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65)
단서? 무슨 단서?
기억을 다 뒤져 봐도 단서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나는 괜히 요정의 창을 한번 노려봤지만, 요정은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도움 안 되는 자식. 넌 오늘부로 다시 요정 놈이다.
‘하지만 뭔가 힌트를 주려 한 건 분명해.’
요정을 100퍼센트 믿을 수는 없지만 일단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고민해 봐서 나쁠 건 없겠지.
단서라, 어디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집에 가면 기억을 돌이켜 보는 김에 펠프스 제국에 대해서 더 알아볼까.’
문득 시선이 팔목에 찬 팔찌를 향했다.
주연이 가까이 있으면 반짝거리는 아이템, 사이렌 오더.
팔찌를 빤히 보고 있으려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퀘스트 ‘황태자는 왜 신전에게 콩밥을 주고 싶을까!’를 달성했을 때, 사이렌 오더용 ‘강화 주문서’라는 걸 받았지.
딱히 당장 필요한 건 아니라서 아직 쓰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건…….
[아이템 강화 주문서(히든) - ‘사이렌 오더’용
효과: 아이템 ‘사이렌 오더’의 강화를 돕는 재료, 강화 시 능력이 추가된다.
추가되는 능력: ‘주연’들의 감정 상태를 알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생각을 더 잇지 못했다. 입 앞으로 불쑥 디밀어진 과자 때문이었다.
“황녀님?”
래빗이 조금 불안해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일단 래빗이 내민 과자부터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씹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화내눈 곤가?”
“화요? 제가 왜 화를 내요?”
“…내가 네 말울 둘어주지 않아서.”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니, 아니에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황녀님이 싫으시면 제가 원한다고 들어주실 필요는 없어요. 거기다 저는 황녀님이 행복한 길만 가길 바라는걸요.”
그래도 자연스럽게 황제와 마주칠 기회는 한번 만들고 싶은데, 이것만은 부디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일단 내가 살아남아야 우리가 계속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흑흑.
“하지만 우리눈, ……잖아. 그…….”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뭐라구요?”
“우리는 친구쟎아!”
볼을 복숭아처럼 물들인 래빗이 소리쳤다.
나는 큰 소리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에 더욱 놀랐다. 이 귀여운 생물은 뭐지.
탈모가 올 것 같군, 우리 래빗 때문에 헤어나올 수 없어!
어제 봐도 귀엽고 오늘 봐도 귀엽고, 100일, 아니, 100년이 지나도 귀여울 것 같은데!
“나눈 네게 명만 내리고 싶지눈 않댜, 너도 네 입으로 말했지 않우냐. 최고의 친구 자리는 네 거라고.”
“어, 그랬죠. 네.”
“그롬, 그 말 지쿄라. 왜 화가 났눈데? 계속 말이 없었쟎나.”
아, 요정이 말한 단서에 대해 생각한 거였는데.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고, 나는 짧게 고민하고는 입을 열었다.
“화난 거 아니에요. 제가 화낼 일이 뭐가 있어요.”
가슴을 당당하게 두드렸다.
“저는 황녀님이 숨만 쉬어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행복해지는 사람이에요.”
“과쟝이다.”
“어어, 진짠데?”
난 씩 웃고는 슬쩍 미소를 지웠다. 그런 내 얼굴을 쫓아 래빗도 미소를 지우고 진지해졌다.
“황녀님, 제가 사흘 전에 황제 폐하를 알현했잖아요.”
“…….”
“하하, 그런 표정 짓지 마시구요. 황제 폐하와 만나 보시라고 말씀 드리려는 거 아니에요.”
“뭔데?”
‘퀘스트 창, 황제를 향한 호감도만 보여 줘.’
[퀘스트(메인) - ‘아기 황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자!’
내용: 100일 내로 황가 사람들의 호감도를 90 이상 달성
진행 상황:
1. 황제(폭군) : -21 / 90 ]
그저께, 나는 퀘스트 ‘폭군의 기분을 풀어 보자!’를 완료하면서 래빗의 폭군을 향한 호감도가 소폭 증가하는 보상을 받았다.
무려 열 번에 해당하는 보고 올리기에 래빗이 직접 만든 종이꽃까지 전달한 보람이 있었다.
문제는, 소폭 증가했는데도 여전히 마이너스라는 거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멀어.
거기다 래빗의 원한이 워낙 깊으니 앞으로도 가시밭길일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방법이 아예 없진 않을 거다. 살고 싶으면 없는 길도 만들어야지 어쩌겠어.
“갑자기 그 얘기눈 왜 꺼낸 고지? 네가 정기적으로 알현을 하눈 곤 알고 있댜.”
“그때는 갑작스럽게 불려 갔던 거잖아요. 그날 있었던 일을 말씀 드리려구요.”
사흘 전 황제의 알현실에서 있었던 일은 어영부영 넘어갔다.
당시에 나도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래빗도 그날 이후 딱히 묻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절 지켜 주셨던 것은 전하께 직접 들으셨죠? 사실…… 그날 전 죽을 뻔, 아니다. 음, 죽을 뻔까지는 아닌데 다칠 뻔하긴 했어요.”
