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57화 (57/281)

◈57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51)

황태자는 부드러운 미소 속에 감추고 있던 진짜 표정을 드러냈다. 칼날 같은 냉혹함이 느껴졌다.

비유하자면 영화의 한 장면에서 나른하게 앉아 있는 최종 보스 캐릭터를 연상시켰다. 상대를 살살 구슬려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결국에는 살려주지도 않는 잔인한 악당같은.

오우 젠장. 실로 오랜만에 보는 ‘실패 시 사망’이란 문구에 정신이 아찔하다 못해 눈앞이 번쩍 뜨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마차 안의 희미한 빛이 마치 취조실의 흔들리는 등불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황태자가 빙긋 웃었다.

“모르겠다, 라. 그럼 이렇게 물을까요?”

“…….”

“당신은 신전의 사주를 받고 내 여동생에게 접근했습니까?”

[빙의자 님을 가엾게 여긴 요정이 약간의 특혜를 주기로 결정했어요! o(iДi)o]

[지금부터 빙의자 님에게는 생존에 도움이 되는 선택지가 제공됩니다!]

선택지?

[<선택하세요!>

1. “사, 살려주세요!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시, 신전이라뇨!”

2. “들켰군요. 맞습니다, 제가 바로 신전의 끄나풀이죠.”]

…젠장. 이제 하다 하다 미연시냐?

아니, 기왕 이쪽으로 갈 거면 나도 미남이랑 알콩달콩할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르게 해 달라고!

사형대가 대기하고 있는 취조 심문이 아니라!

‘일단 제시해 준 선택지 둘 다 그리 도움이 안 돼.’

2번은 절대 고르지 말라고 준 선택지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1번을 택하자니 겁에 질려 아무렇게나 내뱉는 대사 그 자체라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 다 선택하지 말자.’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가뜩이나 믿을 수 없는 요정 놈이 내준 선택지에 의지할 순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이래도 모르겠다.”

황태자가 손을 들어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들어 올렸다.

“나는 황실 내 심문을 자주 맡아 왔는데, 이때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바로 모르겠단 소리입니다. 물론 그렇게 말한 이들 모두 30분 뒤에는 다른 답을 주곤 합니다.”

창문 밖 풍경은 어둑했지만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왜 황성 안에 이런 숲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결단코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차가 멈췄다. 황태자는 보란 듯이 창문을 고갯짓했다.

“이대로 영원히 이 숲에 잠들고 싶습니까?”

[<선택하세요!>

1. “자, 잘못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자,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잘못했습니다!”

2. “이런, 이미 늦었군요. 맞습니다. 저는 신전과 관계가 있습니다. 한데 이게 왜요?”]

다시 선택지가 떠올랐으나 나는 흘끔 쳐다본 뒤 무시했다.

“저를 의심하시는 까닭이 무엇인지요.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군요.”

황태자는 넓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먹이를 노리는 맹수같이 형형한 눈빛이었다.

“영애는 어느 날 갑자기 내 여동생과 마주했고, 그대로 그 아이의 마음을 얻어 유모의 자리를 거머쥐었지요.”

“유모의 자리는…….”

“네. 나의 부친께서 주셨으나, 그건 기실 내 여동생이 원했기 때문이고, 그 아이는 3년 남짓한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그런 걸 원한 적이 없습니다.”

‘뭐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건조했으며 차가웠다.

“그대가 등장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여동생을 신전으로 넘겨 달라는 신전의 연락이 쇄도했습니다.”

“그건…….”

나랑 무슨 상관인데?

“거기다 이제는 신전의 습격까지 있었군요. 그것도 매우 공들인 습격이었죠. 삼엄한 황성 경비를 뚫기 위해 신성력 전이에 이동 장치까지 사용했으니까요. 마침 그때 여동생 옆에 있었으니, 이에 대해서는 당신이 더 잘 알겠군요.”

“…….”

“다른 건 차치하고, 내가 가장 의아했던 점은 이겁니다. 신관은 마치 여동생이 그 시간에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는 듯 쉽게 내 여동생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황태자의 눈이 매처럼 좁혀졌다.

“마치, 내부에 조력자라도 있었던 것처럼.”

“지금 제가 그 조력자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건가요?”

“잘 아는군요.”

황태자가 자신의 검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여유로운 몸짓이었으나, 나는 굶주린 들개가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바짝 긴장했다.

“사실만 열거하면 당신이 내 여동생 옆에 나타난 뒤로 신전의 습격이 발생했고, 너무나 쉽사리 침입에 성공하는 등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습니다.”

