하게 됴아하기는 힘둘 거댜.”
일단 황태자 쪽은 절대 멍청이에 푼수가 아닐 걸요, 황녀님 앞에서만 그런 거지.
그리고 2황자는 외양으로만 치자면…… 오히려 취향인데요. 그 좋아하기 힘든 얼굴, 제가 참 좋아하는데 말이죠.
“일단 둘 다 제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아니에요. 애초에 저는 혼인 생각이 없어요.”
“아니, 왜?”
“일단 음,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시거든요. 한때 아팠던 몸이라.”
건강으로 화제가 넘어가자 래빗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지금은 건강하다고 거듭 주장했지만 통하진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스킬 ‘몸에 나쁜 각성제(lv.1)’가 활성화 중입니다! (※종료까지 남은 시간: 21:34)]
[스킬 종료 시, 상태 이상 [멀미]에 돌입해요! (ू˃̣̣̣̣̣̣︿˂̣̣̣̣̣̣ ू ) ]
‘돌아가야겠네.’
결국 2황자는 내가 돌아갈 때까지 래빗의 거처에 머물렀다. 도통 대화에 끼지 않아서 대체 왜 남은 건가 싶었지만.
여동생이 노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저쪽도 중증의 여동생 바보인 듯하니까.
‘그런데 2황자까지 래빗에게 거리를 둔 이유가 있었을까?’
2황자의 호감도 조건은 이미 완수했으니 굳이 몰라도 상관없겠지만, 그 이유가 황태자와 관련된 걸 수도 있잖아.
‘한 번 얘기해 볼까.’
우선 오늘 집에 가서 파올로와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다.
“황녀님,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구래, 내일두 올고지?”
“물론이죠. 이제 두말하면 입 아프죠!”
잠깐 시무룩했던 래빗이 금세 화색을 보였다.
방싯 떠오르는 미소가 봄날에 핀 조그만 벚꽃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데려다주지.”
“어? 아…… 네.”
나는 성큼 다가온 2황자가 내민 손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슬쩍 손을 얹었다.
래빗의 눈이 고양이처럼 새초롬해졌다. 황녀님, 오빠를 ‘저놈 봐라?’ 하고 흘겨보면 안 돼요.
사실 오늘 내내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히 있던 사람이 이러니까 조금 무섭기도 하다. 돌아가는 길에 무슨 할 얘기가 있어서 이러는 걸까?
“그, 가기 전에 2황자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아, 황태자 전하에 대한 질문은 아니구요.”
“……뭔가.”
“오늘 저희를, 아니 황녀님을 습격했던 신관은 어떻게 될까요?”
내 말에 2황자와 더불어 날 졸졸 따라오던 래빗도 일순 멈칫했다.
2황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짙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은 대질심문에 들어갈 것이다. 다만, 그 심문이 절대 인도적이지 않겠지. 당연한 일이다.”
“아.”
“그리고 남은 건 사형뿐일 터다. 감히 황실의 가장 은밀한 곳에 몰래 침입한 것으로 모자라 감히 최고로 귀한 존재를 덮쳤으니, 목숨으로도 부족하다.”
잘못 들으면 낯간지러울 소리를 잘도 이렇게 차분하게 말하는구나, 2황자는.
“부친께서 살려두시더라도 형님께서 살려두지 않을 것이고, 내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네,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이건 왜 물었던 거지?”
“음, 황녀님께서 혹시나 신경 쓰이실까 봐요.”
물론 저기 북해의 고래 심줄보다 탄탄한 심력을 가진 황녀님이시니 악몽을 꾼다거나,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래도.
‘차차 어린아이로서의 자아를 찾아가는 중이니까.’
예전보다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조금씩 보이고 있으니, 오늘 일이 어떻게 기억에 남든 후환은 없었으면 했다.
“영애는 참으로 내 여동생을 아끼고 생각하는군.”
“네. 유모니까요.”
동시에 손에서 자그마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조그만 손을 마주 잡았다.
“일단 그 신관의 뒤에는 신전이 있겠지. 황실은 이런 끔찍한 일을 지시했을 그곳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하기야 그건 그렇다.
신관은 어쨌거나 세 살짜리 아이라 쉽게 데려올 수 있을 거라 믿고 저지른 걸 테니까.
