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67화 (67/281)

◈67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61)

생각보다 내가 건넨 종이꽃의 의미가 컸던 모양이다.

어느새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띤 황태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듣고 나면 라이칸 그 애도 똑같이 느끼겠지요.”

진정한 사랑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방치.

그들이 만약 래빗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즉시 죽여서 해치우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내 생각보다 폭군과 황태자가 래빗을 많이 아끼고 있었구나. 그러면서도 의심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도 알겠고.

‘사랑하기에 해결법을 찾을 때까지 방치했다, 라…….’

나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황태자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이야기하고 싶은 건 여기까지였던지 황태자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퀘스트(연계)- ‘황태자는 왜 신전에게 콩밥을 주고 싶을까!’가 완료되었어요!]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건강 수치 10, 아이템 ‘사이렌 오더’ 강화서, 히든 피스 단서]

“라이칸의 일은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선심 쓰듯 뱉은 목소리가 귀로 따라붙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건 전혀 위로가 되지 않거든?

그렇지만 이제 잘 알겠다.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이 황태자와 황제로 하여금 래빗이 다시는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믿게 하는 거란 걸.’

다시 말해 신전이 래빗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황제와 황태자가 믿게 하는 것.

그리고 래빗에게는…….

‘폭군을 향한 믿음을 심어 주는 것.’

나는 가만히 황태자의 등을 쳐다보았다.

‘서로 마주 보면서 웃게 되는 상황을 연출해 보자.’

주먹을 꾹 쥐었다.

‘그 폭군 황제도 우리 래빗의 살인 미소를 볼 수 있게, 한번 해 보자고.’

“영애?”

뭐 하고 있느냐는 듯한 황태자의 얼굴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인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래빗의 거처에 막 발을 디뎠을 무렵, 나와 황태자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황녀님?”

거대한 문 앞에 래빗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릴 발견한 순간 그녀가 타다닥 뛰어왔다.

“황녀님, 앗, 황녀님! 넘어져요!”

“엘엘! 천천히!”

놀란 내가 팔을 벌린 것과 동시에 내 몸이 휘청했다. 품 안을 가득 채운 몸에서 포근한 아기 내음이 풍겼다.

그건 귀여운 꽃향기 같기도, 혹은 볕을 듬뿍 쬔 폭신한 이불 냄새같기도 한 향기였다.

“왔누냐.”

고개를 든 래빗이 방긋 활짝 웃었다.

“이졘 롤린 네가 없눈 거처가 너무 심심해졌어.”

“…….”

“없우면 안 되겠어.”

이상하게도 래빗의 미소가 오늘따라 너무나도 눈이 부셨다.

그건 이젠 래빗의 웃음이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진짜 ‘아이’의 미소처럼 보였기 때문일 거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고, 그 틈을 타고 황태자가 끼어들었다.

“엘엘! 이 오빠는 보이지 않니!”

“아, 왔누냐.”

“으흑흑, 그런 귀찮다는 얼굴이라니…… 오빠는 상처받았어…….”

내 품에 안겨 있던 래빗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정정한다. 최근 들어 아이다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는 거지, 이럴 땐 여전히 인생 2회차라는 느낌을 팍팍 풍겼다.

‘우리 래빗 동심 찾기에 있어서 황태자 놈은 해악이 아닐까.’

황태자가 냉큼 무릎을 접고 앉았다. 간절한 표정이 어째 꼬리라도 흔들 기세였다.

“엘엘, 오빠 오늘 엄청 노력했는데, 약속 지켜 줄 거지?”

“…….”

“앗, 그 못 믿겠다는 표정은 뭐야! 진짜라니까?”

흘끗, 황태자의 나른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얘길 하려고…….

“엘엘의 유모가 오늘 죽을 뻔했는데!”

“저, 전하!”

아니나 다를까, 나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이놈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 누구 퀘스트 말아먹을 일 있나!

그러나 이미 래빗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은 뒤였다.

“하하하, 황녀님. 아니에요, 아무것도…….”

“똑뱌로 얘기해 바.”

“황녀니임…….”

나는 황급히 래빗을 안으려 했다. 그러나 래빗은 내 뺨을 꾹꾹 누르며 황태자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으앙, 망했다.

“말 그대로야. 아버지께서 다른 일로 화가 좀 나셨는데, ‘초월자’의 분노를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래빗은 ‘초월자’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으엉! 처음부터 황태자가 그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다면 황제와 싸울 일도 없었을 것 같은데!

아니지, 반대로 생각하면 황태자가 없었다면 보좌관이 시비를 걸었을 때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려나.

‘아, 그냥 황제를 향한 호감도가 떨어질 건 각오하자.’

