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65화 (65/281)

◈65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59)

“……어째서 종이꽃인 거지.”

“음, 어떤 왕국에서는…… 특정한 날짜를 ‘부모의 날’로 지정해서 기념하는데, 이때 자식들이 붉은 꽃을 부모의 가슴에 달아 드립니다. 어린아이들의 경우에는 생화를 준비하는 대신 종이로 꽃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요. 물론 우리 제국에 그런 날은 없지만…….”

“…….”

“제가 황녀님께 말씀 드려서 함께 만들었습니다.”

황제의 손이 꽃 앞에서 잠시 멈추더니 이내 종이 카네이션을 쥐었다.

비록 카네이션이라 부르기엔 조금 엉망인 꽃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모양이 중요한 선물이 아니었으니까.

“……영애가 애써 설득했겠군.”

황제는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지, 기분 좋은 게 아닌가?

처음엔 기분 좋은 표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볼수록 헷갈렸다.

“저, 황녀님께서는 아주 사랑스러우시며 이종이꽃을 만드시는 모습조차도 완벽하고 사랑스러우셨습니다.”

“그랬겠지.”

“이 모든 것은 황녀님께서 황제 폐하를 쏙 닮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옳은 말이군.”

[주연 ‘폭군(황제)’가 빙의자 님에게 희미한 호감을 느낍니다!]

아, 기분 좋으신가 보군. 다행이다.

지난 2주간 보고 타임을 통해 나는 아부 스킬을 완벽하게 터득했고, 황제를 상대로도 잘 통한다는 사실에 흡족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황제는 금세 다시 냉정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난 속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아니, 뭔데. 뭐가 문제인 건데. 카네이션을 받고 지금 좋아한 거 아니냐고. 내가 잘못 본 거야?

사실 황제는 그 속내를 알기가 좀 어려웠다.

날 유모로 임명할 때는 조금이나마 딸바보 싹이 보이더니, 이후로는 딱히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주 3회 보고를 시킬 때에도 드디어 딸바보의 시작인가 했는데 며칠 지켜본 결과 내가 또 앞서 나간 듯했다.

이래서 클리셰가 다 비틀어진 건가. 속으로 고민하는데 누군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폐하, 싫으시면 저 주세요.”

황태자였다. 그새 피는 멎었는지, 그는 꽤 멀쩡한 낯이었다.

싱글싱글 웃으며 황태자가 손을 뻗으려 하자, 순간적으로 거센 바람이 일었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의 압박감을 느꼈다.

그러나 황태자는 태연했다.

“아버지, 그렇게 뚱한 표정을 하고 계시면 싫어하시는가 싶잖아요. 이번엔 진짜 싫어하시는 것 같으니 저 주세요.”

“이걸 가져서 뭐 어쩌겠다는 것이냐?”

“우리 엘엘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만들었다니 세상에나, 이건 당연히 가져야지요. 돈 주고도 못 사는 물건인데! 제 평생의 보물로 삼아 간직해야지요!”

황태자의 손끝이 카네이션에 닿는 순간 퍼억 살벌한 소리와 함께 소파가 뒤집혔다.

그리고 저 끝에 날아간 황태자가 보였다.

황태자는 넘어진 채로 아야야, 신음하며 입가에 흐른 피를 닦고 있었다.

또 한 번의 유혈사태에 나는 당황했다.

“손대지 마라.”

“…….”

“그 누구도.”

폭군 황제가 한 손에 카네이션을 소중하게 쥔 채 살벌한 얼굴로 한 자 한 자, 끊어 엄포했다.

그런 다음 꽃을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내게 손짓했다.

“이제 됐다, 영애. 나가 봐도 좋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퀘스트(서브) - ‘폭군의 기분을 풀어 보자!’의 조건을 달성!

2. ‘주인공(아기 황녀)’이 수가공한 물건을 황제에게 전달]

어쨌거나 기분은 좋으신가 보네.

눈치를 보며 돌아서려는데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테 영애, 바라는 것이 있나? 소원하는 것도 좋다.”

나는 슬그머니 다시 돌아서 황제 쪽을 보았다. 소원이라니.

어느 틈엔가 내 옆에 선 황태자가 입술을 비틀며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은 카네이션을 손에 넣지 못해서 단단히 뿔이 난 것 같다.

……진심이었던 거야?

“잘됐습니다, 영애. 이참에 제국도 달라고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삐딱한 목소리에 멈췄던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 사람이 미쳤나, 나한테 왜 이러세요. 님의 심술에 자꾸 날 끌어들이지 말라고!

하지만 황제는 태연하게 그 개소리를 받아쳤다.

“제국을 줄 수는 없으나 장차 제국을 물려받을 아들은 줄 수 있지.”