“……황제가 공격해소?”
래빗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항상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딸랑이를 손에 쥘 태세였다.
“아뇨, 정확히는 황제 폐하의 보좌관이 위협했고 그 이유는 제가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네가 오떤 의심을 받았는데?”
“신전과 결탁해 황녀 전하를 신전으로 보내 버릴 궁리를 하고, 황녀님 몸에 걸린 금지된 신성력을 이용해서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한다는 의심요.”
황제가 날린 도자기의 파편에 다칠 뻔했다던가, 황제가 내뿜은 살기에 숨이 막혔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보좌관이 육체적으로 나를 공격했던 건 아니지만, 무턱대고 조롱하고 의심했던 데 대한 내 소심한 복수다.
“대체 무순 개, 아니 멍멍이 소리더냐?”
래빗은 기가 차서 화도 안 난다는 얼굴이었다. 오, 아이답지 못한 얼굴.
하지만 이해한다. 나도 황당했거든.
요정의 창은 황족에게 래빗이 환생했다는 사실을 말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래빗에게 황족이 뭘 의심하고 있는지 얘기하지 말라곤 안 했잖아.
어째 ‘이러라고 말해 준 게 아닐 텐데요?’ 하고 속삭이는 황태자의 싸늘한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황제나 황태자나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거지.’
나는 래빗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황제와 황태자가 어떤 의심을 하고 있는지, 어쩌다가 그런 의심을 하게 됐는지. 그들이 확신을 굳힌 것이 시험의 날이었다는 것까지.
모든 이야기를 듣고 래빗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당황이 가득했다.
“허어, 그골 그렇게 오해하고 있댜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황당하시죠? 네 저도 황당합니다.
황녀님이 환생했다고 말하지 않는 한 황제와 황태자의 의심을 걷어 낼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없다.
“비센의 황족 놈둘은 모두 몽총이인가?”
“하하,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오라버니들도 끼어 있잖아요.”
“그롬 황제만?”
아이고, 황제를 여전히 많이 보기 싫어하는 건 아주 잘 알겠다.
“보면 그렇게 상황을 해석될 만하긴 해요.”
폭군이나 황태자는 래빗이 환생한 사실을 모르니까.
“사실 황녀님도 오해할 만하다고 생각하시죠? 황족은 다 비범하다던데 우리 황녀님도 똑똑하시니까 바로 다 파악하셨을 거 다 알아요.”
“넌 이롤 때만 나 칭챤해.”
“흐음, 제가 평소에 입이 닳도록 사랑한다고 말씀 드리는 건 까먹으셨나요?”
뾰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래빗의 눈이 일순 둥글어졌다. 그러더니 나더러 능숙하다며 화를 낸다.
뭐가 능숙하단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받아 줬다.
하지만 래빗이 콩콩 때리기 시작하자 조금 후회했다. 주먹은 솜털같이 작으면서 파워는 결코 솜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녀님,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신성한 힘을 각성하셨던 때를 기억하세요?”
요점은 이거다.
황제와 황태자가 의심하는 지점. 바로 래빗이 신성한 힘을 각성한 날이자 온 황실에 래빗의 존재가 알려진 날.
“당욘히 기억한댜.”
“음, 의심하는 건 아닌데,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것과 같은 일은 없으셨죠?”
“당욘한 거 아닌가?”
래빗이 발끈 화를 냈다.
“내가 그론 어설푼 짓거리에 당할 거 같냐?!”
워워, 그 딸랑이는 흔들지 말아 주세요. 방금 뾰족한 검기가 보였어, 보였다고.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전 아닐 거라 생각하고 여쭌 거죠! 확인차 여쭤본 거 아니겠어요!”
“후우…….”
“그럼 그날의 일을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폐하와 황태자 전하는 고위 신관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것 때문에 확신하게 된 것 같거든요.”
그러자 래빗이 서서히 화를 거두고 고민에 잠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반갑지 않운 신성한 힘울 각성했울 때, 어떤 노인이 가쟝 먼저 달려오긴 해따. 주변에 아무도 없었눈데, 내 앞에 바로 무뤂을 꿇더구나.”
“네네.”
“그게 끝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운 기사들이 쳐들어 왔어.”
“음, 그게 전부인가요? 다른 건요?”
“으움…… 이상한 말울 듣긴 했댜. 날 더러 뱐드시 신전으루 가야 한다고 하더구나.”
래빗이 뺨을 잡고 고개를 갸웃했다. 점차 심각한 표정이 됐다.
“생갹해 보면 더 이샹하구나. 그때눈 별 쓰잘데기 없눈 인갼이라 생각했눈데, 그 말울 할 때 분명 눈 색깔이 변했던 것 같댜. 그리고…… 확신에 차서 말햐더구냐. 내가 바로 따를 것초럼.”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자 중 고위 신관부터는 사람을 세뇌할 수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혹시 눈 색이 변했다는 게…… 세뇌를 걸려고 시도했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