이미 망했다는 생각에 힘이 쭉 빠졌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황태자를 향한 호감도나 올라라.

“내가 도왔어, 엘엘.”

어느새 석양이 내려앉는 시간이었다.

노을빛을 머금은 황태자의 얼굴은 솔직히 조금 그럴싸했다. 잘생겼다는 소리가 아니라 오빠로서 꽤 듬직했다고 해야 하나.

“네가 바랐잖아.”

“…….”

“아버지에게 맞서는 한이 있더라도 네 유모를 지켜 달라고.”

래빗은 대답하는 대신 눈을 돌려 나를 향했다. 정말이냐고 묻는 시선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빙긋 웃었다.

“맞아요, 황녀님. 제가 무사히 다녀온 건 모두 다 황태자 전하 덕분이에요.”

솔직히 맞는 말이긴 하지. 폭군이 보좌관과의 시비에서도 잘 지켜 줬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도 저를 향해 화를 내신 것이 아니라, 음, 다른 이유가 있으셨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폭군을 변호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각오했다지만 호감도가 너무 떨어지면 안 된다고.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지켜 주셨어요.”

래빗의 어깨너머로 황태자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편을 들어줄 줄은 몰랐다는 얼굴.

“……뎡말이었군.”

“하하, 엘엘. 이 오빠를 향한 신뢰가 그렇게 낮아서야…….”

황태자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헛웃음이 살짝 섞였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여동생 바보 오빠의 모습이었다.

볼수록 참 신기했다.

이렇게 웃으면서 그간 래빗의 몸에 신전이 장난질을 쳐놓은 거라 의심해 경계하고,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언젠가 가까워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니.

‘그 바람, 내가 없었다면 끝내 이뤄질 수 없었을지도 몰라.’

나는 내 손을 잠시 내려다봤다.

그 사이 래빗은 어느새 다시 고개를 돌려 황태자를 마주 보고 있었다.

“고먑다.”

석양을 배경으로 툭 터져 나온 한 마디에 황태자의 입이 꽉 다물렸다.

“……오뺘.”

이어진 말에 나는 황태자가 언제나처럼, 아니, 더 극성맞은 여동생 바보의 얼굴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표정이겠지.

그러나 눈을 들고서 나는 그대로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입을 지그시 누른 황태자는, 뜻밖에도 할 말을 잃은 아이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눈을 크게 뜬 채로 딱딱한 조각상이 되어 버린 채로.

석양빛에 물든 푸르른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축하합니다! ‘주인공(아기 황녀)’의 ‘황태자(첫째 오빠)’를 향한 호감도가 90을 넘었습니다!]

[퀘스트(메인) - ‘아기 황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자!’의 조건 달성! (현재 달성도 75%)]

[세계가 원작으로 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축하합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오릅니다! 현재 건강 수치: 61]

건강 수치가 처음으로 60을 넘었다는 소리가 귀에 잘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드디어 황태자마저 메인 퀘스트 조건을 달성했다는 것에 전율이 일었으니까.

[퀘스트 진행 속도 단축에 따른 보상! 스킬 ‘불굴의 의지(Lv.-)’를 획득합니다!]

[빙의자 전용 스킬 – 불굴의 의지(Lv.-)

등급: 유니크(AA)

빙의자 만의 고유 기술.

건강 수치 0에서도 1시간 동안 버틸 수 있다.

이때 건강 수치는 1로 고정되나, 스킬 사용 중엔 매우 건강한 상태를 유지한다.

※단, 스킬 종료 후에도 건강 수치가 0일 시 즉시 사망한다. ]

메시지 창이 우르르 뜨면서 보상을 알렸다. 나는 어마어마한 스킬을 본 순간 눈을 깜빡했다.

잠시만, 내용 실화냐?

건강 수치 0에 1이 어쩌고 저째?!

‘이거 절대 쓸 일 없겠군. 아니, 없어야 해!’

현재 건강 수치가 무려 60을 넘었는데, 아무리 깎여도 60이 확 깎일 일은 없겠지?

아니, 쓸 일 자체가 없어야 한다고.

이 스킬은 봉인이다, 봉인!

“약속…… 은 지켜써!”

래빗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제야 황태자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이어서 물속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숨을 살짝 가쁘게 내쉬었다.

“어, 그래…… 음.”

“…….”

“맞아. 약속 지켰네, 엘.”

얼굴을 문지르며 웃는 얼굴은 내가 봐도 되나 싶도록 무장 해제된 느낌의 웃음이어서 나도 모르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음, 날이 좀 춥나, 괜히 중얼거리고 팔뚝을 어루만지는 척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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