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61화 (61/281)

◈61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55)

“황태자놈, 듁…… 흠씬 때려 줄 테댜.”

“아, 그건 좋네요.”

“먈리지 않아?”

“황녀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일이면 제가 어찌 말리겠어요.”

우리 래빗 황녀님, 씩씩하시기도 하지. 딸랑이를 쥐는 손은 또 얼마나 야무진지!

그런 래빗의 모습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양 갈래로 예쁘게 묶은 머리는 푸른색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옷차림도 예전과 다르게 귀여운 레이스가 달린 펑퍼짐한 원피스였다.

비록 활동성이 좋은 옷을 포기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많이 타협한 모습이랄까.

아, 심장 아프다. 너무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거 아니야?

본래도 몹시 귀엽던 아기 황녀님은 이제 톡 치면 톡 하고 베이비 파우더 향을 내는 데다 복숭아처럼 뽀샤시한 뺨을 가진 더욱 사랑스러운 황녀님이 되었다.

먹을 게 잘 나오니 금세 살이 통통하게 오르셨던 것이다.

하, 맛난 거 많이 드시게 하며 뿌듯했지.

그리고 현재 래빗이 걸친 옷과 리본은 모두 황태자가 가져온 거였다. 무려 직접 사들였다나.

사들였다기보다는 사 재꼈다는 게 맞겠지.

래빗은 이 또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아니, 호감도를 생각하면 황태자의 존재 자체를 정말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기보다 호감은 있는데 티를 내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래빗의 호감도가 최악을 찍었느냐. 또 그렇진 않다.

‘퀘스트 창, 황태자를 향한 호감도만 보여줘.’

[퀘스트(메인) - ‘아기 황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자!’

진행 상황:

2. 황태자(첫째 오빠) : 81 / 90 ]

보다시피 신기하게도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볼 수 있다.

2주간 황태자를 향한 호감도가 어마어마하게 높아진 것이었다.

물론 이 결과를 꽁으로 얻은 건 아니었다. 우선 첫 번째로 황태자가 정말…….

“꼬지라고! 넌 멍멍이냐? 그만 쪼차오라고!”

“우리 엘엘! 오빠가 짖어 볼까?”

이건 과연 사람인가 개인가. 아니면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인가 싶을 정도로 쫓아다니며 열심히 굴렀던 결과였고.

“황태자님 정도면 성품도 부드럽고 사람이 괜찮으신 것 같아요.”

“……구래?”

두 번째로 옆에서 손과 입이 닳도록 황태자 칭찬과 좋은 말을 한 나의 노력.

특히나 두 사람을 붙여 주려 애쓴 나의 노력이 콜라보를 이룬 것이라 하겠다.

물론 황태자를 향한 래빗의 호감도를 올리기엔 이것으로도 부족하긴 했다.

이전에 약 15 정도였으니 거의 70이 오른 셈인데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이 정도 노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을 거다.

이게 다 내가 찾아낸 두 번째 ‘히든 피스’ 덕이었다.

놀랍게도 두 번째 히든 피스를 얻기 위해서는, 황족 중 한 명을 상대로 페널티가 사망인 퀘스트를 성공시켜야 했다. 한마디로 진짜 목숨 걸고 굴러서 얻었다는 소리다.

거기다 황태자와 지내면서 황태자가 래빗을 위해서 어마어마하게 옷을 사 재끼는 모습을 본받아 열심히 사탕을 사 드렸더니 건강 수치도 엄청 올랐다.

“황녀님! 여기부터 저기까지 모두 골라보세요! 황도 제일의 장인이 만든 사탕이래요!”

“오오오, 마움에 드는군, 자랑스럽됴다!”

이른바 등장인물이 육아물 주인공을 위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라고 외치며 물건을 사 재끼는 일명 ‘돈 지랄’ 클리셰를 충족하며 얻은 쾌거라고나 할까.

첫 번째 히든 피스를 찾았을 때는 3황자의 호감도를 달성시켜 주었지만, 이번에는 그때와 다르게 황태자를 향한 호감도를 고작 40 올리는 데 그쳤다.

‘아쉬운 일이지.’

그렇게 히든 피스에 나의 도움과 황태자의 노력이 더해진 끝에 황태자 루트도 달성을 거의 코앞에 두고 있다 이 말씀이지.

‘음?’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나타난 건지 모를 황태자가 저 멀리서 알짱거리고 있었다.

래빗은 진작 눈치챘으면서도 황태자 쪽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와, 황녀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어요!”

대신 통통한 뺨이 씰룩 움직였다.

“황녀님, 사실은 황태자 전하를 좋아하시는 거죠?”

“뉴, 뉴가 저 몽총한 놈울!”

“으음, 그렇구나.”

“그 올굴운 모지? 무례하댜!”

“엇, 제 얼굴은 항상 이랬는걸요.”

“광댸가 솟아 이따!”

“에이, 사실은 좋아하시는 거잖아요. 네? 네?”

나는 래빗에게 속닥거리면서 래빗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사실 황태자 전하께서 매일같이 찾아오는 게 싫진 않으신 거죠?”

“구만햬라.”

“넵.”

