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66화 (66/281)

◈66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60)

본의 아니게 퇴짜를 놓다니, 망했다.

상대는 떡 줄 생각도 안 했는데 혼자 난리를 쳐?

그래도 나 싫다는 사람에게 질척거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안 그래? 그렇지!

나는 빠른 자기합리화를 통해 안정을 되찾았다.

“영애, 그래서 대답은?”

“아, 그…….”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폐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소원은 나중에 다시 말씀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 * *

“……흡, 끕. 흡….”

나는 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으며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옆을 향했다.

“청컨대, 전하, ……부디 웃음을 멈춰 주십사 말씀 드려도 될까요?”

“흐흡, 내게, 명령을, 끕, 내리는 건가요?”

황태자가 짐짓 ‘감히’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웃음을 참느라 상기된 얼굴은 전혀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거, 웃음이나 참고 얘기하세요.

“제가 감히 어찌 그런 천인공노할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황태자가 걷기 시작했기에 나도 다시 따라 걸었다.

“덕분에 참으로 유쾌한 광경을 봤군요. 아, 라이칸의 그 표정이라니!”

유쾌한 웃음소리가 무슨 만화의 효과음처럼 따라붙었다.

슬프다. 넌 기쁘니? 난 앞일이 걱정돼 죽겠는데.

“왜 웃는지는 안 물어봐요? 물어봐도 좋아요. 허락할 테니.”

“……외람되지만 무엇이 그리 유쾌하신지 여쭤볼 수 있습니까?”

“내 동생이 너무 귀여워서요. 덩치만 컸지 참으로 귀엽다니까요. 푸흡, 아, 흡.”

“아, 예…….”

남은 심란해 죽겠는데 아주 신났지.

면전에서 ‘너 싫다’라고 까 버린 뒤였다. 그것도 본인은 떡 줄 생각도 안 했는데! 앞으로 2황자를 어떻게 보냐고.

“영애도 조금 전 그 분위기를 느끼지 않았나요?”

“조금 전이라면 저는 이 한목숨 어찌 될지 몰라 벌벌 떨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만…….”

너랑 폭군이랑 싸웠잖아.

“그런 것치고는 잘도 태연하게 앉아 있었군요.”

“……태연하지 않았습니다.”

“뭐. 아무튼, 영애는 생각보다 둔하네요.”

둔하다니, 눈치가 없다가는 까딱 죽을지도 모를 판국인 내게 이건 모욕이었다.

“저,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2황자님께는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아, 뭐. 좀 과한 감은 있었지만 영애의 진심 아니었습니까? 없는 소리도 아니고 이미 지나간 일이니 영애도 즐겨요.”

뭘 즐겨, 돌았니?

그러나 황태자가 열받는 소릴 하더라도 그에게 따지고 들지 않을 머리는 있었다.

에이, 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얄미운 인간 같으니.

“내 라이칸이 저리 반응하는 건 처음 봅니다. 아주 재밌었달지. 고맙습니다, 영애.”

“아, 네…….”

그냥 관심을 주지 말자.

내가 눈을 내리깔며 힘없이 답하자, 황태자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곧 흥미를 잃은 표정을 했다.

“영애는 영, 나랑 맞지 않습니다. 참 재미없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님과 나는 아주 안 맞는 성향 같거든. 혹시 MBTI가 나랑 정반대이신지?

속으로 현대 지구의 최첨단 과학기술이 집약된 인간관계론을 찾으며 구시렁거렸다.

“그 문제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보다는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습니다.”

황태자가 자리에 멈춰서 나를 응시했다.

“황실을 대표해 감사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네? 감사…… 라니요?”

갑자기? 내가 뭘 했다고?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니 복도에는 저 멀리 보초를 서는 기사들만 보일 뿐 사방이 고요했다.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이것부터 이야기해야겠군요. 영애도 이미 보고 들은 게 있어 짐작했을지 모르나, 폐하께서는 유엘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으십니다.”

“…….”

“음, 황실의 치부일 수도 있겠지만-”

황태자의 눈이 살짝 옆을 굴러 기사가 있는 쪽을 향했다. 곧 우리 주변으로 진한 남색 빛이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이게 황태자의 마나란 걸 알았다. 소리를 차단하는 용도라는 것도.

“정확히 말하자면, 폐하께서는 두려워하고 계신 겁니다. 앞으로 영원히 유엘과 마주하지 못할까 봐.”

“…….”

“그리고 경계하고 계시지요. 이 황실이 신전의 금지된 신성력에 잠식될까 봐.”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래, 이것부터 얘기해 볼까요?”

