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68화 (68/281)

◈68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62)

이후로 넌 그만 돌아가라는 래빗의 말에 황태자는 선선히 돌아갔다.

마지막에 라이칸은 계속 오빠라 불리는데 왜 난 안 되냐며 꿍얼거리는 걸 들었는데. 그 꼴을 봐서는 황태자의 다음 목표가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황태자까지 완전히 정상 궤도에 올랐다 이거지.’

래빗의 희고 말랑한 뺨 위로 주홍빛 석양이 얼룩덜룩 드리우며 춤을 추었다.

“황녀님. 기분 좋으세요?”

“웅? 뭐…… 좋을 게 모가 있겠누냐.”

거짓말. 뺨 한가득 웃음이 가득한 게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요.

나는 놀리는 듯한 말을 속으로 살짝 삼켰다. 대신 다른 질문을 꺼냈다.

“황녀님, 요즘 행복하세요?”

“헁복?”

래빗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론 골 느껴본 적이 너무 오래전이오소 잘은 모루겠다만, 이 졍도면 행복한 것 같댜. 너눈?”

“저요? 음, 저도 행복하죠.”

나는 지금까지 고생해온 걸 생각하다 입술을 움직였다.

“황녀님, 제가 없어도 행복하시겠죠?”

“머?”

말을 하고도 아차 싶었다. 이런 말을 꺼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래빗은 놀란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모냐, 왜 그러는데? 어디 가? 가눈 거냐?”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그롬 왜? 떠나눈 고냐? 나를 떠나려고?”

커다란 눈이 평소보다 크게 뜨인 채 내 아기 황녀님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얼른 아이를 진정시켰다.

“죄송해요,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일단 떠나는 건 아니에요.”

그저 내게는 바로 잡아야 할 소설이 아직 세 편이나 남아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현재 슬슬 끝이 보이는 이 이야기를 바로잡고 나면, 나는 마치 다른 챕터로 접어들 듯 래빗의 곁을 잠시 떠날지도 몰랐다.

적어도 매일같이 출근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

“그냥, 황녀님도 성장하실 거잖아요. 그럼 수많은 사람을 만날 테고, 그중에 좋은 사람도 있을 테니까.”

“…….”

“조금 빠르지만 그날을 생각해봤어요.”

래빗은 내 말을 모두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이해했다는 듯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래빗의 손에서 형편없이 구겨지다 못해 살짝 찢어지기까지 한 내 옷은 래빗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보여 주는 듯했다.

“구래, 네 말대로 나눈 성장하겠찌. 안다.”

래빗의 손은 너무 작아서 내 새끼손가락도 겨우 붙잡곤 했다.

“하지만 잊지 마라, 내가 성장할 수 있눈 건 모두 네 덕분이댜. 뎐생과는 다른, 진짜 가족도 생기게찌. 그 또한 네 덕뷴이다.”

멈춰 있는 존재는 성장하지 않는다.

지금 이 걸음은 모두 네 덕분이라고, 래빗의 곧은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없우면 안돼.”

“…….”

“행복하냐고? 네가 있소소 행복한 고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코를 훌쩍거렸다.

이게 무슨 추태야, 주책맞게. 에이 씨. 속으로 괜히 중얼거려보며 눈을 들어 올렸다.

“저도, 앞으로 황녀님이 진정으로 지금보다 더 행복하시길 바라요.”

처음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깨야 하는 퀘스트일 뿐이었지만, 차차 정말로 황녀님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게 되었거든요.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기왕 주는 거, 래빗에겐 가장 좋은 것만 안겨 주기로.

남은 이야기들을 바로 잡을 때까지 나는 계속 세계를 떠도는 빙의자로 남아 있겠지만.

래빗은 환생했더라도 나처럼 표류하지 않고 이 세계에 완전히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돌아갈까요, 황녀님?”

* * *

보통 해가 질 무렵엔 래빗의 거처에서 퇴근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저녁까지 남아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래빗이 무척이나 좋아한 건 물론이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 몰랐네. 다음엔 자고 가 볼까?’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좀 더 머물기로 했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티타임을 즐기는데, 도중에 누군가 래빗의 응접실로 들어왔다.

들어오는 사람을 본 순간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왔누냐.”

“그래.”

2황자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집, 집에, 집에 가야 한다! 머리에서 삐용삐용 경보음이 마구 울렸다.

“그래서 둘째는 어떻지?”

“그, 어, 더, 더 싫습니다!”

우렁찬 내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미친, 저는 아직 2황자님의 용안을 뵐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그런 소리를 한 당일에 바로 상대와 마주할 수 있을 만큼 뻔뻔하지 않단 말이야!

“아, 안녕하세요, 황자님…….”

2황자는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그냥 돌렸다.

아니, 그전에 고개를 까딱 끄덕이긴 했지만 내 눈에는 네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다는 걸로 보였다.

과하게 겁먹은 나머지 왜곡해서 본 걸지도 모르겠지만, 알 게 뭐야. 무섭단 말이야!

“차를 마시고 있었나.”

“그래, 오늘따라 챠 맛이 아주 조타.”

2황자가 보일 듯 말 듯 작게 미소를 띠었다.