래빗이 딸랑이를 움켜 쥐는 것이 보여 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래빗은 싫은 표정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틀림없이 곧 메인 퀘스트 조건을 달성할 것이다.

이외에 아직 남은 것들을 따져 보았다.

일단 래빗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는 서브 퀘스트 ‘저 하늘의 별도 따다 줄게!’에서 마지막 소원이 남았고.

황태자까지 달성하고 나면 남은 인물은 하나, 황제였다.

“황녀님, 혹시 황제 폐하를 만나 보시면 어떠세요?”

“…….”

래빗은 대답이 없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긴 속눈썹이 꽃잎처럼 팔랑팔랑 흔들렸다.

나는 눈동자에 가득한 경계를 느꼈지만 이제 그 안에 오로지 ‘적의’만 담겨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말을 꺼내길 잘했다 생각했다.

“댱쟝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요, 한번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 해서 드린 말씀이었어요.”

시간을 못 박은 게 아니라고 순순히 물러나자 래빗은 주사 맞으러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들은 아이처럼 끙끙댔다.

그러고 보니 최근 래빗에게서 아이다운 느낌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었다.

“그뇸운 실타!”

“처음엔 황자님들도 싫어하셨죠.”

“…….”

“저도 싫어하셨고.”

래빗의 뒤로 살금살금 접근하던 황태자가 교묘하게도 나한테만 살벌한 기운을 내뿜었다. 움찔한 난 얼른 정정했다.

“하지만 이젠 저도 황태자님도 모두 좋아하시고요.”

“넌 됴아하지만 그놈운 안 됴아한댜.”

“에이, 같이 노시고 이 정원에 들이실 만큼 좋아하시면서.”

한순간에 변한 황태자의 표정은 여동생 바보의 모습 그 자체였다.

“엘엘! 감동이구나!”

“머야! 댜가오지 마라. 꺼뎌!”

이런 모습만 보면 참 실없는 사람인데. 실상은 중증 의심병에 수틀리면 모가지부터 써는 미친 육아물 오빠라니.

이미 한바탕 살벌하게 겪은 사람으로서는 그저 한시라도 빨리 황태자와 떨어지고 싶은 기분이다.

“날 그렇게 좋아했다니, 정말 감동이야. 이 오빠는 오늘 죽어도 좋구나! 아아!”

“그롬 듁…… 아니, 흠씬 두둘겨 맞기 시루면 꺼디라고!”

“오, 그래그래. 오늘은 새로운 옷을 사 왔지. 궁금하다고?”

“손 모갸지가 날아가고 싶댜고?”

“그렇지, 나도 녹색을 좋아한단다. 곧 여름이지!”

오, 서로 자기 할 말만 하는데. 집단적 독백인가.

난 남매의 대화 아닌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다섯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지금 두 사람은 단순히 대화하는 게 아니라 서로 딸랑이와 검집으로 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끼어들었다간 뼈도 못 추릴 거다.

가뜩이나 갓 태어난 토끼보다 약한 취급을 래빗에게 받고 있는데, 근처에 있다가 불똥이 튀어 괜히 다치기라도 하면 황태자를 향한 호감도만 떨어진다.

다툼의 승자는 당연히 래빗이었다.

황태자를 가볍게 때려눕힌 래빗이 쪼르르 달려와 내 앞에 멈춰 섰다.

“랄린.”

“네. 달린이지만 오늘은 랄린, 명을 받습니다?”

래빗이 우물거리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난 너룰 시로하지 않아써.”

“네?”

“그저, 암살자로 오해한 고지.”

연한 색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더니 곧 눈만 들어 내 눈치를 보듯 응시했다.

“나눈 예뿐 걸 좋아하고, 너눈 처움부터 마음에 둘었다. 그로니까. 실어한 젹 없따. 아랐찌?”

아,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요. 어쩐지 래빗의 머리 위로 진짜 토끼 귀가 쫑긋하는 환상이 보인 것만 같았다.

“듣교 있나?”

“네! 네! 네! 물론이죠!”

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고 중요한 건 우리 아기 황녀님이 오늘도 귀엽다는 거지! 그리고 귀여운 건 늘 옳다.

“그리구 네갸 말한 것됴 한 본 생각…….”

“유모님!”

누군가 커다랗게 부르는 소리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다.

‘황실 시종이잖아?’

시종이 다가오다가 움찔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황태자를 이제야 본 모양이다.

“제국의 가장 빛나는 첫 번째 날개,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황태자가 성의 없이 손을 내저었다. 흐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구로나, 롤린?”

“아, 그, 황족에게 하는 인사 중에 창공으로 시작하는 고대 인사요. 이건 안 하나 싶어서…….”

“그건 귀족만이 하는 인사입니다, 영애.”

설마 황태자가 직접 설명을 할 줄 몰랐던지라 난 잠깐 말문이 막혔다.

황태자의 경우 이미 창공 어쩌고 하는 진명과 관한 인사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두 번째 만남에서 허락했었다. 듣기 귀찮다나.

다들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 대체 왜 하는 거야.

“하는 이에게나 듣는 이에게나 아주 성가신 인사지요. 발음이 그토록 까다로우니,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을 먹이기에는 제법 좋은 방법이라 할까요.”

“……그렇게 솔직히 말씀하셔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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