[<선택하세요!>

1. “말도 안 돼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2. “억울합니다, 억울해요! 정말 억울해요!”]

난 이번에도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그간 황녀님 거처에는 암살자가 출몰해 왔습니다. 이번 침입이 처음이 아님에도 저를 의심하시는 까닭은…….”

암살자에 관한 건 2황자만 알고 있었지.

이 사람에게 전했을지 모르겠지만 방금 살짝 얼굴이 일그러진 걸 보면 최근에 알게 된 듯했다.

“아, 그렇죠. 애석하게도 감히 내 여동생 거처에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본질적으로 다르지요.”

“무엇이.”

“유엘이 당신 옆에서는 경계를 완전히 풀어 버린다는 점에서요.”

내 입술이 딱 멈췄다. 눈앞에 무어라 선택지가 떠올랐지만 바라보지 않았다.

“오늘 내 여동생과 있는 모습을 보며 느꼈습니다, 내 여동생은 영애 옆에서 그 예리한 감을 잃는다는 걸.”

쯧, 황태자가 낮게 혀를 찼다.

“잘 웃는 모습은 아주 좋았지만 그 대상이 타인이어서야…….”

뱀 같은 것이 내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 ‘대상’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너무 억울해서 당장 반박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니, 이 양반아. 내가 우리 황녀님을 어쩌고 어째? 나는 니네가 친해지지 않으면 죽는다고! 다이! 죽음 몰라?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영애에 대한 소문과 처지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정해 볼까요. 영애가 신전을 도왔을 때 신전이 그대의 병을 치료해 준다고 했다면?”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의심했단 말이야?

긴장이 탁 풀렸다. 그리고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나는 끓는 감정을 감추고 살짝 미소지었다.

황태자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걱정을 하셨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이제 아프지 않으니까요.”

건강 수치 40이 보우하사, 메인 퀘스트가 끝날 때까지 이들이 헛짓거리를 하지 않는 한 나는 아프지도 죽지도 않는다. 이 황태자 놈아.

“애초에 건강이 따라주기에 감히 황녀님의 곁에 서기를 자청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한 번 훑어본 황태자가 마찬가지로 빙긋 웃었다.

“확실히, 그렇게 보이는군요.”

와, 찐 흑막의 미소란 이런 거구나. 그림자가 진 탓에 미소는 몹시 음울하게 느껴졌다.

“뭐, 사실 나는 영애가 정말로 신전의 끄나풀이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내 여동생을 위험하게 만드는 요소를 굳이 살려 둘 필요가 있는가, 그런 생각은 듭니다.”

이 미친, 육아물!

육아물 오빠들은 원래 이렇게 눈이 빙글 돌아있냐? 이딴 걸 좋다고 읽는 건 어느 미친 인간이야!

아 시바, 내가 이 소설 좋아했었지. 과거의 나 어딨냐, 때려 버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도대체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하라고? 이미 저 남자의 눈이 짙은 의심으로 가득한데?

하지만 진정해야만 했다. 이대로 여기서 죽을 수는 없잖아. 이 퀘스트의 실패는 찐 사망이다.

거기다 황태자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 말인즉 혹시라도 이 앞의 이야기가 다르게 진행되어 이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았더라도, 다른 상황, 또 다른 누군가가 같은 이유로 나를 의심할지도 모른단 얘기다.

그렇다면 여기서 황태자를 비롯해 누구나 확실히 설득될 만한 논리를 찾아야 해.

“자, 그럼 내가 영애를 조용히 죽여 없애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어느새 긴 장검이 소리 없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창문 근처로는 어른거리는 기사의 모습. 어쩌면 날 죽일 시에 시체는 여기에 유기할 사람 아닐까.

[<선택지를 고르세요!>]

나는 선택지를 가만히 쳐다보다 요정의 창을 불렀다.

‘요정, 선택지를 끌 수 있어?’

[요정은 가능하다고 대답해요! (´;д;)]

‘그래, 그럼 꺼.’

어차피 집중력만 흩뜨렸다. 내 목숨이 달린 일, 내 생각과 내 목소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하, 고단한 내 인생.’

선택지 창이 사라졌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날 향한 의심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나는 스스로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하신 말씀, 모두 일리 있습니다.”

황태자의 의심은 합당했다. 내가 생각해도 타이밍이 몹시 공교로웠으니까.

부패한 신전 그놈들은 왜 하필 나랑 래빗이 만나고 나서부터 적극적으로 요청을 넣고 난리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황태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전 그중 한 가지를 정정하겠습니다.”

살아남자. 그리고 퀘스트도 깨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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