실제로 원작에서는 성공을 거둔 기습이기도 했다.
‘이번엔 실패했지만.’
마지막에 눈을 까뒤집은 모습이 좀 신경 쓰였는데, 황자들이 발벗고 나선다고 하니 문제는 없을 듯했다. 원래 육아물 오라버니들은 유능하기 마련이거든.
특히나 여동생의 위험에 대해서는 가진 능력의 최소 두 배에서 열 배까지는 능히 발휘하는 인간들이 바로 육아물 오빠들이지.
혹시라도 황제가 직접 나서서 일을 해결하면 래빗의 호감도가 오를지도 모른다.
만족스럽게 돌아가려는데, 래빗이 돌연 우리 앞을 막아섰다.
“롤린, ‘그곤’ 두고 가라.”
“그, 설마 ‘그것’이라고 말씀하신 게 2황자님은 아니시죠?”
“맞댜. 두고 가.”
……이건 제가 두고 갈 수 있는 물건, 아니 사람이 아닌데요?
내게는 선택지가 없는 일인데.
“이 오뺘 놈과 할 얘기가 있댜.”
래빗은 고집을 부려 기어이 2황자가 남게 만들었다.
“오눌은 혼자 가두 괜찮겠나?”
“네, 물론이죠.”
“혹시 무솝다면…… 기샤를 불러 듈까?”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사양했다.
한편으로 거처에 낯선 이를 들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래빗이 날 생각해주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홀로 다니던 길이었다. 혼자 돌아간다고 해서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두 황족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돌아섰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서인지, 발걸음이 아주 가벼웠다.
* * *
달칵.
달린이 방 안에서 나가기 무섭게 래빗이 제 둘째 오빠 라이칸을 보았다.
라이칸은 한참이나 달린이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래빗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뺘 놈아.”
“……분명 오빠라 불러달라고는 했지만 그런 식의 부름은 참 신선하군.”
라이칸은 선선히 대답했다. 그는 래빗이 놈이라 불렀단 충격보다 오빠라는 단어가 주는 만족감이 더 컸다. 어쨌거나 본인만 불리는 호칭이 아니던가?
아마, 제 형이 이 사실을 안다면 땅을 치다 못해 ‘나도 불리고 싶어!’리며 배를 까뒤집고 생떼를 쓸지도 모르지만.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즐거움은 다음 순간 산산 조각났다.
“달린이 그렇게 예뽀 보이더냐?”
바로, 그의 여동생의 한마디에 의해서.
“푸흡, 뭐?”
래빗은 콜록 거세게 기침을 하는 오빠를 보면서도 뚱한 표정이었다.
“아니면 대체 온종일 내 슈하룰 쳐다보눈 이유가 모냐?”
그랬다. 전생의 로아타 황제, 현생에서도 감각이 예민하며 신체 능력이 우월한 래빗은 어렵지 않게 오늘 온종일 자기 쪽으로 꽂히는 시선을 알아차렸다.
라이칸은 교묘하게도 보통 사람인 달린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것도 달린이 쳐다보지 않을 때만 달린을 보았다.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모르겠군, 내가 쳐다본 건 너다.”
“구래, 나‘도’ 바께찌.”
그래, 래빗을 본 것도 사실이다.
갈수록 달린에게 향하는 빈도수가 미묘하게 많아졌을 뿐이지.
“내 오래 살디 안았찌만 이곤 알게따. 네뇸, 우리 달린한테 무순 꿍꿍이를 품은 고냐?”
“꿍꿍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래빗은 오래전 변절한 군졸과 적에게 매수된 지휘관을 지겹도록 상대했었다.
비록 그것이 전생의 일이라 감각이 현역때만 하지는 못하다고 하나 이 오빠란 놈이 거짓말을 하는 정도는 뻔히 보였다.
“관찜이라됴 있나?”
“관심은 무슨, 누가 관심이 있다는 거냐!”
확실히 요즘 라이칸이 달린을 보는 모습이 이전과 달랐다. 분위기라거나 행동이라거나 시선이 그랬다.
“그롬 내 유모를 왜 그렇게 뚤어죠라 쳐다본 고냐!”
“그, 그건!”
라이칸이 잠시 당황했다.
왜, 왜 쳐다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