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68)
“이거야 원, 놀랍군요.”
조롱 섞인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래빗이 어떤 것을 보고 있을지 알기에 초조함이 앞섰다.
“당신이 모시는 분은 염려 마세요, 그저 잠시 악몽을 꿀 뿐입니다.”
“……래빗, 래빗 황녀님!”
“제일 무서웠던 악몽이라고 해 봤자 황녀님께서는 기껏해야 천둥이 치는 꿈이려나요?”
아니, 아니다. 나는 울먹였다.
또다시 그녀의 소중한 나라가 멸망하는 끔찍한 꿈일 것이다.
그간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신관들은 정신 공격이 가능하단 점에서 래빗에게는 최악의 상대였다.
‘이대로는 안 돼!’
위대했던 만큼 자신의 업적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한 내 황녀님. 우리 황녀님이 그런 약점을 가지고 계실 줄이야. 낭패였다.
하지만, 미리 알았어도 과연 대비할 수 있었을까?
“……스킬, ‘빙의’.”
조금만 더 버티면 그 남자가 올 거야.
왜 이 순간 2황자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남자라면 분명 달려오고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황태자도.
그들은 절대 늦지 않을 거야.
[스킬 ‘빙의’의 쿨타임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사용이 불가하다고 알려요!]
‘엠버넷 씨, 듣고 있죠? 당신 힘 빌려줄 수 있잖아요. 그렇지?’
어느새 남은 신관들이 로알의 주변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각기 쓰러진 자를 들쳐메거나 부축한 채였다.
날카로운 시선들.
그 사이에서 누군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하얀 갑옷을 걸친 남자였다.
“이 여자는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웃고 있지만 나를 샅샅이 해부하는 로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흐음, 글쎄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로알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나는 반투명한 창을 곁눈질한다.
‘요정, 그 퀘스트는 안 해!’
[요정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해요. (·•︠_•︡ ) 원작의 주요 이벤트라고 알려 주어요.]
[거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퀘스트가 계속 진행됩니다.]
남자들의 논의가 이어진다.
“본보기로 죽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겁니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이 자들을 노려봤다. 이 사이비 같은 것들이 뭐라는 거야, 지금.
“아니, 죽일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렇다고 증인을 남길 필요도 없으니…….”
로알의 입술이 매끄럽게 떨어졌다.
[퀘스트가 강제 진행됩니다!]
‘안 해, 안 한다고!’
어느새 나는 래빗을 독자로서도 친구로서도 진심으로 아끼게 되었다. 그러니 래빗에게 해가 될 일은 진심으로 하고 싶지 않아졌다.
[요정의 창이 제시한 방향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페널티!]
[메인 퀘스트 - ‘아기 황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자!’의 남은 기간이 줄어들어요!]
눈앞의 숫자에서 십의 자리가 가파르게 줄어들었다. 7에서 6, 6에서 다시 5…….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이윽고 한 숫자를 가리켰다.
[남은 기간 – 15일]
요정이 내게 묻는 것 같았다.
이래도 ‘반항’할 거야?
[이런,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소폭 떨어지고 말았어요! 현재 건강 수치: 59]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대폭 떨어지고 말았어요! 현재 건강 수치: 50]
요정의 창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동시에 고장 난 모니터처럼 창 위로 지지직 노이즈가 끼거나 아예 흐릿해지길 반복했다.
“알립니다, 대신관님! 아무래도 황실 쪽에서 무언가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날카로운 시선이 내 뺨을 향했다. 옆에서 급히 소리치는 목소리가 커졌다.
“1차 결계가 부서졌습니다!”
“안쪽은?”
“아직 안쪽은 건재하나…….”
그러자 로알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이 사람도 데려가죠.”
“네?”
나는 신음을 흘렸다. 로알이 내 손을 꽈악 밟고 있었다.
“보았겠지만 더없이 재능이 출중한 자가 아니겠어요. 그분께서는 재능있는 이들을 곁에 두는 것을 좋아하실 겁니다.”
“…….”
로알의 검은 눈 속에서 위험하리만치 번뜩이는 황금빛을 보았다. 그것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며 춤을 추었다.
“하지만 그래요, 이대로는 위험할지도 모르지요.”
로알의 구두 앞코가 보였다. 그대로 웁, 하고 숨이 막혔다. 누군가가 내 뒷덜미를 잡고 강하게 누른 탓이었다.
‘이런 건방진 눈은…….’ 따위의 말이 들려왔다.
동시에 푸욱, 어깨와 팔에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너무 아파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시선을 돌리자, 팔을 관통한 검이 보였다.
[치명적인 부상!]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대폭 떨어집니다. 현재 건강 수치: 35]
“아, 이젠 보기 좋군요.”