“그 아들의 의사는 생각지 않으시는지요?”

“네가 싫으면 둘째와 셋째가 있겠군.”

“허어, 아버지.”

“네에에?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 사람들이 뭐라는 거야. 겨우 바로잡은 이야기 다 어그러트릴 일 있나! 나는 살아남을 거라고!

그리고 이 황실 남자들은 트럭으로 갖다 줘도 싫다!

“저놈은 취향이 아닌가? 말이 많은 놈은 경박해 보일 수 있겠군.”

“네에?”

황제의 살벌한 앞면 디스에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여기에 뭐라고 대답하냐고.

“저, 폐하, 그럼 제가 말, 말씀드려도 될까요?”

“허한다.”

사실 여기서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폐하…….”

나는 황태자를 잠시 곁눈질했다.

“아니, 폐하와 황태자 전하 두 분께는 래빗 황녀님을 사랑하면서도 다가갈 수 없으셨던 이유가 있었던 겁니까?”

눈 딱 감고 질렀다!

하지만 말을 꺼낸 동시에 빙하기처럼 싸늘해진 주변의 공기를 느끼자 살짝 후회가 들었다.

“하하하, 이것 참.”

먼저 입을 연 것은 별안간 소리 내어 웃기 시작한 황태자였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안 그런가요, 아버지?”

황태자가 웃음을 참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흘끗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침묵으로 허락을 대신한 것 같았다.

“대답은 내가 하죠. 맞습니다. 나는 내 여동생을 지극히 사랑하지만 동시에 어떤 강력한 동기로 그 애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처음으로 피로해 보였다.

“그 애의 몸에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그리고…….”

불거진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황태자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아니, 나와 내 부친은 유엘이 황제를 살해할 거라 의심하고 있습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누가요. 우리 래빗이요? 왜? 설마 이 사람들, 래빗이 적국에서 환생했다는 걸 아는 거야?

“그리고 그 원흉은 신전. 그들이 유엘의 몸에 금지된 신성력을 걸었다는 것까지 파악했습니다.”

황태자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상황을 이해하기는커녕 미궁에 빠졌다.

여기서 신전이 왜 나오죠?

“그 애가 성스러운 힘을 각성한 뒤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제국의 기사를 공격한 것이었죠.”

앗, 잠깐만 그건…….

“그런 직후에는 황제를 살해하려 들었고.”

아앗, 그것도…… 다 이유가 있었는데요…….

나는 차마 이렇게 말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그리고 그 애가 각성하자마자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우연히’ 근처를 거닐었다던 고위 신관이었습니다. 이로 금지된 신성력을 써서 유엘을 조종했음을 알 수 있었죠.”

황태자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사납고 어두웠다.

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그거 오해인데, 오해인데요!

‘비센을 향한 래빗의 원한이 이런 오해를 불렀단 말이야?’

하지만 주변을 누르고 있는 살벌한 공기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말을 한다고 해서 이들이 믿어 줄 리도 없거니와 요정의 창의 제약으로 래빗의 환생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언급할 수 없었다.

‘……아니, 이렇게 심각한 오해를 어떻게 풀어?’

잠시 침묵이 깔린 뒤, 황제가 입을 뗐다.

“의문은 해소되었나?”

“아, 네…… 되었습니다, 폐하.”

나는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겨우 대답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내 얼굴도 퍽 심각해 보였을 거였다.

“아쉽겠습니다, 영애. 제국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조건은 유효하다.”

래빗에 대한 이야기를 더는 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 그들은 얼른 화제를 바꿨다. 하필 그리 달갑지 않은 주제로.

“첫째는 싫다고 했나? 다행히 아직 후보가 둘이나 남아 있군.”

“예?”

왜 갑자기 얘기가 이리로 다시 튀는 거야?

“어, 그 폐하.”

“그래서 둘째는 어떻지?”

“그, 어, 더, 더 싫습니다!”

우선 누가 됐든 황실 사람은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특히나 2황자에겐 고마움이 남아 있던지라 더더욱 나랑 엮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황태자보다 더 말인가?”

“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살아남는 게 제일 먼저니까!

“…….”

그런데 어째 사위가 고요했다.

옆에서 황태자가 소리 죽여 웃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지 황태자는 어깨까지 움츠린 채 끅끅거리며 웃고 있었다. 왜 이래?

고개를 돌리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열린 문 앞에 2황자가 서 있었다.

“……더 싫다?”

고저가 없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내 눈이 크게 떨렸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너무나 급한 일이라 급히 문을 열었습니다.”

2황자가 저벅저벅 걸어 나를 스쳐 지나가는데,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BGM으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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