황태자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아버지께서 유엘에게 선물을 잔뜩 보내신 적이 있었죠. 그날 한 시간도 안 돼서 그 선물이 몽땅 찢기고 버려졌단 얘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신음을 흘렸지만, 그의 말을 끊진 않았다.

“시험의 날에도 비슷했습니다. 그 애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도 역시 아버지가 보냈던 선물이 눈앞에서 산산조각이 난 걸 본 기억이 있군요.”

“그럼…… 폐하께서 거기에 상처를 받으셔서……?”

“네? 아뇨?”

사실 폭군이 생각보다 여린 사람이었던 건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황태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지는 그깟 선물 따위 눈앞에서 천 번이든 만 번이든 부순 대도 신경도 안 쓸 사람입니다.”

그건 아니군.

“다만 다른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유엘 그 애가 선물을 부수다 다친 겁니다.”

“아.”

“놀랍게도 시험의 날, 그 애는 피를 흘리면서도 선물을 망가뜨리고, 마치 황제 폐하도 이렇게 부숴 버리겠다는 듯이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아버지께 그대로 돌진했습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 악에 받친 모습이 너무 잘 상상되었으니까.

거의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니, 그 정도면 황족들도 오해할 만도 했다.

“마치 큰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

“그 광경을 보고서 아버지는 신전이 황녀를 세뇌시켰다고 확신하셨고 다신 그 애와 아무런 소통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 애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란 걸 나도 알겠더군요.”

당시 래빗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눈을 떠 보니 적국에 태어난 것도 기막힌 상황.

거기다 부친이라는 자를 처음 대면한 자리에 나타난 것이 평생 일군 나라를 멸망시킨 적장의 얼굴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날부터 나와 아버지는 신전의 만행에 분노를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선물 이야기를 할 때만 해도 약간의 부드러움과 씁쓸함이 남아 있던 황태자의 얼굴이, 송곳 하나 들어갈 자리 없이 차갑고 딱딱해졌다.

“신전이 ‘금지된 신성력’으로 그 애를 조종하여 황실을, 특히 폐하를 공격하게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황태자가 짓씹듯이 말했다.

“아마 그들의 목표는 래빗의 손으로 황제 폐하와 황족들을 몰살하는 것. 황실이 신성력을 타고나는 것에 대해 내내 불만을 가진 세력이었으니…… 감히 그 어린아이를 이용해 저지른 짓거리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는 끙, 속으로 숨을 삼켰다.

아니야, 아니라고, 이 양반들아. 당신들 오해한 거라고!

입 밖으로 내어 말하고 싶었으나,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증명할 수 있냐고 물으면 어떡해?’

의심 많은 이 인간 앞에서 자칫 잘못 입을 열었다간 나까지 의심받는 수가 있었다. 그럼 바로 데드 엔딩 직행이다.

저 남자가 칼을 빼 드는 상상만 해도 목 뒤로 솜털이 삐죽 서는 기분이었다.

“저어,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네, 허락합니다.”

“그으, ‘금지된 신성력’이란 게 뭘까요?”

폭군이나 황태자나 래빗이 그 금지된 신성력에 당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눈치였다.

이런 디테일한 설정 부분을 읽었는지 내 머리엔 기억이 남아있지 않으니, 직접 질문하는 수밖에.

“음, 황실에 대대로 신성한 힘이 내려오는 건 알고 있을 겁니다. 사실 이 힘은 신전이 가진 신성력과 성질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네.”

“다시 말해 황실의 힘은 신성력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단 소리인데.”

황태자가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자 중 고위 신관부터는 사람을 세뇌할 수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일찍이 이 힘의 위험을 깨달은 황실에서는 세뇌 능력의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설마…….”

“네. 유엘 그 애가 신성력을 각성하는 순간, 고위 신관이 가장 먼저 달려왔습니다. 최초의 접촉자는 그 고위 신관. 따라서 우리는 신전이 유엘 그 애에게 무슨 짓을 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신전에 대한 얘기를 하는 목소리가 음산했다. 나는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눈을 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 보는 부친의 목을 그어 버리겠다고 달려들 아이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날 있었던 일은 황제와 래빗 양쪽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건가.

“이렇게 아버지는 여러 이유로 유엘을 경계하셨지만, 동시에 그 애와의 소통을 위해 다시 선물을 보내고 싶어하셨죠. 그러나 이미 그 애의 마음은 닫힌 상태였습니다.”

황태자의 눈이 나를 향했다.

“하지만 영애가 유엘의 선물을 전해 드렸으니, 아버지의 아들로서 또 유엘의 오빠로서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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