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66)
“눈 색이 변하고서 이상한 건 못 느끼셨어요?”
“그론 건 없었다. 그리고 황제 그놈이 내가 세뇌를 당해따고 생각한다눈데, 그날 공격했을 때 나눈, 진심이었어.”
“…….”
“진심으로 공격한 고다.”
“으음, 알겠어요…….”
추론해 보자면 고위 신관이 세뇌를 시도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세뇌 능력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로 정리될 수 있겠군.
뭐,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
로아타 황제의 자아가 차지했기 때문이라거나, 황제로서의 힘이 강력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라거나.
‘이 황녀님이 전생을 기억한다는 점이 변수였겠어.’
이 얘기는 여기서 끝일 줄로만 알았는데, 웬걸, 래빗이 슬그머니 눈썹을 찡그렸다.
불쾌할 때 짓는 표정. 낯빛이 조금 하얘진 것도 같았다.
“롤린, 구러고 보니 좀 수샹햔 고시 있소떤 것 같댜.”
“네?”
“고위 신관의 눈 색이 뱌뀌고서, 비센 기샤들이 달려오기까지 그 짧은 사이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래빗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단 3분이어땨. 그 쟘깐 동안 무언가 불길한 새카만 것울 본 거 같댜. 그때 신관이 날 더러 ‘잠깐 주무실 시간입니다’라고 속샥이더규나.”
설명하던 래빗이 얼굴을 찡그렸다. 불쾌한 표정이었다.
“황녀님.”
“그건 기분이 이샹했어. 그 순간 뎡말로 졸리묜서…… 그 말초롬 잠꺈 잠둔 건가 싶었는데, 동시에 눈앞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떤, 내 제국의 마지먁이 떠올랐우니까.”
“…….”
“너뮤 생생해소 더 아프구 고통스러워따…….”
래빗이 살짝 떨었다. 나는 래빗의 손가락을 잡았다. 아이의 손끝이 차가웠다.
래빗은 자기 뺨을 잡으려다 말고 눈을 들어 올렸다. 흔들렸던 눈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그 뒤로눈 기사들이 찾아왔댜. 이게 끝이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래빗의 이야기와 내가 그간 보았던 모습을 종합해 봤을 때, 래빗은 그날 세뇌에 걸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만약 그때 세뇌에 걸렸다면 요정이 무언가 퀘스트를 주던가 했겠지.
하지만 래빗이 느꼈다던 ‘잠이 오는 기분’은 무엇이었을까? 전생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하다니?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이야기였다.
“황녀님 우리 불편한 이야기가 길었죠?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다. ……나야말로 이야기해 조소 고먑다. 놈이 그론 오해룰 하고 있눈 지는 몰라꾼.”
“그럼 그 오해를 푸실 생각은…….”
“없댜.”
“그럼 폐하 말고 황태자 전하께는 제대로 말씀드려 보시면 어때요? 이제 황태자 전하는 미워하지 않으시잖아요.”
나는 희망을 잃지 않고 슬쩍 다시 물었다.
“……그곤 어렵지 않을 것 같긴 하댜만. 나도 그 이상한 놈둘의 수하가 됐다는 당치도 않은 오해눈 불쾌하니까.”
됐다! 됐어! 황태자의 호감도를 먼저 달성한 게 키포인트였을까, 선선하게 끄덕이는 래빗을 보며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요, 그럼 오늘은 전하께서 오지 않으셨으니까 내일 오시면 이야기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울까 싶지만.”
“황녀니임.”
“끙, 알게따.”
황태자가 오해를 풀면 자연히 폭군에게도 전해지겠지.
폭군이 오해를 풀면? 그다음부터는 폭군 쪽에서 래빗에게 다가오려고 노력할 거 아니야.
좋은 소식이다, 아주 좋은 소식이야! 후후.
50년 묵은 변비가 나아도 이렇게 속 시원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하하, 나 살아남을 수 있다고.
“후후, 황녀님 감사해요.”
“…….”
“저도 황녀님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고 계시단 걸 알고 쭉 마음에 걸렸지 뭐예요. 그럼 앞으로는…….”
“달린.”
말하다 말고 난 깜짝 놀랐다.
래빗이 지금 내 이름을 똑바로 불렀어? 아니, 황녀님! 제 이름 제대로 알고 계셨으면서 왜 안 부르세요?
그러나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댄 래빗의 얼굴이 한없이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전투를 앞둔 기사의 얼굴처럼.
“……포위된 거 같군.”
“네?”
나는 이거야말로 개소리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벌렸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1층 테라스로, 무릎 정도 오는 난간 앞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평소에도 래빗과 함께 여기 앉아 정원을 보며 담소를 나누곤 하는 장소였다.
내 눈에는 주변이 평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래빗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가 입 모양만 뻐끔거렸다.