“네 유모와 함께 마셔서 더 좋은 건 아니고?”

“모 틀린 말운 아니다만, 왜 그렇게 확신하눈 말투지?”

“나와 마실 땐 그런 표정을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침만 꼴딱꼴딱 삼키며 두 황족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오, 이제 2황자랑은 완전히 친해졌구나. 이건 참 다행이긴 한데.

그러나 래빗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일단 여기서 탈출하고 싶다. 살려주세요.

난 호시탐탐 문만 쳐다보며 언제 나가면 좋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나저나, 먀침 잘 와따.”

“날 찾을 일이 있었나?”

“구래, 부탹이 하나 있다.”

저 문을 어떡하면 자연스럽게 열고 도망갈 수 있을까…….

“우리 롤린의 보약울 부탁하고 싶댜.”

그래, 우리 황녀님이 보약을 부탁하는 동안…… 응? 보약? 뭐?

“황녀님?”

“보약?”

나와 2황자가 동시에 말했다.

래빗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눈을 깜빡이고는 2황자에게 대답했다.

“구래, 보약. 우리 롤린이 너무 허약해소 말이다. 재료로눈, 바실리스크의 대챵과…….”

나에게 보약 먹이기. 서브 퀘스트 ‘저 하늘의 별도 따다 줄게!’에서 래빗이 처음으로 바랐던 소원이었다.

그때 들었던 기괴한 재료들이 조막만 한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천하의 2황자도 이때만큼은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운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질문이 있는데, 바실리스크는 현재 멸종 위기의 괴수이다만.”

“멸종? 그 지굿지굿한 것둘이?”

“그래, 50년 전부터 대대적으로 포획한 끝에 뿌리를 뽑았다고 하더군.”

“보통 질긴 것둘이 아닌데, 무순 특별한 방법이라도 쓴 곤가?”

“그…….”

2황자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정력에 좋다고 소문이 났다.”

“아.”

래빗이 빠르게 수긍했다.

래빗이 작은 소리로 ‘나 때는~’ 하고 중얼거리는 걸 봐서는 로아타 황제가 살아 있을 때도 그런 효능이 알려졌었는지에 대해 추측할 수 있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지구나 여기나 정력에 좋다는 말이, 씨를 말린다는 것과 동의어인가.’

이밖에도 2황자는 래빗이 일러 준 재료를 하나하나 되짚었다.

아무리 들어도 적응되지 않는 ‘해룡의 콩팥’ 따위였다.

“하지만 아주 사라진 건 아니니, 어떻게든 구할 수는 있을 것 같군.”

“오, 그론가!”

“다만 상당히 어려울 거다. 웬만한 실력의 검사가 아니고서야…… 아니, 설사 그 정도로 뛰어난 검사라도 아주 위험한 여정이겠군. 어쨌든 이 재료로 보약을 만들어 에스테 영애에게 먹이는 것이 네 계획인가?”

“그래.”

2황자는 나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그저 에메랄드 빛을 띠는 눈동자가 잠시 알 수 없는 빛을 띠었다는 것만 보았을 뿐.

“좋아, 한번 구해 보지. 재료를 구해올 자를 알아 보겠다.”

“오오!”

래빗의 얼굴이 태양처럼 환해졌다. 함박웃음을 띠고서 내게만 했던 손가락 잡기를 시전하더니, 마구 붕붕 흔들었다.

“오뺘, 네놈은 이야기가 잘 통하는구나. 제일 마음에 든다!”

“그래, 나도 그 호칭이 마음에 드는군.”

2황자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래빗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래빗은 살풋 미간을 찡그리긴 했지만 2황자가 하는 대로 그냥 두었다.

“저어, 황녀님……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부모님께서 기다리실 것 같아요, 하하하.”

“아, 그래, 시간이 늦었꾼! 갸 보도록 해.”

“넵.”

나는 얼른 2황자에게도 인사를 올리려 했지만 나의 노력은 바로 가로막혔다.

“데려다주도록 하지.”

“네에?!”

“뭔가, 그 반응은.”

2황자의 눈매가 잠시 좁혀졌다.

나는 딸꾹질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으며 하하하, 웃었다.

“목소리가 너무 좋으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대답이 커졌습니다…….”

“영애는 이제 내 목소리도 마음에 들어 하는 건가?”

“네?”

“아니지, ‘목소리만’ 싫지 않은 건가?”

“…….”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저거 비꼬는 거지? 그래, 비꼬는 거지.

나는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래빗을 바라봤다.

그러나 다른 때 같았으면 진작 나섰을 래빗이 어째서인지 다른 날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나를 한 번, 2황자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롤린, 내일 보쟈꾸나.”

“네에?”

“응? 안 가나?”

쫓겨났다. 아니, 왜? 왜 그렇게 흐뭇하게 저와 2황자를 보는 건데요!

“좋을 뗴로군.”

뭐가 좋아! 안 좋아, 안 좋다고요!

그러나 2황자가 뻔히 듣고 있는 앞에서 오늘 알현실에서 있었던 일을 고할 수는 없었다. 그럼 두 번 죽는 꼴이 될 테니까.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는 2황자와 고요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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