대신관의 눈동자에 뚝뚝 눈물을 흘리는 내 얼굴이 비쳤다.
“그분께서 참 좋아하실 겁니다. 특히나 이런 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말이지요.”
이 순간에도 내 시야 한쪽에는 푸른 창이 아로새겨졌다.
[요정은 마지막으로…… 지직- 경고해요!]
[이 이상 거부하면…….]
[달린, 네가 아끼는 아기 황녀가 죽게 될 거야.]
시야를 채우는 새빨간 글씨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선다.
지금 당장 날 강제로 끌고 갈 이들보다 요정의 창이 더욱 두려웠다.
이도 잠시, 이를 꽉 깨물었다.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가 이 모든 공포와 고통을 뛰어넘었다.
망할!
[퀘스트가 강제로 진행됩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글자에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이윽고 퍼억, 소리와 함께 나는 시야가 암전되는 걸 느꼈다.
* * *
똑. 똑. 똑…….
스르륵 눈을 떴을 때, 시야 가득 들어찬 것은 다름 아닌 새카만 어둠이었다. 눈을 깜빡이자, 점차 색이 눈에 익었다.
완전히 까만 것도 아닌 불투명한 천으로 가로막힌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안대?
‘손이 안 움직여.’
단단하게 고정된 손을 움직여 보다가 포기하고, 어깨에 뺨을 비볐다. 다행히 눈을 가린 천은 금세 풀렸다.
‘뭐지? 동굴?’
눈앞으로 조금 어두 컴컴하고 음산한 공간이 보였다. 회색빛 바위가 가득하고, 아래로는 새하얀 기둥이 보인다.
[스킬 ‘몸에 나쁜 각성제(lv.2)’가 활성화 중입니다. ※남은 시간: 1:03:46]
쓰러진 지 약 두 시간 정도 된 건가? 생각보다 그리 오래 지나진 않았다.
그럼 래빗은 어디로 간 거지?
나는 곧 애타게 찾아 헤매던 아이를 찾았다.
래빗은 이 거대한 공간 한가운데 묶여 있었다.
래빗의 출중한 능력에 걸맞게,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묶인 채였다.
문제는 아무리 봐도 이 공간이 심상치 않다는 거였다.
음산하고 음침한 공기, 거기다가 래빗이 쓰러진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저 네모난 상자.
흡사 ‘제단’처럼 보였다. 신을 위한 제물을 바치는 곳…….
“래…… 큽!”
악! 아파!
부르려다 말고 난 고통에 몸서리쳤다.
고개를 돌리자, 팔에 아무렇게나 묶어 둔 천이 보였다. 대충 둘러 두기만 한 천 위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 와중에 출혈이라니 좋지 않은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발목은 묶이지 않은 상태였다.
우선 무릎으로 기어 근처에 있던 날카로운 돌멩이를 쥐었다.
잠든 래빗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거기다 얼굴에는 식은땀이 흥건해서, 그녀가 어떤 꿈에 사로잡혀 있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동시에 눈앞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떤, 내 제국의 마지먁이 떠올랐우니까.”
아마도 최악의 악몽을 꾸고 있을 터였다. 빨리 깨워야 하는데…….
[출혈이 이어집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º·(˚ ˃̣̣̥⌓˂̣̣̥ )‧º·˚ !! 현재 건강 수치: 30]
망할 요정 놈. 이 시베리안허스키 같은 XX야! 그래, 니가 잠잠하다 했다.
나는 묶인 손에 겨우 돌을 들고 마구 비볐다. 다행이랄지 나를 묶은 천은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아파!’
아마 이 정도로 다쳤으니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나는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래서 건강 수치 팍팍 줬냐, 이 이 빌어먹을 XX야?
어쨌거나 래빗은 정신에 강한 충격을 받고 쓰러진 상태, 상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깨워야 한다.
“준비는 순조로운가?”
그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저쪽에 문이 있었다는 것과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준비는 30분 전에 완료되었습니다.”
깊은 상처로 감각이 흐릿해진 탓에 반응 속도가 조금 느렸다.
제때 눈 감고 기절한 척했다면 좋았겠지만, 타이밍이 늦었다.
들어선 사람은 새하얀 옷을 걸친 나이가 지긋한 노인으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나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엇, 여자가 깨어났습니다만 어떡할까요?”
“됐어. 내버려 두거라.”
노인의 눈이 어느새 바닥에 흥건한 내 피를 보고 픽 비웃었다.
“오래 살지도 못하겠군. 죽기 전에 잘 써먹기나 하자고.”
아니거든, 이 삐---야! 그냥 피가 조금 많이 나온 거거든?
나는 속으로 악감정을 가득 담아 중얼거리며 돌을 꾹 쥐었다.