‘무슨 소리에요, 포위라니요? 여기서요?’
“구래, 여기서 말이지.”
래빗이 눈을 찡그렸다.
“감히 내 공간에서…… 내가 몰라따고?”
신관 론도의 습격 이후로 래빗은 가끔 이야기하다가도 주변을 돌아보곤 했는데, 그건 경계하는 몸짓이었다.
그래, 그날 이후로 그토록 바짝 날을 세우는 래빗의 감각마저 속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황녀 거처 주변을 둘러싼 그 엄중한 경비마저 뚫었다고?
그보다는…….
‘그날처럼 이상한 이동 장치를 썼다고 봐야 하나?’
론도처럼 말이다. 하지만 황실도 그 점을 알고 대비를 했을 텐데?
“기분 나뿐 힘이 느껴진댜. 그날 그놈이 썼돈 거 같운 거야.”
“아 혹시, 막 원처럼 빙 둘렀던 거요?”
“구래. 하지만 비교도 할 수 없이 기분 나쁘고 강력하댜.”
습격하던 날, 론도가 나타나자마자 우리 주변에 결계 같은 걸 쳤던 걸 떠올렸다.
일단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래빗의 태도를 보아선 심상치 않은 게 분명했다.
나는 얼른 치마를 걷어 올렸다. ‘빙의’ 스킬을 써야 할지도 몰라.
다행스럽게도 테라스에는 래빗이 가지고 놀다가 내버려 둔 검이 있었다. 시녀들은 래빗의 명에 따라 검에는 손도 대지 않았기에 나는 굴러다니는 것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테라스에는 난간을 통해 바로 정원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있었다. 래빗이 그 문을 가리켰고 난 문을 열었다.
“내 옆에 꽉 붙어라.”
래빗이 자박자박 걸어 테라스를 빠져나가고 나는 얼른 그 옆을 따랐다.
“시녀들은 괜찮을까요?”
“괜찮울 고다. 방과 복도에서 우리 말고눈 살아 있눈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써.”
“히익! 설마…… 주, 죽은 건 아니겠죠?”
래빗이 고개를 저었다.
“피 내움은 없었오. 우리만 조용히 이동댱한 거다.”
분홍빛 고운 눈동자로 날카로운 빛이 스몄다.
“이 공갼이 몬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눈지는 모르겠찌만.”
“끙, 일단 뭐든 경계하면서 가야겠네요.”
나는 검을 꽉 쥐었다. 엠버넷 씨를 부르는 빙의 스킬에는 제한 시간이 있다.
그러니까 쓸 타이밍을 정확히 맞춰야 해. 쓸데없이 낭비해서는 안 되니까.
‘이상한데.’
날카롭게 경계를 하는 래빗과 별개로 나는 기묘함을 느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났는데 퀘스트 하나 없다고? 이건 분명 퀘스트가 주어질 타이밍이었다.
‘요정.’
[요정은 지켜보면서 방긋 웃어요!]
뜻 모를 메시지에 나는 가만히 창을 응시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자.
빙의 스킬로 기사 엠버넷의 영혼이 빙의 가능했다면, 어쩌면 내가 빙의시킬 수 있는 다른 영혼도 있지 않을까.
엠버넷 씨가 래빗의 과거와 밀접하게 연관된 영혼이었던 것처럼 다른 영혼도 그럴지 모르고.
혹시나 그 영혼 중에 마법사는 없으려나? 래빗이 검을 잘 다루니 난 마법을 쓸 수 있어도 좋을 텐데.
“황녀님, 혹시 과거에 친하게 지낸 마법사는 없으셨나요?”
“뭐?”
래빗이 잠시 경계하는 것도 잊고 나를 쳐다봤다. 그 눈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크게 놀랐다는 듯이.
말실수했나 싶어 난 얼른 손을 가로저었다.
“……우린 기사들의 제국이어땨.”
“아, 네. 알죠, 알죠. 그렇지만 마탑은 존재했었잖아요?”
“……그러치.”
후, 펠프스 제국에 대해 미리 공부해서 다행이다. 래빗은 무어라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래빗이 바로 몸을 돌렸다.
“온댜.”
그와 동시에 사사삭, 풀이 흔들렸다.
나무 뒤에서, 우거진 풀 사이에서, 그리고 투명한 무언가가 색을 얻어 스르륵 형체를 갖추는 것까지.
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침입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새하얀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기세는 이전의 암살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겠는데.’
나는 이를 꽉 깨물며 자세를 잡았다.
이때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눈에 띄게 젊은 남자였다.
“아아, 그분의 위대한 힘을 이어받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샛노란 머리카락과 불길할 정도로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
남자가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으나, 이런 상황에서는 조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 이름은 로알, 그분의 신실한 세 번째 날개입니다. 다섯 명의 대신관 중 하나라는 말이 더 이해하기 쉬우시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